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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나무' 아래서
오에 겐자부로 지음, 송현아 옮김, 오에 유카리 그림 / 까치 / 2001년 10월
평점 :
절판
인간의 원칙과 긍지를 가진 노작가의 담백한 체험적 교육 에세이
나무들의 라틴어 학명을 외우고, 숲에서 바다 물개를 키우는 공상을 하며, 영어사전을 벗삼아 모르는 단어들과 씨름하던 소년은 커서 일본의 아쿠타카와상,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는 작가가 된다. 이 책은 오에 겐자부로가 어린 시절 할머니에게 들었던 나무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가져와 노년이 된 자신이 아이인 자신에게 무엇을 말해줄 것인가? 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독자의 범위는 현재를 살아가는 초등 상급생부터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고등학생 아이들이다. 분류를 하자면 교육 에세이. 현장의 교육 경험이 없는 그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며 실제 겪었던 체험 위주로 담백하고 과장없이 그러나 힘있게 글을 전개해나간다.
‘잇는다’
오에 겐자부로는 어머니를 통해 아이가 학교를 다녀야 하는 이유에 대한 대답으로 '잇는다'라는 말을 듣는다. 죽은 아이들의 기억을 '잇기 위해서' 학교에 다녀야 한다고. '잇는다'라는 개념은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 표현이다.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을 잇고 아이와 어른을 잇고 역사와 역사를 잇는다. 나도 오에 겐자부로의 '잇는다'라는 생각과는 약간 다르지만 비슷한 공상을 해본 적이 있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을 읽고서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나(유령A), 과거의 나(유령B)가 동시에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보이지는 않지만 내 주위에서 맴돌면서 나의 판단과 선택에 영향을 미치고 있지 않을까?'하고 말이다. 한 사람이지만 아이와 아이였던 어른은 별개의 개성을 가진 개체가 아니라 이어진 존재라는 점. 확장시켜보자면 부모와 아이도 유전자로 이어져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라이온 킹>에서 심바에게 무파사가 그리 말하지 않던가? '나는 네 안에 있다'고.
아이를 위한 책, 그러나
어른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나무에 기대 어른의 모습이 된 자신을 기다리던 어린 시절의 자신과 마주할 소중한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한 개인을 구성하는 최초의 경험들.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 어른들의 영향을 받지 않고 스스로 생각한 그 소중한 순간. '나무는 왜 위로만 자라는가?'같이 어른들을 괴롭히는 진지한 질문들. 문체를 스스로 발견하고 재미있게 생각했던 일같이 오로지 나만이 가진 비밀스런 깨우침들.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소소한 추억들. 이러한 삶의 에피소드들은 작가의 어린 시절 경험담에 그치지 않고 일반적인 독자에게까지 자신의 유년 시대로 회귀하도록 강력하게 추동하는 힘이 있다. 해서 분량이 많지 않은 짧은 에세이지만 책을 자주 덮고 추억에 잠길 때가 많았다. 과거의 기억은 회상될 때마다 윤색되는 경향이 있다. 어른이 된 후 이 책의 독서 경험은 자신의 어린 기억들, 그러나 가장 오래된 기억들이 소환되어, 빛바랜 기억들은 덧칠을 통해 새로운 빛을 얻게 되거나 혹은 오래전에 잃어버린 소중한 무언가를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책 속의 밑줄, 자신과의 밀회로 이루어지는 elaboration
좋은 습관, 공부법과 독서법에 대한 조언 중에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작가가 정말 좋아하는 책이라면 반복해서 읽을 때 시간을 두어서 밑줄을 다른 색으로 그어 확인해보라고 한 점이다. 분명 시간을 두고 읽으면 달리 해석되어지는 부분이 있다. 그렇다. 우리가 책을 읽는 시점과 나중에 다시 읽는 시점의 간극에는 이어진 동일한 존재임에도 시간에 따른 수많은 경험의 차가 필연코 발생한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만 아는 밑줄 그어진 그곳에서 어른이 된 자신과 아이가 된 자신이 밀회를 나눌 수 있다. 그 수많은 랑데뷰와 저스트 미트가 모여서 하나의 삶을 끊임없이 elaboration(고심하여 만듦)할 수 있고, 일상 속에서 조화로운 화음과 멜로디를 만들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일 때 못 읽고 어른이 되어서야 읽게 된 책이지만, 나중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은 책이다.

원전 운동을 하면서 플래카드를 펼쳐보이는 오에 겐자부로(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