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은 반역인가 - 우리 번역 문화에 대한 체험적 보고서
박상익 지음 / 푸른역사 / 2006년 2월
평점 :
품절


  지금, 우리에게 번역은 무엇인가?

 

1.  혼자 크는 나무는 없다 - 번역의 가치와 중요성

 

이 책은 문화교류 측면에서 우리의 번역 문제를 검토한다. 저자 박상익은 학자로서, 번역자로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번역이 지닌 가치와 번역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번역은 세계의 다양한 문화와 전통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고 "국민의 교양과 정신 수준을 향상시키고 지식과 정보의 민주화를 이루어, 창의적 민족문화와 성숙한 시민 정신을 함양하는 데도 중요한 기여"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인류 역사를 되짚으면서 각 문명권에서 타문화를 수용하려는 기초 작업으로서 번역을 어떻게 해 왔는가를 고찰한다. 이웃나라 일본과 중국을 비롯하여 이슬람 문명권에서 유럽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다른 문화를 받아들여 자신의 문화를 살지게 하는데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를 살펴본다.

 

귤화위지(橘化爲枳)라는 말이 있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말이다. 과일도 환경에 따라 그 열매 맺는 양상이 달라지듯 문화도 다른 문화권에 정착하면서 모습이 변하기 마련이다. 문화가 소통하려면 언어의 차이를 극복해야 한다. 이 차이를 극복하여 매개해 주는 역할을 맡은 사람이 바로 번역자다. 문화교류의 매개자로서 번역자의 위상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혼자 크는 나무가 없듯이 문화도 상호 교류하면서 성장한다. 우리의 전통음식인 김치도 문화교류의 산물이다. 지금의 백김치가 우리 고유의 모습이었으나 고추가 우리나라에 전래되면서 김치의 모습도 바꾸어 놓았다. 문화교류에서 중요한 점은 외래문화를 수용하는 태도이다. 김치의 경우처럼 외래 문화를 우리 문화에 녹여내어 한 단계 승화시킬 줄 아는 안목이 필요하다. 맹목적·무비판적으로 외래 문화를 수용해서는 안된다. '삭힘의 미학'이 그 어느 곳에서보다 중요한 가치가 되어야 할 곳이 번역이다.

 

2. 우리 번역 현실의 진단과 처방 - 번역 비평의 활성화·공론화

 

번역은 타문화에 대한 관심과 애정에서 시작해야 한다. 번역은 번역자의 고된 작업을 거쳐 이루어진다. 번역자가 감동하지 않는 책을 독자들에게 소개한다면 그 번역서를 읽는 독자들도 감동할 수 없다. 인류 역사는 문명 간의 조화로운 교류로 성장해 왔다. 번역자는 조화로운 교류를 이끌어 내는 문화 외교관인 셈이다.

 

우리 번역의 문제점으로 오역, 졸역, 중역, 표절 번역, 하청 번역 등을 저자는 지적하였다. 이 지적은 꽤 오래전에도 제기되었지만 이미 익숙해진 탓인지 아직 완전하게 고쳐지지 않고 있다. 번역일은 몹시 고된 작업임에 분명하다. 다른 언어권 번역이나 기존 번역을 참고할 수는 있다. 그러나 번역자 스스로가 자신의 관점 없이 무비판적으로 베끼거나 옮긴다면 그 피해는 오히려 독자가 입게된다. 올곧은 번역 자세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저자는 번역 비평이 공개적으로 이루어지기 보다는 번역자에게 넌지시 일러주는 태도가 낫다고 말한다. 오역 시비가 불거질 때마다 공개 비판은 번역자나 번역 비판자에게 상처만 주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번역 비평은 지금보다 활발하게 공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근 영미문학연구회는 기존에 출간된 영미 문학작품 번역서를 꼼꼼하게 비교 평가하여 추천본까지 제시하였다. 이로써 독자들은 좋은 번역서를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번역의 비판과 비평은 지금보다 더 활성화되어야 한다. 현재 한국 사회는 비난과 비판을 혼동하면서 비판답지 않는 비판들이 넘쳐난다. 비판 없이 성장하는 문화는 없다. 비난에 머물러 상처만 주기보다는 비판과 비평이 건전하고 건강하게 이루어져야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다. 번역자 역시 적절하고 타당한 비판은 겸허히 받아들이는 태도를 취해야만 한다. 번역자에 그치지 않고 번역가의 경지에 이를 수 있으려면 말이다.

