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하버마스의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을 읽으면서 바타이유를 접하게 되었다. (그러나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의 번역은 정말 꽝이다. 각 장에서 똑같은 용어가 다르게 번역되지를 않나, 어쩔때는 인용문 큰 따옴표가 빠져있고, 어쩔때는 번호도 잘못매겨져 있고, 역자 주석하나 없는 것은 정말 해메게 만든다. 수업시간 선생님과 수업의 학생들이 없었더라면, 책을 놓았을 것이 뻔했을 것이다. 나같이 영어도 못하고, 독일어도 못하고, 불어도 못하는 사람에게 원본을 일일이 대조해볼 능력도 부족하거니와 시간도 부족한데, 정말 나같은 사람에겐 불친절하기 짝이 없다. 차이와 반복을 번역한 김상환 선생님의 번역태도를 정말 존경할 만하다.  번역의 올바름의 판단은 나의 능력이 아니다. 그러나 세심한 역주와 해제, 그리고 자신에게 있었던 오류가 독자에게 없었으면 하는 그 태도말이다.)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에서의 하버마스의 비판은 일관적이다. 하나는 이성비판자들이나 계몽의 변증법을 수행하려는 자들이 주체철학적 이성(의식)으로부터 탈피하지 못했거나(헤겔과 맑스, 그리고 서구 맑스주의자들) 이성 비판을 총체화한 나머지 자신들의 비판을 정당화할 규범적 척도를 확보하지 못해 결국 수행모순에 빠진다는 것이다. 니체는 적극적 힘과 반응적 힘(번역은 능동적 힘과 반동적 힘이라 되어 있음) 을 구분할 개념적 수단이나 기준척도를 상실하였고,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자신들의 계몽비판을 정당화해줄 척도 자체를 갖다 버렸고, 하이데거는 전도된 토대주의에 묵여있으며, 데리다 역시 근원주의이며, 바타이유 역시 총체화된 이성비판의 자기관계의 모순에 빠진다는 것이다.  아직 푸코를 읽지 않았지만, 아마 푸코의 비판에도 역시 동일하게 적용될 듯하다. 아마도 푸코가 행하고 있는 작업도 역시 이성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에 결국 자기관계의 모순에 빠진다고 하지 않을까? 광기와 만나려는, 이성으로 배제된 광기를 복원하려는, 혹은 배제된 광기의 역사를 추적하려는 푸코의 작업도 역시 이성을 바탕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광기와 만날 수 없고, 광기를 말할 수 없다고 하지 않을까?

 하버마스가 각각의 다른 맥락을 자신의 관점으로만 재단하여 비판한다는 느낌도 들어서  좀 치사하고 유치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이론적 논쟁에서는 첨예해야 하며, 그 근원까지도 따져물어야 한다는 중요성을 인정안할 수는 없다.  바타이유는 여덜번째 강의에 배치되어 있는데, 하이데거, 데리다 다음이고 푸코 이전이다.

 하버마스는 각각의 강의 배치를 자신의 설득력을 높이기 위하여 전략적으로 배치되었다는 느낌도 든다. 가령 하이데거와 파시즘의 논의를 연결시켜서(물론 책에서는 바타이유의 파시즘에 대한 내용이 분명히 드러나는 것 같지 않다. 바타이유가 파시즘을 이질적인 것과 동질적인 것으로 융합하여 봤다는 점, 그러나 자연의 착취에 자기동일성으로 흡수하였다는 것이 논지인 것 같은데...) 은근히 비판의 규범적 척도가 없으면 야만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음을 암시한다.  또한 다음 장에서 이루어질 푸코에 대한 비판을 강화하기 위하여 바타이유를 검토하는 것이 푸코비판을 위한 사전 포석이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푸코가 바타이유를 하나의 스승의 반열에 올려놓았다는 사실로부터 푸코가 왜 그러했는지를 은근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어쨋든 바타이유의 에로티즘과 일반경제학은 하버마스에게 소박한 형이상학으로 간주되고, 총체화된 이성비판의 아포리아에 빠지는 것으로 비판된다. 철학은 언어의 우주안에 있고, 에로티즘은 언어의 저편에 있는데, 그렇다면 바타이유가 쓴 글 또한 언어의 우주에 갇힌다는 비판인데, 어떻게 에로티즘을 설명할 수 있으며, 말할 수 있는지를 공격하는 것이다.

바타이유의 에로티즘과 푸코의 광기의 역사는 유사한 점이 있다. (난 푸코의 광기의 역사밖에 읽지 않았으므로) 모두 이성으로부터 배제된 어떤 것을 끄집어내려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이성에 비판을 가하는 것이된다.  바타이유는 에로티즘을 푸코는 광기를 끄집어 낸다. 언어의 한계속에서도 각각 에로티즘과 광기를 만나려는 시도, 그것을 끄집어 내려는 시도. 과연 성공했는지는 미지수이고, 어쩌면 중요한 문제이지만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논리와 언어는 이미 이성의 편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성의 잣대를 가지고 광기와 만날 수 있는가? 에로티즘을 말할 수 있는가를 따지는 것은 어쩌면 저자들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자료를 활용하는 방식에서도 유사하다. 바타이유는 라스코 동굴벽화를 가지고 죽음과 성이 폭력을 매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말하면서 조각과 형상들, 그리고 그림들, 그리고 사등의 글을 활용한다. 푸코 또한 고문서를 뒤져서 나온 자료들, 시와 소설, 희곡, 그림을 가지고 광기를 추적해나간다. 아마도 언어는 이성의 편이기 때문에 공식적이고 논증적인 자료보다는 더욱더 많은 자료들과 활용이 가능한 자료들이 필요했으리라. 그러나 푸코와 바타이유가 다른 점은 푸코는 철저히 실증적으로 논의를 전개해나가고 자료와 근거들로 풍부한데 반하여 바타이유는 사례와 자료들, 그리고 자신의 논지에 관하여 일관성이 떨어지는 것은 아닌가 의심이 든다. 그러나 이것은 중요한 것은 아니리라. 바타이유에게 에로티즘은 주체를 해방시키고 삶과 죽음의 연속을, 존재의 연속을 느끼게 하는 저편의 황홀감과 오르가즘같은 것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이렇게 보면, 푸코가 왜 바타이유를 왜 그렇게 높이 평가했는지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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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23 23: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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