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의 분석의 기예
이상하.조관형 지음 / 파워LEET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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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꼭 독해능력에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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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가격 모자를 때 마다 사모으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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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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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웃음

 박민규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웃음을 멈출 수 없게 만들었고, 손에서 책을 놓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비주류’의 삶에서 자국나는 어떤 상처에서 발하는 것이었다. 1등이 되고자 하는 욕망, 주류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 허망함으로 귀결되었을 때 빚어지는 아픔과 상처 말이다. 아픔과 상처가 울음이 아니라 거꾸로 웃음으로 표현된다고 할 때, 이 웃음은 기쁨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향한 비판과 저항을 표현한다. 너무 거창한 인위적 의미부여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서는 웃음을 막기 위해 살인을 자행하는 권력의 속성이 드러나고 있다. 왜냐하면, 권력은 항상 사람들의 슬픔을 원하지, 웃음을 원하지 않는다. 권력은 항상 사람들의 두려움과 불안을 원하지 기쁨과 희망을 원하지 않는다. 권력이 딛고 있는 자리는 다름 아니라 기쁨과 행복, 희망으로 포장된 두려움과 불안, 슬픔이다. 그러니 박민규가 웃음을 소재로 비주류의 삶이 갖는 상처를 웃음으로 표현할 때,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와 지배 권력의 핵심적 본질을 찌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게 거창한 담론은 아닐지라도 상관없다. 이제는 그렇게 소외된 삶을 극복하기 위해서 거창한 담론이 힘을 발휘하고 요구되고 있는 것은 아니니까.  오히려 ‘지금’, '여기'의 삶에서,  바로 그 지점에서 자신과 주변을 둘러보며 사랑(?)하는 것이 요구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슬픔보다는 사소한 기쁨을, 파편적인 삶보다는 협력적이고 유대적인 노동의 삶을 살아가는 즐거움과 웃음이 더욱 값지지 않을까? 그것이야말로 권력이 제일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것이니까. 삶의 자율성의 원천은 바로 웃음과 즐거움에 있다.    

 

2. 사랑과 희망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못생긴 그녀’, ‘그’, ‘요한’ 세 사람의 사랑이야기이다. ‘못생김’이라는 소재는 역시 비주류의 삶을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못생김’은 단지 외모지상주의를 비판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너무 지루하고 낡은 것이다. (물론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오히려 레벨화된 주변의 시선과 그 시선에 집착하는 삶의 한 단면을 그리고 있다. 또한 '못생긴 그녀'와 '그'의 낭만적 사랑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다. 만약, ‘못생긴 그녀’와 ‘그’의 사랑이야기로 본다면, 그것은 단지 멜로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세 사람의 사랑이야기이다.  ‘못생김’을 둘러싼 세 사람의 사랑은 남-녀간의 멜로에 한정되는 현대의 ‘에로스’가 아니다. 그것은 배타성이 아닌 포괄성으로서 ‘아가페’이다. 모든 것을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모든 것과 관계 맺을 수 있고, 이 관계에서 새로움과 생성을 만들어가는 그런 사랑이다. 또한 위로부터 내려오는 아가페가 아니라 옆으로 퍼져가는 아가페이다. 이러한 사랑은 희망으로 채워져 있고, 동시에 이러한 희망을 담고 있는 그릇은 바로 사랑이다.  

 

모든 걸 포기한 인간에게 남겨진 한 가닥의 기대... 그것이 희망임을 나는 알 수 있었고, 사랑이 바로 신이 인간에게 남겨준 마지막 <희망>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333쪽)

 

‘못생긴 그녀’는 ‘그’를 사랑했고, 그리고 ‘그’를 사랑하면서, ‘요한’을 사랑하게 된다. 

 

‘그’는 ‘못생긴 그녀’를 사랑했고, ‘요한’을 사랑했다.

‘요한’은 ‘그’를 사랑했고, ‘못생긴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이것은 단지 엇갈린 운명이나 비극속에 맺어지는 사랑의 변화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비주류의 삶이 서로의 아픔을 보듬고 메워나가는, 그런 아가페적인 사랑이 아닐까? 사실 ‘요한’은 예수의 12 제자 중에서 예수가 못박혀 있을 때 끝까지 있었던 제자였다. 그리고 사랑을 강조하는 설교를 하였다고 한다. 끝까지 그와 그녀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그들의 사랑을 옆에서 매개하고 흡수하며, 지켜주었던 요한.  beer가 bear로 표현되고, hof가 hope로 표현되는 것은 바로 사랑과 희망을 넌지시 던져주고 있다.  


