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와 소녀

톰 고든을 사랑한 소녀 ㅣ 밀리언셀러 클럽 50
스티븐 킹 지음, 한기찬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10월

내가 '시원적 공포' 라고 부르는 내면의 감정을 끌어올리는 작가, 스티븐 킹.

비교적 소품적 성격처럼 느껴지는 그의 또 다른 책을 한권 읽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오빠의 갈등이라는 불안한 가정 환경 속에서

자신의 위치와 정체성을 서서히 자각해 가는 어린 소녀.

그녀의 추억과 환상은 약간은 특이하게도 메이저리그 야구와 연결된다.

보스턴 레드삭스의 마무리 투수인 톰 고든이라는 선수에게 심어져 있는 환상과 추억은,

지금은 곁에 없는 아버지에 대한 추억과 기억인 동시에

그의 부재 속에서 그녀가 계속 헤쳐나가야 할 삶에 대한 지향이기도 하다.

극한 시추에이션 속에서 등판하여 2시간 넘게 사투를 벌여온 동료들의 승리를 지켜내야 하는

마무리 투수의 역할..

그러한 막중한 임무가 주는 압박을 견뎌낼 수 있는 것은,

자신에 대한 믿음이 주는 힘일 텐데..

무엇보다 트리샤에게는 그것이 중요한 시절인 것이다.

엄마와 오빠와 떠난 트레킹 여행에서

외따로 떨어진 끝에 길을 잃어버리게 된 이 어린 소녀.

대부분의 경우에 100%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될 가능성이 높은 이 상황에서,

그렇다고 특출난 능력을 통하여 이 상황을 헤쳐나가는 것은 아니다.

어린 아이다운 상황 판단으로 인해 때로는 아주 위험한 상황에 처하기도 하고,

때로는 천진난만한 낙관으로 인해 상황을 극복하기도 한다.

시원적 공포를 안겨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벌'과 '죽음'의 그림자의 추격 속에

그녀를 지탱하는 것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야구 중계와 톰 고든의 등판, 그리고 투구이다.

겪지 않아야 할 시련을 겪어가는 소녀의 모습은 안스러우나,

나름 씩씩하게 길을 터가는 그녀의 모습은 또한 감동적이다.

톰 고든을 향한 그녀의 동경은 공감되지 않으나,

자신의 이상을 암담한 현실에 대입시켜 버텨내는 그녀의 힘은 감정이입되어 힘이 들어간다.

킹의 책 답지 않게 술술 읽히며 호흡이 짧다.

그의 장편 치고는 분량이 짧은 것도 한 몫하는 것도 같다.

그의 대작을 읽기 전 한번쯤 쉬어 갈 수 있는 책이며

그것은 역시 실망시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