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문 - 펭귄 클래식 펭귄클래식 5
앙드레 지드 지음, 이혜원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8월
절판


설령 그 추억들이 군데군데 잘리어 조각나 있을지라도 그것들을 깁거나 이어 붙이기 위해 있지도 않은 이야기를 지어내지는 않겠다. 거짓 기억을 지어내기 위한 노력이 내가 추억들을 이야기하는 동안 맛보기를 고대하는 마지막 즐거움마저 앗아 갈 것이기 때문이다.-11쪽

스스로를 억제한다는 것은 다른 이들이 자신의 뜻대로하는 것만큼이나 내게는 자연스러운 일이어서 나를 얽어맸던 엄격한 규율도 반감을 불러일으키기는 커녕 오히려 나를 우쭐하게 만들었다. 내가 미래에 추구하고자 한 것 또한 행복 자체보다는 그것에 이르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었다. 말하자면 진즉부터 행복과 미덕을 혼동하고 있었던 것이다.-32쪽

"너는 혼자 나아갈만큼 굳세지 못한 거니? 우리는 저마다 혼자 힘으로 하느님을 찾아야 하는 거야."
"하지만 내게 그 길을 가르쳐주는 건 바로 알리사야."-39쪽

소리가 잘 울리는 공간 안에 있는 것처럼 우리 마음속의 극히 미묘한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소리까지도 서로 들을 수 있을 만큼 단조롭게 흐르는 생활이 시작되었다.-47쪽

젊어서는 남들을 즐겁게 하던 유쾌한 성품도 나이를 먹다 보면 고약해지는 법이란다. 지금 너희가 ‘난리법석’이라고 부르는 누님의 성격도 처음에는 호감이 갈 만큼 열정적이라거나, 충동적이라든가, 매력적이라고만 여겨지던 건이었지... 내 단언하건대, 우리도 지금의 너희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단다. -48쪽

오, 사랑의 미묘한 책략이여, 미묘하다 못해 잔인하기까지한 사랑의 책략이여, 너는 어떤 비밀스러운 경로를 통해 웃음에서 눈물로, 천진한 기쁨에서 덕행의 요구로 우리를 이끌어 갔던가!-49쪽

언니와는 언제 결혼할 생각이야?
병역 마치고 나서.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뭔지 좀 더 알게 되기 전에는 하지 않을 거야.
아직 잘 모른다는 거야?
아직은 알고 싶지 않아. 관심 가는 게 너무나 많거든. 무엇 하나를 골라잡아서 죽어라고 그것만 해야 하는 시기를 되도록 늦추고 싶은 거야.-52쪽

아! 우리가 사랑하는 이의 영혼 위로 몸을 기울여 마치 거울을 들여다보듯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비치는지 볼 수 있다면! 우리가 자신의 마음을 읽는 것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다른 이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면! 그 애정은 얼마나 평온할 것인가! 그 사랑은 얼마나 순수할 것인가!-53쪽

알리사는 산호 목걸이를 목에 걸고 있던 참이었다. 그녀는 고리를 채우려고 두 팔을 들고 고개를 수그린 채 문 쪽으로 등을 돌리고서 불 켜진 촛대 두 개 사이에 놓인 거울을 자기 어깨 너머로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처음 나를 본 것은 거울 속에서였다. 그녀는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얼마 동안 거울 속의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57쪽

(아닌 게 아니라, 나에게는 내가 좋아하고 그녀에게도 알려 주고 싶은 구절이 있을 때마다 내 책이나 알리사의 책에 그녀의 이름 머리글자를 휘갈겨 써넣는 버릇이 있었다.) 하지만 상관없어! 내가 즐거움을 느끼고 싶어서 옮겨 적는 거니까. 내가 발견했다고 생각한 것이 사실은 네가 가르쳐준 것이라 처음에는 기분이 좀 상했지만, 너도 나처럼 이 구절들을 좋아했구나 하고 생각하니 그런 몹쓸 생각이 곧 사라져버렸어. 여기에 옮겨 적고 있노라니, 꼭 너와 함께 읽는 것 같구나.-103쪽

너의 합격은 내게도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로만 여겨져서 축하한다는 말조차 하기가 좀 그렇네. 나는 그 정도로 너를 믿고 있어, 제롬! 네 생각을 하기만 해도 나는 희망으로 가슴이 부풀어 올라. 이제 너는 전에 얘기했던 그 일을 시작할 수 있는 거지?-106쪽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마음의 해방이 아니라 바로 찬미야. 마음의 해방에는 으레 고약한 자만심이 따르기 마련이니까. 반항하려 하는 야심보다는 섬기려 하는 열망을 품을지어다...-108쪽

