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지음, 김이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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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물리학 전공 서적 같은 제목의 이 소설집에는 10개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리뷰 제목을 류시화 시인의 잠언 시집 제목과 똑같이 선택한 이유가 있다.

 

이 책을 읽으며, 소설 속의 내용보다도 서술 기법에서 기묘한 울림을 느꼈다. 그 기법은 과거와 현재 사이의 시간의 격차만큼 과거의 서술자와 현재의 서술자 사이의 앎의 낙차를 보여 주는 서술 방식이었다. 그 방식이 서술자에게 공감을 느끼도록 해서 읽다가 어떤 장면에서는 울컥하기도 했다.

 

그러나 멀리 떼어 놓고 보면, 소설의 내용 자체에 크게 공감을 한 것은 아니었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소설은 <코요테>이다.

 

나는 이제, 이십 년이나 흘렀으므로, 아버지는 한때 자신이 성취하고자 했던 유형의 명성이 허락될 운명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위대한 영화감독(위대한 다큐멘터리 감독은 거의 없다)은 그의 몫이 아니었고, 동시대 많은 이들이 누린 뛰어난 재능도 그의 몫이 아니었다. 아버지에게 분명히 있기는 했던 조금의 재능은 단지 좌절의 원천으로만 작용하며, 실현되지 않은 막연한 잠재력을 끊임없이 상기시켜줄 뿐이었다. (17~18쪽)

 

나는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그해 여름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 있었던 일을 모두 알게 되었다. 그때 나는 아버지의 정신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우리와 '떨어져' 있던 내내 사실은 시내의 한 모텔에 머무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어머니는 여전히 아버지와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나 일이 끝나고 저녁마다 아버지를 만나러 갔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내가 아는 것은 우리 삶의 뭔가가 돌이킬 수 없이 변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37쪽)

 

"궁금해서 그러는데 말이다. 너는 이 비슷한 일을 업으로 삼고 싶다는 생각이 드니?"

"무슨 일이요?"

"내가 하는 일."

"영화movies 찍는 일이요?"
"영화films 찍는 일."

"영화films."

"그래."

"글쎄요."

아버지는 웃었다. "나라면 안 할 것 같다. 할 수만 있다면 안 해." (39~40쪽)

 

위의 상황에서 아버지가 어떤 심경으로 그런 말을 했을지가 느껴졌다.

아버지는 일에서도, 가정에서도 인정 받지 못하고 실패해버린 자신을 자책하면서 영화를 한 걸 후회하고 있었다.

 

내 거실에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 영화의 프리미어 시사회 날 밤에 찍은 사진이 있다. 그들은 뉴욕의 어느 소극장 밖에 서 있고, 아버지는 위쪽으로 보이는 마르키*의 불빛을 가리키고 있다. 아버지는 슈트 차림으로, 어머니는 긴 이브닝드레스 차림으로, 둘이 나란히 있는 모습을 본 내 기억 속 유일한 때다. 그들은, 그 둘은, 바람 불어오는 쪽으로 몸을 살짝 숙이고, 자신들이 아직 보지 못하는 무언가에 맞서, 서로를 감싸안은 모습으로 미소를 머금고 있다. (45쪽)

 

*마르키:극장이나 영화관 간판에 상영작 제목 등을 적어넣고 주위에 전구나 네온 등을 설치해서 반짝거리게 하는, 일종의 상영 정보 게시판.

 

앞으로 어떤 일이 닥쳐올지 그들은 아직 모른다.

그래서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좀 다를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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