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여름을 위해서 해문 출판사에서 나온 아가사 크리스티 80권 전집 세트를 사두고 읽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회사에서 보직을 바꾸면서 육체적으로 넘 피곤했던터라 집에 오면 땅에 머리만 닿으면 잠에 든 관계로 이제 겨우 51권을 다 읽었다.
챙피한 이야기이지만, 50권 넘게 읽어오면서도 난 아가사 크리스티 소설의 범인을 한번도 맞춰본 적이 없다.
범인을 잘못 지적했다기보다는 아예 용의자를 지목할 수 없을 정도로 감을 못잡는 둔한 독자인 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사랑하는 이유는 아마도 그녀 특유의 인간 본성에 대한 뛰어난 관찰때문이 아닐까 싶다.
포와로의 진실에의 추구와 심리학적인 접근, 미스 마플의 예리하고 정확한 현실인식-그러나 미스 마플은 시니컬하지 않다- 등 등장인물들의 개인적 성품도 마음에 들지만 그것보다 더욱 마음을 사로잡는건...사람들 안에 내재되어 있는 욕망과 분노를 끄집어 내는 그녀만의 방식이다.
그녀 소설에서 욕망과 분노의 발산은 물론 살인으로 나타나지만 그녀 소설의 특이한 점은 살인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는거다.
사실 핏자국 낭자한 잔인하고 이유없는 충동적인 살인보다는 미리 계획되고 흔적을 남기지 않는 깔끔한(?) 독살만으로도 딱 내 스탈이긴 하다^^;
이처럼 누군가의 죽음을 계기로 주변 사람들에게 내재되어 있던 욕망과 동기가 서서히 드러나는데...대부분이 물욕과 치정때문이기도 하지만 아가사 크리스티 소설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갈등 구조는 가족이다.
가족애라는 신화에 집착하는 우리나라에서는 흔한 소재는 아니지만 때로 아가사 크리스티는 복잡한 가족관계속에 내재되어 있는 범죄의 씨앗을 감지하고 그것을 소설화시키는데 성공했다.
또한 몇가지의 범행 스타일만으로도 범인이 여자인지 남자인지를 구별하는 그녀만의 방식에서 남녀의 차이에 대한 그녀의 견해는 빛을 발하는데...완전 동감하지 않을 수가 없다.ㅡ.ㅜ
나는 그렇게 인간의 본성을 아주 적확하게 짚고 있는 아가사 크리스티를 좋아한다.
하지만 이렇듯 인간본성에 대한 그녀의 견해에 대부분 동감하는 나로서도 할로의 저택의 비극을 읽고 나서는 거기에 동감하기가 힘들었다는거다.
잘생기고 핸섬하고 당당하고 성공한 의사 존 크리스토, 바보같고 멍청하고 둔하며 순종적이다 못해 존을 숭배하는듯한 모습을 보이는 존의 와이프 저다, 그리고 아름답고 능력있는 조각자이자 존의 애인인 헨리에타 세이버네이크. -그토록 어울리지 않는 존과 저다가 어떻게 결혼을 하게 됐는지에 대해 부연설명을 하자면, 젊은 시절 유명한 배우이자 이기적이었던 베로니카 크레이와 약혼했었던 존은 베로니카를 너무나 사랑했지만 그녀의 이기심에 지쳐 결국 파혼을 하고, 베로니카와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여자와 그냥 결혼해서 안정된 가정을 이루고자 했기 때문이다.-
어느날 할로우 저택에서의 가족 모임이 있던 주말에 살인 무대가 연출되는데 피해자는 존 크리스토, 그리고 권총을 손에 들고 얼빠진 표정으로 죽어가는 존 앞에 서 있는 저다, 죽어가면서 헨리에타를 부르는 존.
사람들은 모두 살인 현장에서 목격한 장면을 놓고, 저다가 남편을 죽였다고 생각하지만 그녀가 들고 있던 총은 범행에 사용된 총이 아니었다는것이 밝혀진다.
어느날 범행에 사용된 총이 포와로의 뜰 앞에서 발견이 되면서 사건은 그냥 그날 현장에 없었던 제3자의 범행으로 결론지어진다.
그러나 포와로만은 진실을 감지하는데...가족들의 언행에서 그 가족들이 모두 무언가 알고 있다는 것을 감지한 포와로는 오히려 가족들 모두가 용의자로 지목되지만 오히려 저다만은 그 용의선상에서 철저하게 배제된다는 점에 주목하게 된다.
늘 자만하던 포와로도 이 소설에서는 호적수를 만났다고 인정하는데...그 호적수는 바로 헨리에타.
물론 그녀가 범인은 아니다.
범인은 오히려 총으로 사람을 제대로 맞췄다는게 신기할 정도라며 비웃음을 사는 둔한 저다였던 거다.
존은 저다에게 죽어가면서 자신도 모르게 깊이 사랑하고 있던 저다를 보호하기 위해 "헨리에타"를 다급하게 불렀던 것이고, 자기 이름을 부르는 의미를 파악한 헨리에타는 저다의 범행을 은폐하기 위해 행동을 개시했던 거다.
존이 진심으로 저다를 사랑했기에 그여자에게 죽어가면서도 그녀를 지키기 위해 다급했다는 부분은 정말로 너무나 많은 의심이 들지만 난 뭐 남자가 아니니까...남자의 감정이 어떤지에 대해서는 넘어가고....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가 와이프에게 살해당해 죽어가는걸 보면서도 그 남자의 부탁-사실 이름만 부른거지 정확하게 자기가 죽은 이러저러하게 해달라고 설명한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 부탁인지 알 수가 있담-을 들어주기 위해 범인이자 와이프인 저다를 보호해주려고 그 모든 작전을 개시한 헨리에타.
정말로 그런 상황에서 헨리에타같은 여자가 얼마나 될까?
나같으면 그 여자를 같이 쏘아버리지는 못할 망정 머리 끄댕이라도 잡고 한바탕 했을 것 같은데...
아니면 어떻게든 자기가 사랑하는 남자를 죽인 여자를 고발하기 위해 애쓰거나...
헨리에타...정말 알 수 없는 여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