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성어 서점 마음산책 짧은 소설
김초엽 지음, 최인호 그림 / 마음산책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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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현실이 정말로 같을까? 그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것만이 진실한 대화일까? 너는 그것을 어떻게 확신하지? 어떤 사람은 수요일에서 바닐라 냄새를 맡고, 또 어떤 사람은 남들이 결코 구분하지 못하는 여러 가지 빨간색을 구분하지. 우리는 바다를 유영하는 고래의 관점을 상상하지 못하겠지. 자신의 수천 배나 되는 몸집을 가진 동물에 기생하며 살아가는 진드기의 관점을 헤아려 볼 수도 없겠지. 평생을 살아도 우리는 타인의 현실의 결에 완전히 접속하지 못할 거야. 모든 사람이 각자의 현실의 결을 갖고 있지. 만약 그렇게, 우리가 가진 현실의 결이 모두 다르다면, 왜 그중 어떤 현실의 결만이 우세한 것으로 여겨져야 할까?"

사람들은 매번 물어온다. "그럼, 이런 서점이 대체 왜 있는거예요?" 답은 명쾌하다. 인류의 모든 뇌에 수만 개 은하 언어를 지원하는 범우주 통역 모듈이 설치된 이 시대에도, 어떤 이들은 낯선 외국어로 가득한 서점을 거니는 이국적인 경험을 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완전한 이방인으로서의 체험. 어떤 말도 구체적인 정보로 흡수되지 못하고 풍경으로 나를 스쳐지나가고 마는 경험…… - P63

덕분에 이 서점의 책들은 읽히지 않음으로써 가치를 부여받았다. 세상에는 이해하기 힘든 취향을 가진 사람들도 조금씩은 있기 마련이라, 서점에 들어선 사람들 중 일부는 감탄하며, 신이 나서, 혹은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책을 사서 돌아간다. 그런 고객들 덕분에 매출은 서점이 유지될 정도로는 꾸준했다.
하지만 나는 팔려나간 책들의 내용이 영원히 미지로 남으리라는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슬펐다. 행성어를 아는 사람은 이제 은하계 전역에 수백 명밖에 남지 않은 데다, 행성어를 모어로 쓰는 이곳 주민들은 이런 여행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서점에는 관심이 없으니, 이 책의 독자들은 언젠가 멸종하고 말 것이다. - P63

나는 먼 은하계에서 이곳까지, 누구에게도 읽히지 않은 책들을 읽기 위해 찾아왔다는 그가 갑자기 10년은 넘게 만난 친구처럼 반갑게 느껴졌다. 여자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계속 망설이다가,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떠나기 전에 저녁이라도 같이 드실래요?"
여자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당장 오늘 밤도 좋아요."
그날 저녁 서점의 문을 닫고 나는 서가 앞에 섰다. 기분이 좋았고 춤을 추고 싶었다.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있을까? 그러지 못하더라도, 나는 그를 만나서 기뻤다.
이곳 행성에 수십 년간 살았던 할머니가 쓴 수필집과, 서점의 밤과 낮이 담긴 그림책과, 전뇌 테러를 다룬 서스펜스소설을 서가에서 골랐다. 먼지를 털어내고 종이 가방에 책을 담고 리본을 묶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두 번째 독자를 만날 책들이었다.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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