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
윤성희 지음 / 창비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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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은 식구가 많은 집에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새 신발을 신어본 적이 없었다. 형들의 신발을 물려 신는 것을 싫어하던 그는 형들보다 키가 커지려고 계속 먹어 대는 바람에 살이 쪘다. 첫눈이 오던 날, 비료포대로 썰매를 타는 데, 그의 몸무게 때문에 가속도가 붙고 밑창이 닳아버린 운동화로 썰매를 멈출 수 없어 그와 비료 포대는 계속 달린다. 그러다가 달리는 자동차 앞까지 뛰어든다. 한 사내가 그의 등을 밀쳐내고, 그는 이마에 가벼운 찰과상만 입었지만 사내는 비료 포대를 덮고 한쪽 구두만 신은 채 죽었다. 이 사건에서부터 그의 상처가 시작된다. 그 날 집으로 돌아오면서 발을 찌르는 볼펜, 심이 빠져버린 볼펜을 본 후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물건들을 상상하며 모으는 취미를 가졌다. 아마도 쓸모없는 물건들을 보며, 그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한 것이 아닐까. 자신을 구하다 목숨을 잃은 사내를 생각하며, 또 그에게 남겨진 만삭의 아내를 생각하며 그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자신의 존재를 비하하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는 어린 나이임에도 매우 사색적이었다. 물 묻은 바퀴를 굴리며 하나만 남은 바퀴가 왜 쓸쓸한가를 생각하고, 도살장으로 실려 가던 돼지가 도망가는 장면에도 격렬히 반응한다. 아마도 그 사내의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가 무의식적으로 그에게 작용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는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중학생이 된 그는, 아버지에게 온 편지를 받게 된다. 그 사내의 아내, 만삭이었던 아내가 낳은 아이가 자라며 자기 집에 편지를 계속 보내오고 있었던 것이다. 해마다 편지를 받고 그는 그 편지의 주소로 무작정 떠난다. 자전거를 타며 엉덩이에 피가 날 정도로 힘들게 가서 아이를 만났지만 그는 그냥 돌아오고 만다. 집으로 돌아와 실종신고도 안 하냐는 물음에 가족들은 국수나 먹으라고 한다. 이 장면은 유머가 번득이면서도 슬픈 장면인 것 같다. 그는 그의 상처에 다가가려 노력하지만 아직 치유하지는 못한다.

세월이 흐른다. 작가는 짧은 문장 안에 긴 시간을 담고 있어 속도감 있게 사건이 전개된다. 따라서 이 소설은 짧은 분량이지만 굉장히 긴 이야기를 읽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세월이 흘러, 그는 열아홉의 생일날 밤 집을 나온다. 이어 우연히 어느 집의 정원사로 일하게 되고 7년 동안 마당의 정원에 아무 것도 자라지 않게 관리하는 일을 맡는다. 땅을 파고 흙을 파내고 이를 다시 쏟아 붓고, 땅을 파서 나무의 뿌리를 발견하고 뿌리를 뽑아 잘라내 태우는 등 어떻게 보면 이해하지 못할 행동들을 하는 그는 상처를 아마도 치유하는 중일 것이다. 꽃 그림, 개구리 그림, 우산 그림 등 아름다운 그림 타일을 담에 붙이고 그는 주인 여자에게 꽃다발이 새겨진 타일을 선물로 준다. 마당의 정원을 관리하면서 그의 마음까지 정리 된 것일까. 이제 그는 그의 상처를 치유한 듯 보인다. 아마도 상처를 지닌 듯해 보이는 주인 여자 또한 꽃다발 그림의 타일이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오래전에 잊었어야 했던 이름이 새겨진 문패’를 떼어냈다. 아마도 그녀에게는 그 이름의 주인공이 상처였나 보다.

그리고 그는 다시 옛날 아이를 만났던 곳으로 향했다. 벌써 열아홉 살 청년이 된 아이와 함께 그는 자연스럽게 오리배를 탄다.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지만 중요한 무언가를 공유하고 알고 있는 두 남자가 오리배를 타는 풍경은 매우 감각적으로 그려진다. 그러다가 그가 힘이 빠지자 청년은 오른손을 그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힘내세요.”라고 말하는 청년과 따뜻해지는 왼쪽 무릎. 그는 갑자기 잊고 있었던 수많은 장면들을 떠올린다. 그것은 가족들과의 무릎에 얽힌 추억이었다. ‘무릎’이란 가족애처럼 서로에게 베푸는 온정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식구가 많은 가족으로 인해 불편한 점도 많고 이를 짐처럼 여겼지만 그러한 식구들이 그에게는 커다란 힘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의 마음 속 상처가 치유된 순간, 그는 이를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는 청년과 어머니가 집을 옮겨 다니며 사는 상황과 대비된다. 청년의 가족은 경제적으로는 여유로웠지만 온정이 부족했다. 이를 느낀 그는 청년의 오른쪽 무릎 위에 자신의 왼손을 올려놓으며 “힘내자”는 메시지를 전한다. 그리고 쓸모없는 것들만 모아놓은 박물관에 대해 얘기하며 집에서 멀어져 간다.

이렇듯 이 소설은 시간이 흐르는 대로, 순차적으로 구성된다. 속도감 있는 전개와 함께 많은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압축적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그래서 소설은 흡입력을 지니고, 독자는 소설 속 사건의 흐름에 몸을 맡기게 된다. 또한, 이 소설은 ‘무릎’으로 상징되는 가족에 대한 혹은 타인에 대한 온정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를 구한 사내의 마음도 바로 온정이었을 것이다. 비록 그는 그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하고 그래서 온갖 쓸모없는 것들에 집착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또한 소외된 것들에 대한 그의 온정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다. 그는 집을 나와 정원을 관리하고 상처를 치유해간다. 주인집 여자에게 선물을 하며 온정을 베풀고 난 후, 이제 자신의 상처를 마주볼 수 있게 된 그는 아이에게 찾아간다. 청년이 된 아이와 그는 서로에게 온정을 베푼다. 그리고 그는 가족의 온정도 깨닫는다. 결국 이 소설의 바탕에는 온정이 깔려 있는 것이다. 그것을 보여주는 ‘무릎’이 제목인 것도 이해가 간다. 처음에는 이해하기 힘들고 이상한 소설이라고 생각했지만, 소설을 다 읽은 지금은 내 마음까지 따뜻해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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