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 있는 나날 민음사 모던 클래식 34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제목이 낯이 익다고 생각했었지만 이 책이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으로

안소니 홉킨스와 엠마 톰슨이라는 당대의 명배우들이 연기한 영화의 원작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너무나도 영국적인 감독과 배우의 손에서 아름답고 고요하게 펼쳐졌던 영화는

영국인이긴 하지만 일본의 이민자 출신인 사람의 손에서 탄생했으리라 고는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시구로는 정말로 마술과도 같은 솜씨로,

섬세하게 영국식 집사의 삶과 생각을,

그리고 보편적인 인간의 삶에 대한 하나의 플롯을 창조했다.

 

현대의 보통 사람으로서는 잘 알지도 못하고 언뜻 이해도 잘 안되는 측면이 있는,

고풍스러운 영국식 집사의 신념.

보다 완벽을 추구하며 끝없이 자신의 직업과 신념에 대해서 고민하고 연구하는 스티븐스의 일생은

그 자체로서 매우 흥미롭게 읽힌다.

영화에서만 보던 '집사'라는 직업의 세계는 저러한 것이구나, 하며 읽는 재미가 솔솔할 정도로.

 

그렇지만 계속 읽다보면 일과 사생활 혹은 사랑 등등의 이분법적 접점에 대해서,

이러한 접점에서의 선택이 모든 직장인에게 해당되는 보편적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스티븐가 택하는 삶의 태도를 보면서 점점 그와의 동질감이 떨어지고 유리된다.

 

그가 가졌던 긍지와 자존심은 결국 시대의 흐름에 묻혀져 가고

그의 아버지가 그러했듯이 그 역시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자신의 긍지를 유지시킬만한 기준을 놓쳐간다.

남아 있는 것은 회고할 추억과 끝없이 자신에게 늘어놓을 수 밖에 자신의 자존감 뿐이지만,

그 마저 옛 주인의 불명예스러운 스러짐과 함께 사라졌고,

그러한 면면을 함께 공유할 수 없는 미국인 주인을 만나게 됨으로써

다시 세울 기회조차 박탈당한 채 근근히 유지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이 와중에 스스로 시대와 변화에 따라 자신을 맞춰가는 '사명'을 다하는 것은

결국 그가 그동안 결여하고 있었던 유머 감각 혹은 익살을 맞추는 것이라 생각할 수 밖에 없는 현 상태는

저렇게 까지 해야 했을까, 라는 생각이 들며 결국 현대에 그를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공감을 일으킬 수 없다.

 

그렇지만

거의 가져본 일이 없는 장기 휴가를 맞아

옛 추억을 공유할 수 있는 친구를 떠난 여행을 따라 가다 보면

그를 그러한 삶에서 꺼내주거나 혹은 새로운 가치를 그의 삶에 가져다 줄 수 있었던 사람이 있었음을 알고,

기대를 품게 된다. 과연 이 책의 결말이 어떻게 될까.

 

자신에게 연정을 품었던 여인과 자신도 모르게 자신 또한 가지고 있었던 사랑을 발견하게 되면서,

그렇지만 그가 택했던 방식 때문에 현재는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채

옛 가치 만이 남아 있는 삶을 바라보면서 그는 깊은 회한에 잠겼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다시 익살을 떠올린다.

이 책의 표제인 남아 있는 나날 동안도 그는 계속 그의 가치를 유지해 나가고 생을 마감할 것이다.

그 신념을 누가 뭐라 할 수 있을 것인가.

안타까우면서도 존경스럽고 멋지면서도 바보같은 그의 삶은

신념 속에서 새로운 남아 있는 나날을 다시 발견해낸 인생의 황혼기를 맞은 한 사람을 보면서

큰 여운을 남긴다.

 

멋진 소설.

영화를 다시 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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