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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았던 7년
에트가르 케레트 지음, 이나경 옮김 / 이봄 / 2018년 11월
평점 :
절판
처음 만나는 작가. 거기에 이스라엘 작가 역시 처음이라 낯설었는데 내가 좋아하는 노란 표지를 입을 책을 받고는 조금 호기심이 생겼다. 책의 맨 앞장에 적힌 작가 소개란에 이스라엘 젊은 세대의 가장 큰 지지를 받는 단편의 귀재, 뉴욕 타임스로부터 '천재'라는 찬사를, 동료 작가들의 극찬을 받은 동시대 가장 독창적인 작가, 라는 말에 관심이 생겼고 25년 작가 생활 중 처음으로 쓴 논픽션 에세이 집이라는 것에도 흥미가 갔다. 그렇게 펼쳐든 책머리에서 그는 말했다. 한 작가가 저서를 가리켜 자신에게 특별히 중요한 책이라고 말해도 큰 의미를 부여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은 내게 정말로 각별한 책이다. 세상에서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들에 관한 책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러분은 나와 한 열차를 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르면 나는 역에서 내릴 것이고, 우리는 아마 다시는 서로 만나지 못할 것이다.-책머리 중에서.
떠나려고 탔던 기차에 우연히도 처음 보는 이스라엘 작가가 있었고, 나는 마침 그의 옆자리.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가 그동안 누구에게도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의 이야기는 아들 레브가 태어나는 날로 시작되어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의 7년 간의 이야기였고 나는 내내 덤덤하게 쏟아내는 이야기와 간혹 던지는 농담에 미소가 끊이질 않았지만 먼저 도착지에 다다른 그가 떠난 후 혼자 남아 많이 울었다. 돌아보면, 그의 덤덤함과 민망함 속에 던져진 농담이 가장 아프던 말이었다. 그가 떠나던 뒷모습은 기억이 안나는데 그가 웃으며 이야기하던 순간 순간들이 잊혀지지 않아 또 한 번 눈물을 쏟는다.
나는 그의 이야기에 참 많이 공감했다. 조카의 탄생을 기다리며 병원에서 하루 종일 안절부절 못했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고 동화책이 아닌 아버지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으며 아버지의 어린 시절을 상상하던 날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의 이야기에 내 이야기가 떠오를 때면 끼어들어 나도 그런 날이 있었다고 맞장구치고 싶어져 책을 살며시 내려놓고 지난 날을 그리워 하기도 했고 맞장구 칠 겨를도 없이 그의 이야기에 빠져 어쩌면 내려야 할 역을 지나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테러와 전쟁으로 오랜 시간 고통 받았던 날들이 평범한 일상이 되는 것. 그런 삶에도 누군가는 태어나고 또 누군가는 떠난다는 것. 그럼에도 변함없이 흘러가는 일상 속에 우리는 어떤 태도로 살아가면 좋을까 진지하게 고민하다 그가 던진 풍자와 농담에 픽- 바람 빠진 풍선처럼 웃다보니 결국 균형을 되찾는 일은 겨우 그정도인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곁에 있는 사람들과 행복하게 웃으며 평범한 대화를 나누는 삶. 눈물이 날 것 같은 날에는 농담을 던지기도 하고, 진짜 못 참겠는 날에는 다시는 만날 일 없는 사람들을 붙잡고 하소연을 하기도, 울기도 하는 삶. 좋은 날들이다.
71p 전혀 희망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좋은 것을 발견해야만 하는, 인간의 필사적인 욕구. 현실을 미화하지는 않되, 추한 것을 좀더 나아 보이게 하고, 흉터 남은 얼굴의 사마귀와 주름살에 애정과 공감을 일츠키는 각도를 찾고자 하는 욕망.
144, 145p 아버지는 벌레를 죽이는 것과 개구릴를 죽이는 것을 구별하는 선이 있고, 아무리 어렵다 하더라도 그 선을 결코 넘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세상의 이치가 그렇다. 작가는 그것을 만들어내지 않았지만, 말해야 하는 것을 말하기 위해 존재한다. 벌레를 죽이는 것과 개구리를 죽이는 것을 구별하는 선이 있다. 그리고 작가는 살면서 그 선을 넘은 적이 있다 하더라도 그 사실을 지적해야만 한다. 작가는 이 세상의 이해하기 어려운 현실을 조금 더 예리하게 감지하고 조금 더 정확한 언어로 설명하는, 또하나의 죄인일 뿐이다.
146p 뉴햄프셔 한복판 맥도웰 예술인 마을에서 진짜 사자와 대면하고 잠시 그 공포를 느꼈을 때,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가장 예리한 지식조차도 둔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지와 지원 없이 창조하는 사람, 그에게 재능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에워싸여 여러 시간 노력한 후에야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항상 그 진리를 기억할 것이다.
208p "그런데 왜?" 레브가 끈질기게 물었다. "왜 아버지는 아들을 지켜야 돼?" 나는 잠시 생각한 뒤 대답했다. "있잖니." 아이의 뺨을 쓰다듬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가는 세상은 가끔 아주 힘들기도 하거든. 그러니까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적어도 지켜줄 사람 하나는 옆에 있어야 공평하지." "아빠는?" 레브가 물었다. "이제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아빠는 누가 지켜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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