Bears all things, believes all things, hopes all things, endures all things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희망하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린도전서 13장 7절)  

 

그러나 사랑과 희망은 단지 절망속에서만 피어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사랑과 희망은 절망이라는 계기를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사랑과 희망은 절망 없이 그 자체로 삶을 살아가는 힘이다. 참고 기다리고 기대는 것도 사랑이다. 그들은 보고 싶어도, 하고 싶어도 욕심내지 않는다. 묵묵히 참으며, 기다린다. 왜냐하면, 그것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 때문일지도 모르고, 자신의 사랑을 가벼운 것으로 넘겨버리지 않으려는 어떤 진실함을 고수하려는 태도 때문일지도 모른다. 
 

3. 우연과 필연

 주류사회,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사람들의 삶의 가치는 획일화되고 레베화되어 있다. 이쁨의 가치, 그것은 바로 레벨화된 시선의 가치이다. 모두 이뻐야 된다는 강박은 공식화되어 있다. 이러한 공식은 마치 1+1=2라는 필연성처럼 사람들의 생각속에 자리잡고 있다. 우연이 설자리는 없다. 사랑도 필연적으로 된다. 이뻐야 되고, 있어야 된다. ‘못’은  비자발적 선택이다. 다시 말하면, '못'은 사회의 구조속에 필연적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는 상황들을 가리킨다. 그래서  ‘못’은 필연성의 공식이다. '안'은 자발적 선택이다. '안'은 저항하고 거부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래서 ‘못’에 대한 비판과 저항은 ‘안’으로 향한다.  돈을 못버는 것이 아니라 안버는 것으로, '못'생긴 것이 아니라 '안'생기는 것으로, 이러한 것들은 필연성의 공식에 비추어보면, '비정상'과 또라이로 보일테지만, 사실 '정상'의 필연성은 자아없이 부끄러움으로 가득한 채, 필연에 의지하는 삶이다. 못생겨지는 것, 비정상이 되는 것, 가난하게 사는 것은 현재의 구조에 대한 저항이 될 수 있다. 그것은 타인의 시선을 거부하고, 자신을 찾는 것이며, 스스로의 삶을 구성하는 일종의 자발성이기 때문이다. 권력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자신감과 자발성이다. 책의 처음이 결론부로 시작하고, 결론부에서 처음의 스토리가 맞추어지는 것은 그러한 원환성에서 ‘못생긴 그녀’와 ‘그’의 우연적 만남의 구조를 표현해주고 있다고 볼수도 있다. 일종의 주사위 던지기의 원환과 같은 것, 즉 주사위를 던지면 위로 올라갔다 떨어지는 원환의 모양에서 나온 수말이다. ‘고양이’ ‘생텍쥐페리’와의 만남도, 그것을 ‘생텍쥐페리’로 이름 짓는 것도 우연에서 벌어진 일일지 모른다. 여기서 우연은 무지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획일화되고, 제도화된 틀의 필연성의 구조에서 벗어난 새로움과 생성의 사건과 시간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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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알라딘신간평가단님의 "<인문> 분야 신간 평가단을 모집합니다. "

1. 아니오 2. 인문과 문학을 지원하려고 합니다. 3. http://blog.aladin.co.kr/komah/3832019 4. 알라딘 마이리뷰에 2번 선정되었고, 알라딘이 서재 블로그를 활성화할 때 글을 좀 적었던적이 있으나 한동안 중단했었습니다. 니체는 글을 쓰지 않는 정신은 게으른 정신이라고 하였는데, 책을 읽으면 항상 서평을 써야겠다는, 써야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에 신간서평단과 관련된 메일을 보고 신청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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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원리 - 전5권
에른스트 블로흐 지음, 박설호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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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희망의 원리>는 품절되었다. 출판사에 문의한 결과 한질씩 겨우 반품들어오는 것이 있으면 연락을 해준다. 아직까지 다시 찍을 생각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찾는 사람들은 빈번한 것 같다.  품절은 되었지만, 블로흐의 문제의식에 대해 감동하면서, 몇 글자 리뷰를 적어본다.  

