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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대왕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
윌리엄 골딩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2년 3월
평점 :
어렸을 적 영화로 접했던 <파리 대왕>을 드디어 만나다.
당시에는 마치 <15소년 표류기>와 같은 소년들의 해양 모험에 뭔가 인간 내면의 폭력성이 드러나 있다,
라는 느낌 정도만 받고 그렇게 큰 임팩트를 받지는 못했었는데
책으로 읽고 보니, 300페이지 남짓의 장편 내내 상징이 너무나도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어
오히려 본 줄거리에 몰입하여 읽기 어려울 정도이다.
모험 소설이라는 느낌은 거의 없었다.
무인도에 조난된 소년들이 점차로 문명과 유리되어 가는 과정이 이 소설의 메인 테마라 할 수 있다.
아주 어린 소년부터 청년으로 향해 가는 과정에 있는 소년까지의 나이의 아이들이
한 무인도에 조난을 당한 이후의 상황.
조난 초기부터 우왕좌왕하고 그들이 받던 사회적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된 상태에서
아직 '문명'적인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던 시기에 한 아이가 실종된 것부터가
그들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데,
소년들은 그 아이의 존재 자체를 입에 올리지 않음으로써 애서 그 사실을 외면하며
자신들이 언젠가는 구조받을 수 있으며 다시 문명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문명과의 격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돼지(piggy)라 불리며 놀림받는 아이.
천식과 비만, 약시 등으로 신체적으로 약할 수 있는 이 아이는
실제로는 섬 내에서 유일하게 불을 일으킬 수 있는 도구인 안경을 가지고 있으며
(불은 문명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다)
놀림 속에서도 거의 유일하게 지성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고 있지만
이미 문명성을 잃어가고 있는 아이들에게 받아 들여지지 않는다.
이 가운데 '괴물'의 존재로 인하여 소년들 사이에 확산되어 가는 공포는
인류를 항상 비문명적인 상황으로 몰아갔던-즉 전쟁과 같은-원인과 같다.
필연적으로 무리를 이루어 사는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그 집단의 이익과 결속을 위해 선택했던 것은
수많은 경우에 '공포'였으며 그 원인을 집단 외부에서 찾음으로써 결속을 만들어 내고
그 결속으로 많은 집단 이데올로기를 창출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잭과 랠프의 대립은
집단 내에서의 권력 다툼에 다름아니며 각각이 대변하고 있는
이성과 (폭력적, 원초적) 감성의 다툼을 보여준다.
돼지 사냥 과정에서 보여지는 원초적 폭력은 인간이 문명에서 유리되어 있을 때
언제라도 나타날 수 있는 반응이고,
그 과정에서 또 다른 죽음이 벌어졌다는 것은 작가가 가하는, 인간의 허상적인 문명성에 대한 비판이다.
그 밖에도 심약하고 겉돌았던 사이먼이나,
쌍동이 형제, 로저 등의 캐릭터들이 대변하는 각각의 인간성들이
좁고 닫힌 공간인 무인도에서 벌이는 소년들의 비문명적 삶에서 나타나는 양상은
작가의 의도 아래 치밀하게 계산되어 보여지고 그 모습을 목도하는 독자는 충격을 받을 수 밖에 없다.
비록 전편에 걸쳐서 여성이 한 명도 나오지 않음으로써
인간의 품성 중의 반을 차지하는 여성성이 나타나지 않아
반쪽짜리 양상이 되어 버렸다는 비판도 가능하지만,
골딩이 보여준 이 충격적인 이야기를 읽으며,
인간은 어떤 동물이며 난 어떤 동물인지 한번쯤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 이 책의 부정할 수 없는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