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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경계에 선 여자 1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31
마지 피어시 지음, 변용란 옮김 / 민음사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사이버 펑크와 페미니즘 문학의 만남.
상상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SF란 장르를 통하여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풀어내는 것은
글을 쓰는 작가에게 어찌 보면 하나의 커다란 축복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축복을 제대로 활용하는 작가는 그렇게 흔하지 않다.
본인은 SF 작가라는 타이틀을 거부하고 있으나
이미 마가렛 애트우드 라는 한국에도 많이 소개된 작가를 통해 위와 같은 조합의 효과는 입증되었고,
이제 또 하나의 걸출한 작가를 만나게 되었다.
저자 약력을 통해 소개된 마지 피어시의 생은 매우 화려하다.
작가로서, 그리고 운동가로서 왕성하게 지금까지도 활동하고 있으며
그 노력 또한 많은 상으로 인정받았던 듯.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를 연상시키는 이 <시간의 경계에 선 여자>는
매우 독특한 내용의 작품으로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미국의 한 곳, 한 시대에서 소수 인종의 여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주인공은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존엄성을 부여받지 못한 채 각종 폭력과 차별 속에서 살아왔고
결국 그러한 경계 지음 속에서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에서 나타났던 것처럼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외부인, 혹은 비속인으로서 정의되어 정신병원에 수감된다.
하지만 또렷하게 자신의 처지를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지각 능력과 지능을 가진 그녀는
그러한 처지에 대해서 극복하거나 대처하기가 힘들다.
소설의 한 축은 이러한 현실에서 주인공이 어떻게 조금씩 성장하며 극복하려는 노력을 펼치는가 이다.
여기까지는 여성 문학의 단면.
이야기의 또 다른 축은 주인공 코니가 미래의 인들과 일종의 텔레파시로 교신하며
미래 세계를 경험하는 것.
사이버 펑크라고 보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너무 수수하지만
장르에 상관없이 이러한 SF적 장치를 통하여 작가는 미래 세계를 하나 그려본다.
그녀가 그린 미래는 성적 역할이 불분명해져 개인적인 롤로 대체되고
공동 생산적인 소규모 커뮤니티적 사회로 세분화되며
자급적이고 소비지양적인 농업적, 기술적 생산 사회에 가깝다.
이러한 사회적 단면들을 묘사하는 데에는 명확한 이유가 존재하도록 설정하여
그녀가 생각하는 현대의 문제를 역으로 꼬집는다.
이 두 가지 측면의 이야기들이 맞물리며 이야기는 전개되고
이로써 여성이자 인간으로서 코니는 성장하고 점점 맞서싸우며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한다.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운동은
(나는 굳이 페미니즘이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다)
인간사 전체를 놓고 볼 때 지극히 최근에 시작되어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그 대의에 동의한다고 할 때에도
바뀔 수 없는 생물학적 차이와 수천년 동안 쌓여온 사회적 편견과 장치들을 넘어서기 위한
좋은 방법은 (내 생각에) 아직 찾지 못한 상태로,
그를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노력하고 있음이다.
이 책은 그러한 노력하는 사람들의 한 명인 저자가 내어 놓은 하나의 안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의 문제점을 꼬집고 그에 대한 하나의 작은 방안을 그려줌으로써
읽는 이로 하여금 조금이나마 생각해 보게 한다면 그것도 하나의 수확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급진적 성향을 생각한다면 그것보다는 좀더 많은 수확을 원했을 테지만
참으로 오랜만에 성차를 생각해 보는 글을 만났다.
딱딱한 사회 과학 책이 아닌 소설로 이런 생각을 좀더 쉽게 끌어낼 수 있는 것.
그것이 문학의 힘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