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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거 빙벽 ㅣ 밀리언셀러 클럽 35
트레바니언 지음, 이수경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2월
평점 :
절판
<아이거 처형> 과 같은 번역이 더 맞았을 이 책을 읽는데는 몇 가지 노력이 필요했다.
영화의 잔상을 머리 속에서 지우는 것이 가장 컸는데,
원래 원작이 있는 영화는 될 수 있으면 원작을 읽기 전까지는 보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데,
오래 전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를 다 긁어 보던 시절에 미처 원작이 있는 것을 확인하지 못하고 영화를 먼저 봐버린 터라
책을 읽는 내내 조나단의 이름에서 이스트우드의 얼굴을 지우기 위하여 노력해야만 했다.
영화를 본 지가 오래 되어 결말이 기억나지 않아 반전을 즐길 수 있었다는 것은 다행이랄까..
또 하나의 이미지는 몇년 전 스위스를 여행할 기회가 있었을 때
융프라우에 오르며 기차를 갈아타야 하는 클라이네 샤이덱 역에서 바라본 아이거반트의 웅장한 모습이다.
괴물(=오거)이라는 이름 답지 않게 역광으로 햇살을 등지며 능선에서 날리는 눈가루는 눈이 부셨고,
살짝 구부린 봉우리가 드리우는 그림자 속에서 열차를 타고 융프라우로 올라가는 여행은 즐거웠었다.
그리고 그 열차 여행의 중간에, 이 책에도 나오지만 터널에서 산 중턱의 창을 내려다 본 기억과
그 창 옆에서 아이거 등반 중 명을 달리 한 산악인 중 가장 안타깝게도 구조대 15미터 앞에서 죽어간 일화를 읽은 기억.
그 기억은 며칠 전 TV에서 다큐 드라마로 어찌 하여 그런 비극이 일어났는지를 알게 되어 더욱 생생해졌다.
이러한 극한의 어려움을 주는 산에서의 첩보 드라마.
수수께끼의 베스트셀러 작가인 트레바니언의 작품을 집어 들고 읽어내렸다.
작품의 배경과 주인공의 설정은 상당히 작위적이다.
천재성과 남성성을 동시에 지니며 재산과 체력을 가진 채 여자까지 계속 따르는 킬러 교수의 모습은,
남자라면 어렸을 때 스파이 영화를 누구나 한번은 그려봤을 그림이다.
그의 뒤에 있는 조직과 그에 속한 사람들 역시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사실 사건의 절정 부분이 일어난 아이거 라는 산 역시 비현실적으로 극한적이고
그 안에서 어떠한 사건이 벌어지기에는 너무나도 제한적인 공간이다.
무대 장치를 꽉 짜놓은 것이 지나쳐 보일 정도로 작위적으로 보이긴 한다.
그렇지만 그 짜놓은 판이 매우 정교하여 독자로서는 계속 이야기의 흐름을 좇아갈 수 밖에 없다.
과연 끝까지 정체가 누구일지 궁금하게 만드는 그 '타겟'은 누구이며
죽음의 절벽에서 자연과 사투를 벌이는 조나단은 어떻게 될 것인지,
러브 스토리는 어떻게 되며 결말은 어떻게 될 것인지 궁금해 하며 페이지를 넘기는 기분은 즐겁다.
스파이 소설이라는 장르는 이제 어느 정도 유행이 지나 고색창연하게 읽힐 수 있지만,
한번쯤은 가볍게 읽어볼만 하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