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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길 ㅣ 이청준 문학전집 중단편소설 5
이청준 지음 / 열림원 / 2000년 7월
평점 :
절판
<눈길>을 오랜만에 읽었다. 고등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 하권에 실려 있어서 고등학교 때 처음 읽었는데 보통 내신공부를 위해 문학을 공부하면 아무리 좋은 문학 작품이라도 그 가치와 재미를 잘 느낄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수업시간에 읽고 또 혼자 읽어봐도 정말 감동적이었다. 몇 개월 전에도 도서관에서 따로 책을 빌려서 이 작품을 읽었는데 감동이 줄어들기는커녕 더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난다. 또 다시 <눈길>을 읽으니 그 감동이 되살아 나면서 마지막 어머니의 심경을 듣는 순간에는 또 눈물이 났다.
“내일 아침 올라가야겠어요.”
소설의 시작에서부터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리고 대화중심의 소설임을 보여준다. 이 소설의 중요한 장면은 대개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아내가 어머니에게서 그 대화를 이끌어 내는 것이다. 이 소설은 어머니와 아내의 대화 분위기, 주인공들의 행동 하나하나, 단어 하나하나에서도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소설의 구성 요소 각각이 잘 짜여져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의 친 어머니임에도 불구하고 차갑게 대하는 아들의 태도,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어머니를 ‘노인’이라고 칭하는 것이다. 번번히 ‘노인’에게는 ‘빚’이 없다고 말하면서 아들은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숨기려 한다. ‘노인’은 자기에게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으므로 자기는 ‘빚’이 없고, 그러니 그녀가 무언가를 원하더라도 해주지 않아도 된다고 계속 자신에게 말한다. 그러나 글을 읽고 있는 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아들은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어머니가 자신에게 보여준 사랑의 증거물인 ‘옷궤’를 보면서 마음이 편하지 않은 것은 거기에 대해 자신이 어머니에게 너무나 감사하고 있음에도 그것을 표현하지 못하고 잊음으로써 차가워지려 한다. 또한 ‘나’ 자신도 실제로 형편이 어려워 어머니에게 많은 것을 해줄 수 없으므로 이에 대한 자기방어를 하고 있는 것이다. ‘노인’이라는 호칭을 쓰면서 어머니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지만 결국은 자신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그것을 인정하고 들추어내지 못하고 약간은 삐뚤어진 애정표현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어머니의 무덤덤한 태도도 인상적이다. 아들이 자신에게 차갑게 대함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그것에 대해 화내거나 슬퍼하지도 않고 덤덤하게 받아들인다. 아내가 어머니를 부추기며 어머니의 속마음을 얘기해보라고 권하여도 어머니는 그저 자기 속으로만 삭히고 감내할 뿐이다. 말을 아끼며 장죽 끝에 풍년초를 꾹꾹 눌러 담는 모습에서 아들에 대한 서운한 마음과 아들에게 해준 것이 없는 미안함을 삭이고 있는 어머니의 안타까운 심정을 읽을 수 있었다. 이 소설에서는 이처럼 심리를 적극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구체적인 형상이나 사물을 통해 간접적으로 나타내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렇게 표현함으로써 독자의 입장에서는 더 안타까움이 전해지고 공감이 가는 것이다.
하지만 ‘나’가 인정하기 싫어하는 ‘빚’이 정말 없을까, 어머니가 아들에게 미안해 하는 것처럼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을까. 물론 집안 형편이 어려워 아들에게 물질적인 지원을 많이 못 해주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부모가 자식에게 송구스러워 해야 하고, 아들은 어머니에게 받은 것이 없다고 자기도 줄 필요 없다는 생각을 갖는 것은 도리에 어긋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집이 팔렸음에도 불구하고 먼 곳에서 온 아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 지어 먹이기 위해 옷궤를 집안에 두고 아무렇지 않게 아들을 맞은 어머니, 아들을 끝까지 배웅해주기 위해 하얀 눈길을 함께 걷고 훌쩍 떠나버린 아들을 뒤로한 채 혼자 눈 발자국을 따라 동네로 돌아오던 어머니의 눈물겨운 심정을 생각하면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느낄 수 있다. 진심으로 어머니의 사랑만큼 큰 사랑은 없다고 생각한다. 당시에는 혼자 돌아갈 어머니에 대한 생각을 애써 지우려 했던 아들도 결국은 자신이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어머니의 큰 사랑과 어머니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확인하며 눈꺼풀 아래 뜨거운 것이 차오르는 것을 느낀다.
이 소설은 모자간의 사랑을 확인해가는 과정을 점심 때부터 밤까지의 한나절 동안의 시간적 배경에서 그리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하루 동안에 일어난 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 옛날 일어났던 어머니와 아들이 걸었던 눈길에서 어머니와 아들 간의 사랑을 찾을 수 있다. 그 기억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서 이 하루가 쓰였던 것이다. 뒷이야기는 나오고 있지 않지만 분명 ‘나’는 ‘노인’이 아닌 ‘어머니’에게 사랑을 전하며 고맙다는 말을 하게 되지 않을까. 모자간에 쌓아 두었던 모든 오해와 서운함과 미안함 따위는 버리고 펑펑 울며 터놓고 이야기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가슴이 찡해지며 미소가 절로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