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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7월
평점 :
1. 웃음
박민규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웃음을 멈출 수 없게 만들었고, 손에서 책을 놓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비주류’의 삶에서 자국나는 어떤 상처에서 발하는 것이었다. 1등이 되고자 하는 욕망, 주류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 허망함으로 귀결되었을 때 빚어지는 아픔과 상처 말이다. 아픔과 상처가 울음이 아니라 거꾸로 웃음으로 표현된다고 할 때, 이 웃음은 기쁨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향한 비판과 저항을 표현한다. 너무 거창한 인위적 의미부여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서는 웃음을 막기 위해 살인을 자행하는 권력의 속성이 드러나고 있다. 왜냐하면, 권력은 항상 사람들의 슬픔을 원하지, 웃음을 원하지 않는다. 권력은 항상 사람들의 두려움과 불안을 원하지 기쁨과 희망을 원하지 않는다. 권력이 딛고 있는 자리는 다름 아니라 기쁨과 행복, 희망으로 포장된 두려움과 불안, 슬픔이다. 그러니 박민규가 웃음을 소재로 비주류의 삶이 갖는 상처를 웃음으로 표현할 때,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와 지배 권력의 핵심적 본질을 찌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게 거창한 담론은 아닐지라도 상관없다. 이제는 그렇게 소외된 삶을 극복하기 위해서 거창한 담론이 힘을 발휘하고 요구되고 있는 것은 아니니까. 오히려 ‘지금’, '여기'의 삶에서, 바로 그 지점에서 자신과 주변을 둘러보며 사랑(?)하는 것이 요구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슬픔보다는 사소한 기쁨을, 파편적인 삶보다는 협력적이고 유대적인 노동의 삶을 살아가는 즐거움과 웃음이 더욱 값지지 않을까? 그것이야말로 권력이 제일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것이니까. 삶의 자율성의 원천은 바로 웃음과 즐거움에 있다.
2. 사랑과 희망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못생긴 그녀’, ‘그’, ‘요한’ 세 사람의 사랑이야기이다. ‘못생김’이라는 소재는 역시 비주류의 삶을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못생김’은 단지 외모지상주의를 비판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너무 지루하고 낡은 것이다. (물론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오히려 레벨화된 주변의 시선과 그 시선에 집착하는 삶의 한 단면을 그리고 있다. 또한 '못생긴 그녀'와 '그'의 낭만적 사랑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다. 만약, ‘못생긴 그녀’와 ‘그’의 사랑이야기로 본다면, 그것은 단지 멜로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세 사람의 사랑이야기이다. ‘못생김’을 둘러싼 세 사람의 사랑은 남-녀간의 멜로에 한정되는 현대의 ‘에로스’가 아니다. 그것은 배타성이 아닌 포괄성으로서 ‘아가페’이다. 모든 것을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모든 것과 관계 맺을 수 있고, 이 관계에서 새로움과 생성을 만들어가는 그런 사랑이다. 또한 위로부터 내려오는 아가페가 아니라 옆으로 퍼져가는 아가페이다. 이러한 사랑은 희망으로 채워져 있고, 동시에 이러한 희망을 담고 있는 그릇은 바로 사랑이다.
모든 걸 포기한 인간에게 남겨진 한 가닥의 기대... 그것이 희망임을 나는 알 수 있었고, 사랑이 바로 신이 인간에게 남겨준 마지막 <희망>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333쪽)
‘못생긴 그녀’는 ‘그’를 사랑했고, 그리고 ‘그’를 사랑하면서, ‘요한’을 사랑하게 된다.
‘그’는 ‘못생긴 그녀’를 사랑했고, ‘요한’을 사랑했다.
‘요한’은 ‘그’를 사랑했고, ‘못생긴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이것은 단지 엇갈린 운명이나 비극속에 맺어지는 사랑의 변화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비주류의 삶이 서로의 아픔을 보듬고 메워나가는, 그런 아가페적인 사랑이 아닐까? 사실 ‘요한’은 예수의 12 제자 중에서 예수가 못박혀 있을 때 끝까지 있었던 제자였다. 그리고 사랑을 강조하는 설교를 하였다고 한다. 끝까지 그와 그녀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그들의 사랑을 옆에서 매개하고 흡수하며, 지켜주었던 요한. beer가 bear로 표현되고, hof가 hope로 표현되는 것은 바로 사랑과 희망을 넌지시 던져주고 있다.
Bears all things, believes all things, hopes all things, endures all things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희망하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린도전서 13장 7절)
그러나 사랑과 희망은 단지 절망속에서만 피어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사랑과 희망은 절망이라는 계기를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사랑과 희망은 절망 없이 그 자체로 삶을 살아가는 힘이다. 참고 기다리고 기대는 것도 사랑이다. 그들은 보고 싶어도, 하고 싶어도 욕심내지 않는다. 묵묵히 참으며, 기다린다. 왜냐하면, 그것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 때문일지도 모르고, 자신의 사랑을 가벼운 것으로 넘겨버리지 않으려는 어떤 진실함을 고수하려는 태도 때문일지도 모른다.
3. 우연과 필연
주류사회,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사람들의 삶의 가치는 획일화되고 레베화되어 있다. 이쁨의 가치, 그것은 바로 레벨화된 시선의 가치이다. 모두 이뻐야 된다는 강박은 공식화되어 있다. 이러한 공식은 마치 1+1=2라는 필연성처럼 사람들의 생각속에 자리잡고 있다. 우연이 설자리는 없다. 사랑도 필연적으로 된다. 이뻐야 되고, 있어야 된다. ‘못’은 비자발적 선택이다. 다시 말하면, '못'은 사회의 구조속에 필연적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는 상황들을 가리킨다. 그래서 ‘못’은 필연성의 공식이다. '안'은 자발적 선택이다. '안'은 저항하고 거부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래서 ‘못’에 대한 비판과 저항은 ‘안’으로 향한다. 돈을 못버는 것이 아니라 안버는 것으로, '못'생긴 것이 아니라 '안'생기는 것으로, 이러한 것들은 필연성의 공식에 비추어보면, '비정상'과 또라이로 보일테지만, 사실 '정상'의 필연성은 자아없이 부끄러움으로 가득한 채, 필연에 의지하는 삶이다. 못생겨지는 것, 비정상이 되는 것, 가난하게 사는 것은 현재의 구조에 대한 저항이 될 수 있다. 그것은 타인의 시선을 거부하고, 자신을 찾는 것이며, 스스로의 삶을 구성하는 일종의 자발성이기 때문이다. 권력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자신감과 자발성이다. 책의 처음이 결론부로 시작하고, 결론부에서 처음의 스토리가 맞추어지는 것은 그러한 원환성에서 ‘못생긴 그녀’와 ‘그’의 우연적 만남의 구조를 표현해주고 있다고 볼수도 있다. 일종의 주사위 던지기의 원환과 같은 것, 즉 주사위를 던지면 위로 올라갔다 떨어지는 원환의 모양에서 나온 수말이다. ‘고양이’ ‘생텍쥐페리’와의 만남도, 그것을 ‘생텍쥐페리’로 이름 짓는 것도 우연에서 벌어진 일일지 모른다. 여기서 우연은 무지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획일화되고, 제도화된 틀의 필연성의 구조에서 벗어난 새로움과 생성의 사건과 시간을 말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