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의 시대 - 일, 사람, 언어의 기록
김민섭 지음 / 와이즈베리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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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늘 소개드릴 책은 <훈의 시대>입니다. 재밌는 책이에요. 먼저 '훈'은 무엇인가. 고착화된, 규정된 언어를 의미합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시겠다고요. 조금 더 확장해볼까요. 그러니까 이를 테면 도덕적이고 교과서적인 교화말씀을 떠올려 볼까요. 이러한 ‘가르침의 말씀’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해서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지만, 어두운 곳에 숨어 개인이 주체로 서는 것을 방해하는 ‘괴물’이라고 책은 얘기합니다. 이 괴물은 “개인을 시대에 영속시키는 동시에 끊임없이 지워왔으며 특히 사유의 범위를 그 함의의 테두리에 가두고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라고 작중에서 얘기해요. 다름아닌 이 괴물을 ‘규정된 언어’라고 정의하면서 ‘훈訓’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2.

각 여고의 훈으로 지정된 이 ‘순결’은 아무래도 ‘몸을 깨끗하게 지키라’는 것이겠다. 순결함이 훼손되고 나면 더 이상 학교에서든 이 사회에서든 가치 있는 한 인간으로, 무엇보다도 여성으로서 살아갈 수 없다고 명시해 둔 것이다. 그런 와중에 학교 현장에서 제대로 된 성교육이 이루어지기도 힘든 일이다. 터부시해야 할 것을 전하는 일은 무척 역설적이다. 여기에 ‘여자로서 행실이 곧고 마음씨가 맑고 곱다’는 정숙함이라는 가치가 더해지면 순결은 다만 이성과의 관계뿐 아니라 모든 행실에 가서 닿는다. 그에 따르면 다소곳한 몸, 작아진 몸, 위축된 몸으로 여성은 존재해야 한다. 반면 남고에는 몸을 깨끗하게 지켜야 한다는 훈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3.

그러니까 경직된 언어를 풀어주는 멋진 책이에요. 언어는 사실상 세계라고 한 것이 누구였던가요. 실제로 언어는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고, 그 사고는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과정과 무관하게 각자는, 그 훈에 적합한 결과로 행동하고 존재해야만 했다고 책은 얘기해요. 이것을 ‘대리사회’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한 추억담이 아니라 여전히 '훈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음을, 더불어 자신을 규정하며 자신의 지향으로 여겨지는 언어를 스스로 선택하기 어려운 현실을 확인하고 있어요. 한 해를 보내며 그동안 자연스럽게 써왔던 언어와 사고들을 정돈해보는 것은 어떨지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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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리더십 경영
윤형돈 지음 / 와이즈베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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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

경영 관련 양서를 뽑아내는 와이즈베리에서 출간된 <조선 리더십 경영>입니다.

저자는 윤형돈. 경력이 이채롭지만 쉽게 말해 인기 있는 포스팅을 연재한 블로거예요.

한 해를 마무리하는 사자성어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게 '송구영신'이 아닐까 싶은데요.

그렇다면 오랜 것을 보내는 와중에 어떤 것을 남길 것이냐. 오늘 소개드릴 책은 조선의 리더들에게 그 답을 묻는 책입니다.

2.

4차 산업혁명이 더는 키워드가 아니라 피부로 스며드는 것이 되었어요. 더는 맥도날드에서 종업원을 보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고요. 사람과 대화하는 것보다 빅스비나 카카오프렌즈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훨씬 유쾌한 일이 될지도 모릅니다.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시스템은 물론이고, 이처럼 개인의 삶을 뿌리부터 흔드는 (물론 그것이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저자는 이런 어려운 질문에 대한 답을 우리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리더십’에서 찾고 있습니다. 책은 리더십을 나름대로 정의하고, 어느정도 천편일률적으로 해석되는 위인들의 활동들을 재해석하고 있어요. 애초에 조선과 리더라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를 한 데 모아놓고는 의미를 창발하는 책이잖아요. 역시, '갑질'이랄지, 현대적인 키워드를 조선시대에 둠으로써 상당히 흥미로운 얘기들을 풀어내는데요.

세종같이 주어진 환경에 맞추어 유동적으로 전략을 바꾼 사람, 중종이나 선조같이 현실에 안주하고 변화를 거부하는 사람, 원균처럼 정치질과 임기응변식 처세에만 능했던 가짜 리더, 그리고 그와 정반대되는 지점의 이순신, 김육 같은 진짜 리더 등을 예시로 들고 있습니다.

3.