  

 1.  사람들은 슬픔과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가짐으로써 삶을 포기하거나 단념하지 않으며, 지금 부딪혀 있는 한계와 장애를 넘어서길 바라고 꿈꾸며, 실천해 나아간다. 희망은 현재의 한계와 장애들을 넘어서는 힘으로 발휘되면서, 현재를 넘어서 미래로 나아가게끔 한다. 이렇게 희망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에서 항상 삶의 원천으로서, 삶의 활력으로서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철학은 삶에 바탕을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삶을 이루는 핵심요소인 이러한 희망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았다. 물론 허버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e, 1898~1979)는『일차원적 인간』의 결론에서 벤야민의 말을 인용하면서 희망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에게 희망이 주어지는 것은 오로지 희망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이다.  

                        (한글번역본, 한마음사, 295쪽)  

 

마르쿠제는『일차원적 인간』의 결론에서 "사회의 비판적 이론은 현재와 미래의 간격에 다리를 놓을 수 있는 개념"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미래로 건너 갈 다리로서 ‘희망’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희망이란 무엇인가? 마르쿠제는『일차원적 인간』의 결론에서 희망의 필요성만을 강조할 뿐 희망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다.  

 또한 칸트의 비판철학의 핵심을 관통하는 세 가지 물음에도 희망은 등장하고 있다. 칸트에 의하면, 이성의 모든 관심은 다음과 같은 세 물음으로 통합된다.   

 

 

1.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2.나는 무엇을 행위 해야만 하는가?

3.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  

(순수이성비판,  805, B833) 


 여기서 칸트는 단지 희망의 대상(무엇을)과 그 대상을 희망할 기초를 실천적인 도덕법칙과 연관시켜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칸트는 첫째 물음과 관련하여『순수이성비판(Kritik der reinen Vernunft, 1781)』전체를 통해서, 앎이 무엇인지, 앎이 어떻게 가능한지, 그리고 앎의 한계까지도 규명하고 있다. 그리고 둘째 물음과 관련하여『윤리 형이상학 정초(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 1785)』와『실천이성비판(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 1788)』을 통해서 이성의 실천적 사용과 도덕법칙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행해야만 하는가에 대한 도덕적 기준 내지는 명령을 규명하고 있다. 그러나 셋째 물음과 관련해서는 무엇이 희망인지, 왜 희망이 가능한지, 왜 희망을 가져야하는지에 대한 물음은 생략한 채, 단지 희망의 대상의 가능성만을 ‘실천적인 도덕법칙’을 통해서 취하고 있다.  

 이렇게 희망은 단지 언급되기만 했을 뿐, 희망 자체는 철학의 주요한 관심이 되지 못했다. 희망이 철학의 대상이 되지 못함에 따라 희망은 단순히 개인적 ‘희망사항(wishful thinking)’  

으로만 머무르고 있다. 그래서 자신만의 희망이라는 독백적이고 고립적인 벽을 넘어서지 못하고, 단순한 공상이나 헛된 상상의 차원에서 이내 사라져 버리거나 자신만의 안위와 이익만을 위한 것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러한 희망은 지배 권력의 이데올로기로 활용되기 때문에 현재에 순응하게끔 하는 태도를 유발하고 지속시킨다. 이것은 삶 자체가 권력의 대상이 된 지금의 사회에서는, 즉 삶의 미시적인 부분까지 침투하여 삶 자체를 관리하려는 현재의 통제사회에서는 권력의 핵심적인 지배 수단이 된다. 이러한 권력은 사람들의 정서까지도 통제하려는 성격을 지니기 때문에 삶 자체를 생산하고 재생산하기 위해서 ‘희망’이라는 정서와 ‘희망의 담론’을 지배의 수단으로 삼을 가능성이 크며, 실제 그렇게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희망은 기만적이다. 권력층의 신년인사와 덕담이 항상 ‘희망찬 미래와 새로운 시대’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은 이러한 내용을 아주 쉽게 보여준다. 