생성이란 어쩌면 이리도 늘 신비롭고 놀라운지! 우리가 평소 좀 더 자주 놀라지 않는 것은 주의력 결핍 때문이야. 희망으로 가득 찬 그 조그만 요람을 들여다보며 보낸 시간이 얼마인지. 도대체 어떤 이기심이 발동하고 그 무슨 만족감이 들어서, 아니면 최선을 다하려는 열의가 얼마나 부족하기에, 발전은 그리도 빨리 멈춰버리고 온갖 피조물들은 그토록 하느님을 멀리하는 것일까? 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주께로 더욱 가까이 갈 수 있다면, 좀 더 가까이 가기를 바란다면... 그 얼마나 놀라운 경쟁심일까!-119쪽

잘 있어. 너무나도 사랑하는 제롬. 하느님이 너를 지켜주시고 인도해 주시기를. 인간은 오직 하느님 곁으로만 마음 놓고 다가갈 수 있는 거야. (중략) 그리고 바로 그런 점 때문에 네가 훨씬 전부터 나는 네 사랑이 머리로 하는 사랑이고, 애정과 신의에 대한 아름답고 지적인 집착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 -130쪽

그 이상 아무것도 더 바라지 않게 되는, 그런 충만감이야! 라고 너는 말하곤 했지만, 슬프게도 그 충만감이야말로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야...-141쪽

교만한 마음이 조금만 덜했더라면 우리의 사랑은 수월했으리라... 하지만 대상을 잃어버린 사랑에 집착해 보았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건 고집이지, 더 이상 충실이 아니었다.

이제는 나도 어엿한 가정주부가 되었고, 뜨겁게 불타오르던 과거가 쌓이고 쌓인 재에 덮여 버린 지금은 오빠를 다시 만나 보고 싶어 해도 괜찮겠지요. 언제 놀러 오거나 볼일이 있어 님에 오게 되면 에그비브까지 와주세요. 남편도 오빠를 알게 되면 기뻐할 거고, 우리 둘이서 알리사 언니 얘기를 주고받을 수도 있을 테니까요.-169쪽

슬픔은 복잡한 감정이다. 내가 느끼는 행복을 분석하려고 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177쪽

그래서 내가 바라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행복으로 가는 도정이 아닐까 자문하게 된다. 오, 주여! 너무 쉽게 다다를 수 있는 행복으로부터 저를 지켜주소서! 당신 곁에 이를 때까지 저의 행복을 미루고 멀리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주옵소서!-178쪽

나는 사랑에 관해서는 일절 입에 담지 않고서, 내가 그를 사랑하고 있음을 알지 못한 채 그를 사랑하고 싶다. 무엇보다 내가 그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그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가운데 그를 사랑하고 싶다.-179쪽

아무리 행복하더라도 진전이 없는 상태를 소망할 수는 없다.-179쪽

이럴 수가! 내 마음속에서 나도 모르게 저절로 솟아나는 애정을 가밓 미덕이라 부를 수 있단 말인가! 오! 마음을 잡아끄는 궤변이여! 그럴듯한 권유여! 행복의 교활한 신기루여!-183쪽

때때로 나는 사랑한다는 것, 할 수 있는 한 사랑한다는 것, 끊임없이 더욱 사랑하는 것 말고 또 다른 미덕이 있는지 의심해 본다...-183쪽

하느님, 무기력한 제 마음은 제 사랑을 억누를 길이 없사오니, 더 이상 저를 사랑하지 않는 법을 그에게 가르쳐줄 수 있는 힘을 제게 허락해 주옵소서. (중략) 그가 저로 인하여 걸음을 멈추게 되는데도 제가 계속 그를 사랑할 수 있겠사옵니까? 장하다할 수 있을 그 모든 것도 행복 안에서는 얼마나 움츠러드는 것인지요!-184쪽

주여 아니 되옵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길은 좁은 길이옵니다. 둘이서 나란히 걸을 수도 없을 만큼 좁은 길이옵니다.-185쪽

제롬! 곁에 있으면 마음이 저려오고, 멀리 떨어져 있으면 죽을 것만 같은 애달픈 나의 벗, 제롬, 내가 조금 전에 했던 말들 줄에서 내 사랑이 한 말 외에는 아무것도 귀담아듣지 마.-196쪽

몹시 늙은 사람처럼 지쳐 있지만 내 영혼은 신기하게도 동심을 간직하고 있다. 나는 아직도 방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정돈해 놓고, 벗어놓은 옷을 머리맡에 가지런히 개어놓지 않으면 잠들지 못했던 어린 소녀에서 달라진 것이 없다. 죽음을 맞이할 채비도 이렇게 하고 싶다.-198쪽

지금, 빨리, 내가 혼자라는 사실을 또 한 번 깨닫기 전에 죽고 싶다.-201쪽

오빠가 얼른 잊어버렸으면 하는 게 뭔데요?
언제까지나 잊고 싶지 않은 것.-204쪽

만약 내가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한다면 그 여자를 사랑하는 척밖에는 할 수 없을 거야. (중략) 그럼 오빠는 희망 없는 사랑을 그렇게 오래도록 마음속에 간직할수 있다고 믿는 거예요?-205쪽

우리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않은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자!" 마침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이제 깨어나야만해요..."-2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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