조광조와 중종은 서로 상부상조하는 관계였다. 조광조는 중종이 자신을 믿고 지켜준다고 믿었고, 중종은 조광조가 자신을 지켜준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 신뢰는 알게 모르게 금이 가고 있었다. 이 금이 본격적으로 커진 계기는 ‘위훈삭제僞勳削除’ 사건이었다. 위훈삭제란 가짜 공신 훈작을 색출하여 박탈하는 것을 말한다. 당시 조정에는 중종반정에 참여하지 않았음에도 훈구파 대신에게 잘 비빈 탓에 공신이 되어 수많은 특권을 누리는 세금 도둑들이 있었다. 조광조는 이들에게 칼을 겨눈 것이다. 의도는 좋았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중종도 개혁 대상이었던 것이다. 위훈 문제는 굉장히 복잡한 사안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실제로 중종반정에 참여한 공신은 30여 명 정도다. 그런데 공신으로 책봉된 사람은 117명으로, 무려 80여 명이나 차이가 난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공신 책봉 자체가 엉터리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어떤 면에서는 역사 교양서적이 될 수도 있겠고요. 또 한편으로는 처세술에 관한 책이기도 합니다. 리더에 관해 얘기해야 할 사람들에게 많은 원천이 되어 줄 책이고요. 실제로 리더십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훌륭한 지침이 되어줄 책이기도 합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지나간 역사를 되짚어 보는 것이야말로, 미래의 방향을 정갈하게 잡아줄 유일한 방법이 아닐지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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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엽 감는 새 연대기 1 - 도둑 까치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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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하는 독자는 저마다의 이유로 좋아합니다. 혹자는 단편을, 또 혹자는 장편을, 그리고 에세이를 하루키의 정점이라 여기지요. 저는 하루키의 장편에서 하루키의 힘이 가장 잘 드러난다고 생각해요. 그 중에서도 하나를 꼽자면 바로 <태엽감는 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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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러 인문학 - 색깔에 숨겨진 인류 문화의 수수께끼
개빈 에번스 지음, 강미경 옮김 / 김영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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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뤄 둔 독서를 끝냅니다개빈 에번스의 <컬러 인문학>입니다저자는 저널리스트예요글이 굉장히 유려하고 재밌습니다책의 구성은 단순합니다빨강파랑등등...총 11가지의 색깔로 이뤄져요그러니까 분홍이라는 테마에서는 이런 걸 묻습니다분홍은 과연 여자의 색인가혹은 오드리 헵번의 유명한 미니 블랙 드레스그 칵테일 드레스가 시대를 점유한 아이콘이 되었던 배후의 이야기를 들려주곤 하지요.

 



 

2.

 

....네덜란드 화가 빈센트 반 고흐는 석황을 특히 좋아해 그의 유명한 해바라기와 노란 금잔화별과 가로등을 그리면서 석황을 사용했다짧은 생애의 마지막을 향해 가던 시절 그의 정신병적 증상 중에는 튜브에서 노란 물감을 짜서 바로 입으로 가져갔다는 증거도 있다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이런 행동은 납 중독을 초래했을 테고그 결과 여러 가지 심리적 문제와 더불어 공격적인 행동망상기억 상실불면증심신 미약 등을 촉발했을 수도 있다다시 말해 결국 자살로 이어진 정신적 상태를 가속화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반 고흐의 노랑을 향한 사랑이 결국 그를 죽였다고 하면 너무 심한 표현일까?....

 

 

그러니까 책은 얼핏 굉장히 정갈하게 보이지만 내용은 색깔이라는 중심 외에는 종종 내용들이 발산합니다그러니까 반 고흐 얘기를 하다가 산타 얘기를 하다가 다시 정치 얘기를 하다가 우울한 기분에 대해 얘기를 하다가.....그야말로 알아두면 쓸데많은 지식들을 풍성하게 담고 있어요이런 식의 방식은 우선 책이 지루하지 않다는 장점이 있겠죠또한본인이 좋아하는 색깔이 있다면 그 색에 얽힌 수많은 문화사세계사를 한 눈에 정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이런 얘기를 '정치'라는 테마로 묶는다면 상당히 지루한 책이 되었겠지요하지만 이처럼 편집만으로 책은 굉장한 구심력을 갖게 됩니다한마디로 11가지 색깔이 들려주는 인류 문화 오디세이랄까요.

 


 

 

3.