 그래서 희망이 자신만의 안위나 이익을 위한 것에만 머무르지 않고, 지배 권력의 통제 수단으로 활용되지 않기 위해서, 진정하게 다른 사람들과 함께, 보다 나은 삶을 구성해 가기 위해서는 희망에 대한 철학적 접근이 요구된다. 이러한 철학적 규명은 희망이 관계론적인 차원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과 세계를 구성하게끔 하는 역량으로 발휘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이것은 새로운 정치적 기획과 전략을 구성하게끔 하는 하나의 주춧돌이 될 수 있다. 이것이 마르쿠제의 ‘현재와 미래의 간격에 다리를 놓을 수 있는 개념’으로서 희망의 필요성의 의미이다. 

 

그렇다면, 희망이란 무엇인가? 여기서 이 물음을 해결하기 위해 참조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 1885~1977)이다. 블로흐는 희망이 철학의 주요한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 상황에서 희망에 대하여 철학적 접근의 초석을 놓은 사람이다.  또한 희망에 대한 유일한 철학적 저서는 그의『희망의 원리』이다.  에른스트 블로흐에게 ‘희망’은 그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 진실된 힘 자체였고, 그 힘은 나치의 체포령을 피해 겪어야 했던 유랑의 길을 견디게 했고, 미국과 서독에 망명해야 하면서 겪어야 했던 고난과 역경을 버티게 했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블로흐는 희망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았으며, 희망을 원리적으로 규명하고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것을 평생의 과업으로 삼았다. 이러한 그의 관점과 노력은 동 시대 아도르노의 상처받은 영혼의 절망과는 대조를 이룬다. 즉 블로흐는 이성과 계몽에 대하여 우울함과 슬픔을 자아내는 총체적, 냉소적 비판보다는 현재보다 나은 삶을 바라는 희망을 선택했던 것이다. 블로흐가『희망의 원리』첫머리에서 말하는 다음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우리는 무엇을 기대하는가?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는가? 많은 이들이 단지 혼란스럽게만 느끼고 있다.....중요한 것은 희망을 배우는 것이다.  

 

‘희망을 배우는 것’은 ‘누구’라는 혼란과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불안한 미래에 맞서서 희망을 통해 ‘보다 나은 삶’을 기획하고, 실천해 나아가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에른스트 블로흐의『희망의 원리』는 불안과 두려움, 절망에 맞서는 희망을 규명함으로써 ‘보다 나은 삶’을 모색하려는 시도이다.  


2.  희망은 본질적 속성은 희망의 미래지향성인데, 이 미래지향성은 미래를 선취하게 한다. 그것은 때로는 앞서 나타내고(Vor-schein), 앞서 붙잡고(Vorgriff), 아직-아닌 것(das Noch-Nicht)을 선취한다. 아직 아닌 것은   ‘아직-이루어지지-않은 것(das Noch-Nicht-Geworden)’ 과‘아직-의식되지-않은 것(das Noch-Nicht-Bewußte)’ 을 선취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블로흐에게 핵심적인 내용이다. 데카르트, 칸트, 헤겔로까지 하나의 의식철학의 패러다임을 형성하였다면, 이 의식철학의 패러다임은 의식되지 않은 것의 존재를 기각하거나 침묵한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영역을 개척했다. 그러나 이 무의식의 영역은 과거지향적이다. 과거의 상처받은 자아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억압된 무의식을 해석하고 치료하는 방식으로서 과거로 향할 뿐이다. 여기에는 어떤 미래의 새로움의 창조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래서 전자를 '의식의 길'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무의식의 길'이다. 그러나 이 둘다 미래의 새로움을 창조하고 구성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여기에 블로흐의 신선한점과 뛰어난 안목이 있다. 블로흐는 아직-의식되지-않은 것과 아직-이루어지지-않은 것을 선취하는 길은 미래의 새로움을 창조하는 길로 열려있다. 그것은 의식의 틀에 갇히지 않으면서도, 무의식의 억압을 찾기 위해 과거로 향하지 않는다.  