 

가끔 번역자의 독선과 독단으로 번역자와 편집자의 만남이 서로 얼굴을 붉히는 상황이 된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어느 누구도 완벽하지 않다. 번역자는 시장에서 팔리는 상품으로서 책을 잘 모를 수 있다. 아무리 좋은 내용을 담고 있어도 그 내용을 담아 내는 그룻이 형편없다면 독자의 시선을 끌지 못한다. 번역자와 편집자 각자가 서로 도우면서 성장할 수 있다는 생각을 공유해야 한다. 사물은 물론 사람과 만남을 통해 성장하는 게 사람의 삶이 아니던가.

 

저자가 우리 번역 문화를 고찰하며 지적하지 않은 문제로 저작권 중개회사가 부리는 횡포가 있다. 이러한 횡포로 출판사가 곤혹을 겪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저작권 중개회사가 저작권 계약을 바라는 출판사들 사이에서 경쟁을 부추겨 저작권료를 턱없이 높이는 행태는 불공정한 거래다. 저작권 중개가 공정하고 적정한 수준에서 이루어지도록 출판계가 자정 활동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3. 우리 문화 토양을 살지게 하는 번역을 꿈꾸며

 

우리 학계는 오랫동안 외국 학문에 기생하여 우리 현실에 맞는 이론을 만드는 데 소홀했다. 우리 삶과 현실이 중심이 되어야함에도 불구하고 외국의 이론과 학문 성과를 받아들이는 데 급급했다. 지식인의 지적 유희로서 학문이 아니라 우리 현실을 진단하고 처방하는, 앎과 삶이 소통하는 지식이기 위해서라도 번역은 가치 있는 일이다.

 

저자는 오래 전 도올 김용옥이 제기한 연구번역의 인정과 활성화를 다시 강조한다. 우리 대학이 학문의 전당이 아니라 직업훈련원 역할에 그치는 현실에서 연구번역은 의미 있는 일이다. 논문은 학문의 꽃이다. 이미 우리 학계는 무분별하게 서구 학문을 추종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만의 향기를 지닌 꽃을 피우기엔 몹시 척박한 토양을 만들어 놓았다. 연구번역은 서구 이론을 우리 현실에 적용하는데 발생하는 어려움을 극복하는 일이다. 그러기에 연구번역은 더욱 권장돼야 하지만 학계에선 아직 그 실행을 뒷받침할 만한 제도 보완도 하지 못하고 있다. 서구 학문에 드난살이·더부살이에 그친다면 기생 학문으로 전락하는 일이다. 우리 현실에 적용가능하도록 서구 학문을 창조적으로 활용한다면 공생으로 더 나아가 상생으로서 학문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우리 선조들이 남긴 학문 성과를 한글로 옮기는 작업도 병행해야 한다. 우리 학문을 외국에 알릴 수 있는 작업도 이루어져야 한다. 학자들은 한국 내에만 머물지 말고 외국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우리의 학문 성과도 알려야 한다. 영어와 일본어 서적에 국한한 번역에서 벗어나 다양한 언어권 외국어 서적들이 번역을 통해 서로 드나들 수 있도록 외국어 교육 면에서도 다변화를 이루어야 한다. 대산문화재단의 번역 지원 사업처럼 기업 차원에서도 번역을 통해 문화교류를 증진하도록 번역자들을 힘써 후원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편식(偏食)은 몸을 해치지만 편식(偏識)은 마음을 병들게 한다. 우리의 편견과 잘못된 선입견을 바로잡으려면 다양한 가치와 차이를 존중하고 아껴야 한다. 민주주의는 성숙한 시민의식이 발휘될 때 행복한 열매를 맺는다. 행복한 열매를 맺기 위해서, 자신의 편견과 잘못된 선입견을 바로잡기 위해서도 독서는 성숙한 시민을 기르는데 필수적이다. 독서의 생활화가 정착될 때 민주주의도 튼튼한 뿌리를 내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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