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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의 도시
폴 오스터 지음, 윤희기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6월
평점 :
절판
아마 당신과의 만남이 지속되고 있었더라면 이 소설은 서평을 쓸 만큼 관심을 가지지는 못했을 껍니다. 그저 내가 좋아하는 폴 오스터의 신작 소설 - 원래의 순서로는 두번째 발표 되었던 그의 장편 소설이지만 - 정도로만 치부했겠지요. 하지만, 올해 막 졸업한 동갑의 당신이 내게 이별을 고한 체 뉴질랜드라는 땅으로 떠나고, 지금은 아무런 소식조차 알 수 없게 된 이 시간의 공간에서 읽게 된 이 소설은 마치 미지의 도시에 있는 당신이 안나 브룸이라는 가명을 쓴체 내게 빼곡히 글자를 채운 편지를 부친 거라고 믿게 될 정도였습니다.
그게 어느 정도냐 하면...심지어 당신이 그 나라, 어딘가에서 내게 안나 브룸이라는 가명을 쓰고 편지를 부친게 아닐까 하는, 우스운 착각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 들며 이 소설을 읽어 갔습니다.(물론, 뉴질랜드가 이 소설에서 말하는 '폐허' 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마지막 지상 낙원이라는 말이 역설적이지요.)
이 소설은 안나 브룸이라는 한 여성이 지옥과 같은 폐허의 도시에서 겪었고, 또 겪고 있는 일들을 시리 허스트베트 라는 인물에게 죽 적어 보낸 기록입니다. 마치 '지옥이라는 것이 현실에 존재한다면 이런 식이 될꺼야' 라는 사실을 폴 오스터는 그 특유의 문체로 써내려 가죠. 마치 조지 오웰의 <1984> 와 같은 상상력의 도시 속에서 그녀는 열혈만화 풍의 주인공처럼 활기차기도 하고, 때로는 사랑과 욕망을 숨기지 못하는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근 300매에 가까운 분량의 글들 속에서 지옥과 같은 환경과 그 속에서 사는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 이별을 기록한 그녀의 모습이 왜 자꾸 당신의 모습과 자꾸 겹쳐져서 떠오르게 되는지......!! 자신의 일은 잘 챙기는 사람이니 어떻게든 잘 해내리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막연하고 낯선 그 곳이......혹시나 보여지는 낙원이 아닌, 어느 사회에나 있는 내면의 추악성이 당신의 마음 속을 폐허처럼 만들어 가지 않을까 걱정은 나만의 기우일런지요. 이 편지가 안나 브룸이 글 말미에 적은 것처럼 나 역시도 읽혀지기를 바라기도 하고, 바라지 않기도 합니다. 이미 우리는 헤어졌고 당신과 나,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삶을 살아가야 할테니까요. 하지만 당신의 마음 어디엔가 여전히 내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고 - 돌아오지 앉을 수도 있지만 - 당신의 삶 어딘가에 내가 여전히 당신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만 알게 되다면 그것으로도 좋지 않을까요.
그곳에서 페르디난드와 같은 악인은 비교적 적게 대하고, 이사벨과 빅토리아 같은 사람들 속에서 당신 만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삶을 살아 가실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곳은 숨이 턱턱 막힐만큼, 그리고 습기가 기분 나쁘게 피어 오르는 여름입니다. 정반대에 놓여진 세계, 겨울이 얼마간 계속될 그 곳에서 지낼 당신에게 사랑의 마음과 격려를 담은 입맞춤을 보냅니다. 나는 한 때 당신이 살았고, 지금은 당신이 사는 세계와는 다른 곳에서 살고 있는 당신의 옛 연인입니다. 언젠가 당신에게 다시 편지를 쓰도록 할께요. 꼭...꼭 다시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