『희망의 원리』는 모두 5부로 구성되어 희망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방대하게 다루고 있다. 이 책을 형식적으로 살펴보면, 1부「보고-작은 낮꿈들」에서는 유년기부터 노년기까지 일상에서 갖는 꿈들이 서술되어 있고, 2부「정초적 논의(Grundlegung)-선취하는 의식(antizipierende Bewußtsein)」에서는 희망이 존립하는 근거를 철학적으로 규명하고 있다. 3부「이행-거울속의 바람의 상」에서는 영화, 연극, 여행, 동화에서 ‘바람의 상’들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4부「구성-더 나은 세계의 개괄」에서는 ‘바람의 상’들로서 건강, 사회, 기술, 건축, 지리에 대한 유토피아를 개괄하고 있다. 그것은 각각 의학적 유토피아, 사회적 유토피아, 기술적 유토피아, 건축 유토피아, 지리적 유토피아로 드러난다. 이것은 일종의 유토피아로서 희망에 대한 개괄적인 설계도라고 할 수 있다. 5부「동일성-실현된 순간의 바람의 상」에서는 ‘실현된 순간의 상’속에서 개방된 자연과 인간의 일치로서의 동일성으로 향하고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니라 고향(Heimat)이다. 창세기의 태초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고향은 시원이나 태초로의 복귀가 아닌 진정한 역사창조 과정의 시작점이다.

 그러나 이 방대한 내용은 언 듯 보면, 병렬적으로 나열된 백과사전식 내용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그렇게 단순하게 구성되어 있지 않다.『희망의 원리』는 먼저 일상적인, 아직 정례화 되지 않은 이런 저런 사람들의 낮꿈들에 대한 서술로부터 공감을 이끌어내고, 이러한 공감 속에서 희망을 철학적으로 정초함과 아울러 예술작품 속에서 어떻게 바람과 낮꿈의 상들이 나타나는지를 방대하게 추적하여 살을 붙인다. 그리고 나아가 바람의 상들이 어떻게 유토피아로 개괄되고 실천될 수 있는지를 조망하고, 진정한 역사의 시작점을 향한 고향을 가리키면서 끝맺음하고 있다.『희망의 원리』는 희망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일관적이고 전략적인 서술의 구조로 전개해가고 있다. 즉 ‘보고-정초적 논의-이행-구성-동일성’의 서술과정은 희망과 그 희망의 실현의 과정을 현상하는 바에 따라서 일관적으로 그려가고 있다.

 

3.블로흐는 희망을 철학적으로 기초짓고, 동화, 예술작품, 문학속에서 등장했던 사람들의 바람의 상들을 추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로흐의 초점은 사회변화에 맞추어져 있다. 그래서 2부 마지막을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의 테제를 분석하면서 2부의 결론을 맺고 있다. 그것은 희망을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영역으로 초점을 수렴시켜감과 동시에 희망을 실현하기 위한 실천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4. 희망의 선취와 실천적 중요성은 희망의 시간을 구성한다. 이것은 다름 아니라 직선적인 시간이 아니라 원환적인 시간이다.   다시 말하면, 선취를 통해서 미래가 현재로 다가오고, 다시 선취된 미래는 실천을 통해서 미래로 나아가면서 실현되고, 또 다른 현재가 된다. 이러한 원환적인 시간은 ‘...미래-(선취)-현재-(실천)-미래...’로 표현할 수 있다. 따라서 희망에서 결정적인 것은 선취된 미래를 현재화시키는 실천적인 문제이다. 블로흐는 ‘노동하는 인간’을 아르키메데스의 점으로 수용하고, 이로부터 ‘보다 나은 삶’이 무엇인지 방향성을 제시하면서, 희망을 세계를 변화시키는 정치적인 혁명적 실천으로 수렴시키고 있다. 이것은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들』의 분석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아마도 블로흐의 문제의식은, 즉 희망에 접근하려는 블로흐는 의도는 여전히 보다 나은 삶을 실현해갈 수 있는 가능성의 영역을 확장하려고 했던 것 같다. 블로흐를 마르크스주의자라고 간주할 때, 대부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정치경제학에서 변혁의 전망과 실천을 제기하였다면, (그래서 상당히 건조하고 논리적으로 함몰된 부분도 없지 않다.) 블로흐는 인간의 정서에서 미래의 보다 나은 삶의 실현가능성을 기초짓는다고 볼 수 있다. 

 

5. 중요한 것은 희망을 배우는 것이다.(Es kommt darauf an, das Hoffen zu lern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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