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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그리고 성장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 지음 / 이레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유대교에서의 죽음
죽음의 과정을 분명희 삶의 한 국면으로 여긴다는 점, 이 국면 역시 마찬가지로 의무가 주어지며 성장의 기회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죽음의 선고를 성장의 중단이라고 여기는 생각은 안타깝기만 하다.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도 이해와 사랑과 신념을 지니고 일생일대의 가장 위대한 성장을 경험하는 경우도 분명 존재한다.
죽음의 과정에서 활발한 의지가 중요하다는 주장과더불어 또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우리가 공동체로서, 죽어가는 사람의 의지를 해방시켜줄 수 있는 핵심 열쇠를 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수많은 이들이 낯선 병실에서 고립된 채 병원의 식이요법을 따르며 방문객과 약과 생명유지 장치의 배터리에 통제당하며 죽어간다. 이런 상황에서 남은 이들에게 할 일이 있다. 주변 사람들이 그들의 고립을 타파하고 인간적인 온기를 전해 주어야 한다.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활기를 되찾아주어야 한다. 죽어가는 사람에게도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상대방의 말을 받아들이며 사랑의 선물을 나눠줄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밤새 임종을 지키는 관습에도 또 다른 목적이 숨어 있다.
죽음이 다가오면 생명이 끝을 향해 치닫다 보면 자연스럽게 신념의 위기가 발생하기도 한다. 이때 죽음의 과정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존재를 향해 가는 통과의례일 뿐이라고 독려해주기 위해 마련된 장치가 바로 개인적인 고백의 시간이다. 유대인에게 고백은 살아가면서 한 단계의 삶을 마무리 짓고 새로운 단계로 넘어갈 때마다 매번 행하는 일종의 관습이다. 이런 관습은 죽음의 당사자뿐만 아니라 임종을 지키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커다란 위안을 선사한다.
죽음을 지키는 과정에 깃든 유대인들의 지혜를 한마디로 응축한다면
:현실은 절대로 부정할 수 없다" 가 될 것이다.
유대교에서는 유가족이 죽음의 현실을 외면하고도피하지 못하도록 직접 죽음의 과정을 지켜보게 한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삶과 슬픔을 이어가기 위한 필수사항이며 정상적인 심리 기능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흰두와 불교에서의 죽음
죽음을 삶의 주요한 사실로 받아들이고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것도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완전히 파괼 것이므로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기다리지도 않을 수 있다면 삶도 죽음도 모두 초월해 불면의절대 진리와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인간의 본성은 욕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욕망 때문에 마음을 품고 그 마음 때문에 행동하며 그 행동 때문에 어떠한 존재가 된다. 그런 죽음의 속박에 묶여 있으므로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고 타인의 죽음을 슬퍼하며 죽음을 자꾸만 무시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성적이고 평온한 마음으로 죽음을 받아들이고 죽음을 친구로 생각하고 집착도 회피도 하지 않는다면 죽음과 그에 따른 모든 근심걱정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
오늘날 죽음
이러한 생각은 수단과 방법을 가지리 않고 죽음을 지연하고 회피하려는 '생명연장' 시대를 사는우리 모두가 반드시 배워야 할 귀중한 교훈이다.
죽음은 쉬우나 삶은 어렵다.
진정 어려운 과제는 주어진 시간을 완전하게 살아애는 일이다.
사랑을 잃은 자리에 사랑하는 능력을 읽지는 않도록 상실 또한 삶으로 편입시키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음은 또 얼마나 축복인가. 우리는 슬픔 가운데 성장한다.
성장을 향한 가장 생산적인 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죽음의 경험이다. 어쩌면 죽음은 우리에게 시간의 유한성을 깨닫게 해줌으로써그 시간이 다 가기 전에 이곳에서 목적을 이루는 게 좋겠다는 암시를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죽음과 대면한다는 것은 인생의 의미를 묻는 궁극적인 밀문과 마주함을 의미한다.
진정으로 살고 싶다면 삶은 몹시 짧고 모든 일에 대가가 따른다는 사실을 인정할 용기가 필요하다.
죽음은 성장의 마침표다.
죽음은 단지 지상의 육체적인 삶의 끝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오면서 지속적으로 해내고 있는 무언가라는 생각이다. 변화는 인간 존재에게 흔히 일어나는 보편적인 사건이다. 만약 우리가 궁극적인 죽음에 맞서 죽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사는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여러 가지 변화 역시 생산적으로 대응하고 대처할 수 잇을 것이다. 미지의 것을 탐색하는 길에는 언제나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만 기꺼이 낯선 영역으로 나아갈 모험을 선택한다면 그 어떤 길도 스스로 모색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야말로 성장이 지닌 궁극적인 목적이다.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진정 걱정해야 할 것은 육체의 끝이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살아 있는 동안 진정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즉, 존재를 외적으로 규정하는 겉모양 뒤에 숨어 사는 영혼의 죽음에서 내면의 자아를 해방시켜야 한다.
죽음은 삶의 문으로 들어가는 열쇠다. 우리 개개인의 존재가 유한함을 받아들이면 그러한 외적 역할과 기대치를 거부하고 삶의 매일 매일에 몰두 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찾을 수 있다. 그 삶이 얼마나 남았는지와는 상관없이 가능한 한 충만하게 성장할 수 있다.
우리는 내면의 원천을이용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잘 맞지도 않는 전형적인 역할에 스스로를 끼워맞추려 하기보다는 스스로의 내적 가치체계를 통해 내린 평가로 자신을 규정할 줄 알아야 한다.
천년만년 살 것 같을 때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을 너무도 쉽게 미룬다. 내일을 준비하면서 살거나 어제를 기억하면서 살기 때문에 그 동안 당장 오늘 하루는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이와 정반대로 아침에 눈을 떠 맞이하는 하루하루가 생의 마지막 날일 수 있다는 사실을 온전히 이해한다면 그 날을 성장할 수 있는 기회로 받아들이며 더욱 진정한 자신이 되는 날로 삼고 다른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