 

컬러를 소재로 한 책이기에 편집과 지면에 상당히 공을 들인 티가 납니다그에 비해 가격은 저렴한 편이고 책의 두께도 얇은 편이어서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에요책 자체가 굉장히 재밌습니다다채로운 사진 사료를 담고 있어서 페이지가 술술 넘어가요박물관을 거니는 듯큐레이터의 해설이 어디선가 들려오는 것 같기도 한 경험을 할 수 있는 책입니다색깔의 상징이 시대와 문화에 따라 변주해왔는지 생생하게 볼 수 있는 책으로 많은 분들께 강력히 추천드려요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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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태어나기 전 나의 이야기
카타리나 베스트레 지음, 린네아 베스트레 그림, 조은영 옮김 / 김영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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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랜만에 괜찮은 신간을 추천합니다카타리나 베스트레의 <내가 태어나기 전 나의 이야기>입니다저자가 낯설 만도 합니다현재 생명과학부에서 세포생물학을 연구하고 있는 분이거든요다만타고난 글재주를 가지고 웹에서 많은 기사를 써왔습니다그게 굉장히 인기를 끌었는지이렇게 책의 형태로 출간되자마자 전세계 19개국과 판권 계약을 맺었어요.

 

자연과학 교양서적의 필연적인 지루함과 삭막함은 저는 관련 전공자들의 직무유기로 보는 편입니다그런 면에서 오늘 소개드릴 책은 역시 빌 브라이슨을 필두로 한 저널리스트들의 기조를 닮아 있어요쉽게 말해 쓸데없이 흥미롭습니다백과사전이나 전공서적에서는 좀처럼 등장하기 힘든 표현들과 과정들이 적나라하게 포함돼 있어요.

 

본인의 전공분야인 세포생물학의 기본원리를 다룹니다하나의 세포가 어떻게 복잡한 기관을 갖춘 인간이 되어가는지그 경이로운 과정을 얇고 밀도있게 담아내고 있는 책이에요.

 

 

 



 

2.

 

재밌습니다우선 동생이 그림을 그렸고 글은 본인이 썼는데 궁합이 좋아요첫 문장은 이렇습니다임신 몇 시간 전누구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경주가 시작된다벌써부터 독자들의 시선을 잡아채는 대목이에요출산에 이르는 과정은 주로 임신부의 시점에서 서술되곤 하지요하지만 이 책에서 출산과정의 절대적인 주체는 태아라고 얘기합니다태아모두가 겪었지만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 시절의 이야기그렇게 이 책의 제목은 <내가 태어나기 전 나의 이야기>가 된 것이지요

 

 

 

 

 

3.

 

아리스토텔레스는 살아 있는 생물이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생성될 수 있다고 믿었다아리스토텔레스의 믿음에 따르면 곤충은 나뭇잎에 맺힌 이슬에서 생겨나고나방은 양털에서굴은 끈적한 진흙에서 만들어진다. 2천 년이 지난 후에도 이런 발상은 여전히 유행했다. 17세기 화학자 얀 밥티스타 판 헬몬트Jean Baptiste van Helmont는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형태의 생명을 제조하는 대단히 창의적인 방법을 고안했다예를 들어 집에서 생쥐를 키우고 싶다면그 제조법은 매우 간단하다밀알을 가득 채운 용기에 땀에 절어 더러워진 셔츠를 넣는다그리고 21일을 기다리면짜잔밀알은 코를 씰룩대며 킁킁거리는 진짜 살아 있는 생쥐로 변신한다....

 

 


그러니까 이 대목은 소위 자연발생설이라는 터무니 없는 과학사를 설명하는 대목이에요전공서적에서 읽을 땐 드럽게 재미없는 이야기가 시종 생생하게 살아납니다밀알이 생쥐로 변신할 리가 없잖아요하지만 그것을 믿던 시대가 있었던 것이고 이 책은 그런 작은 과학사까지 흥미롭게 호출합니다.



 

뿐만 아니라세포가 어떻게 왼쪽과 오른쪽을 구분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는 섬모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그러니까 미세소관과 관련환 수많은 질환들과 전공서적들의 내용들이 스쳐오는데요책은 그 얘기를 깊숙이 소재삼으면서도 너무나 쉽게 풀어냅니다그러니까 섬모라는 가는 털이 체액의 흐름을 한 방향으로 이끈다는 문장으로 어려운 이론을 풀어내는 것입니다.

 



인중에 대한 설명은 어떤가요인중이 콧물을 모으기 위한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별다른 기능이 없다고 얘기합니다외에도꼬리는 왜 없어졌는지일란성 쌍둥이라 해도 지문은 왜 다를 수밖에 없는지심장 세포는 자기가 손이나 발이 아니라 심장이 되어야 한다는 걸 어떻게 아는지분만의 시작은 어떻게 결정되는 것인지 등을 쉽게 설명하는 저자의 필력이 탁월한 책이에요책이 굉장히 얇아요무척 재밌고요많은 분들께 기본 교양서적으로 강력히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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