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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44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김인환 옮김 / 민음사 / 2007년 4월
평점 :
1992년.. 내가 고등학교 2학년때.
한국의 극장가는 두 편의 '핫'한 영화로 화제였다.
하나는 샤론 스톤 주연의 "원초적 본능"이었고,
또 하나는 제인 마치 주연의 "연인"이었다.
임팩트는 "원초적 본능"이 훨씬 강했지만
두편 다 무지무지 야하다는 소문에 한창 나이의 나와 친구들은
이 영화들을 어찌 볼 수 없을까,, 하고 보충 수업 쉬는 시간 내내 궁리했고
급기야 평소 노숙한 얼굴로 놀림받던 한 친구 녀석이 가죽 점퍼로 더욱 노숙하게 입고서는
신분증 검사 없이 무사 통과하여 "원초적 본능"을 보고 와서는 영웅으로 떠올랐다.
최고최고.. 를 연발하던 그 녀석은 결국 그해 겨울 방학 때 일본에서 출시된 LD를 사와서는
비디오 테이프에 떠서 전 반 친구들에게 다 돌렸다.
영화 한편보는 것도 다운로드 몇번으로.
야한 것 보는 것도 다운로드 몇번으로 볼 수 있는 요즘에는 피식 웃을 수 밖에 없던 20년 전 에피소드.
어쨌든 이 추억 속의 영화들 중 한편인 "연인"의 제인 마치가 표지에 떡 올라와 있는
뒤라스의 이 책을 드디어 지금에서야 읽게 되었다.
다분히 뒤라스의 자전적 요소가 강한 이 책은
식민 치하의 베트남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춘기 소녀가 주인공이다.
베트남에서 바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부재는 느껴지지 않고,
광기어린 채 집안을 유지하는 어머니와,
폭력적이고 방탕한 큰 오빠, 너무너무 사랑하지만 나약하게 느껴지는 작은 오빠.
이 셋과 가족을 이루며 미래를 그릴 틈도 없이 낯선 땅에서 이질감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갑갑한 일상과 불안한 미래 속에서 사춘기를 보내고 있던 소녀는,
어느 날 한 중국인 사업가를 만나게 되는데,
백만장자이지만 프랑스라는 사회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나오고,
역시 베트남에서도 이질적인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 그는 소녀를 사랑하게 된다.
처음에는 그저 육체적인 관계로 일상의 탈출구로 그를 이용했던 소녀 역시
자신의 갑갑함을 풀어줄 수 있는 그와의 육체 관계가 단순히 육체적인 것이 아닌
정신적인 사랑으로 발전함을 느껴가지만 결국 그들 앞에 놓인 문제들을 극복하려 하지 않은 채
헤어지고 만다..
사건들은 간단하게 요약이 가능하지만,
소녀의 정신 세계를 좇아가는 문체는 간단하지 않다.
정신 분석학적 서술을 즐기는 뒤라스의 대표작 답게 소녀의 감정을 이리저리 서술하는 문장들은
쉽게 읽히지 않는다.
그녀의, 가족과 친구와 연인에 대한 감정들은 이율배반적이기도 하고 중첩적이기도 하며
미성년자로서 깊은 육체적 관계를 갖고 학교와 가정의 규범 또한 무시하는 그녀의 행동 또한
정상적으로 볼 수도 없다.
다만,
영화 속에서 중국인 연인 역을 맡았던 양가휘가
검은 색 리무진 자가용 안에서 뒷좌석에 제인 마치와 나란히 앉아
좌석 위로 살금살금 손을 뻗어 살짝 소녀의 손에 닿았다가 얼른 손을 뺐던 수줍고도 조심스러웠던 사랑과
베트남의 찌는 듯한 더위와 습기 속에서 천장 위의 선풍기가 돌아가는 가운데
끈적하게 펼쳤던 정사의 장면과 더불어
이 소설은 기억에 많이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