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강 - 2012 볼로냐 라가치 상 수상작 Dear 그림책
마저리 키넌 롤링스 지음, 김영욱 옮김, 레오 딜런.다이앤 딜런 그림 / 사계절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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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기1. 

“귀를 기울이면, 들린다.”라는 심심한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이 있다. 심심하니 소설 제목을 한 번 맞혀보시라. 모르시겠다고? 에이, 포기가 너무 이르신 걸. 그래도 궁금은 하다고? 궁금하면 오백원이다. 인심 써서 알려드리자면, 정답은 존 맥그리거의 《기적을 말하는 사람이 없다면》이다. 문장으로 된 책 제목 중에서도 가정문은 그 다음을 헤아리게 하는 힘이 있다. 거부하지 말고 그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보자. 기적을 말하는 사람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기적을 말하는 사람이 없다면, 기적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기적을 말하는 사람의 말을 흥미롭게 듣는 귀가 없다면, 기적은 존재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왜 또 선문답이냐고? 다음 줄기로 넘어가보자.


물줄기2.

모 방송사 힐링프로그램에 출연한 C씨는 대신 울어주는 것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 바 있다. 

4살 때 집 앞마당에 지하실로 통하는 쪽 창이 하나 있었다. 머리가 들어가는지 궁금해서 집어넣었는데 들어가기는 했지만 빠지지 않았다. 두려운 마음에 소리 내어 울었지만, 어둠 속으로 울음소리는 빨려 들어갔다. 5살이던 형이 나를 발견하고 동네를 떠나가도록 울었다. 형이 우는 소리를 듣고 어머니가 저를 끄집어냈다. 대신 울어준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감동적인 이야기다. 심지어 나는 목이 메어와 흐느껴 울기도 했다. 당신도 그렇다고? 감상은 이쯤 해두고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동사를 확인하자. 그것은 “발견하고”, “대신 울어준다.”이다. 불편하지만 또 물어보자. 우리는 누군가를 위해 대신 울어 준 적이 있었나? 혹은 누가 내 대신 울어준 적이 있었나? 하다못해 어려움에 처한 이를 발견한 적이라도 있었는가? 폐지를 줍거나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모른 척, 못본 척 지나가지 않았는가? 


물줄기3. 

자꾸 묻기만 해서 불편했을 거다. 미안하다. 여기 한 소녀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소녀는 특별하고 아주 예쁘다. 시심이 넘치면서도 움츠러들지 않고 대범한 모험심과 상상력을 가졌다. 성질 사납기로 유명한 비글도 그녀 앞에서는 순한 멍멍이가 된다. 그 아이의 이름은 칼포니아다. 칼포니아는 불황에 힘겨워하는 아버지의 근심을 피하지 않고 직접 해결하고자 “대신” 물고기를 잡으러 나간다. 무모하다 싶을 정도의 용기이긴 하지만 사려깊고 현명하게도 마을의 어른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아들여 코끝이 향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결국 숨겨진 비밀의 강을 발견하고 만선의 꿈을 이루며 숲을 되건너는 과정 속에서 동물들에게 잡은 물고기도 나눠주고, 아버지를 기쁘게 했으며, 불황에 주름진 마을사람들까지 전보다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다.


이 모든 이야기 줄기의 출발이자 핵심은 바로 발견과 공감이다. 기적을 발견하고 말하며 그것을 나눠야만 기적은 존재한다. 난처한 상황에 빠진 사람을 발견하고 알리며 대신 울어 그 어려움이 해소된다. 어른의 일은 어른이 해야지,하며 미루지 않고 자신의 문제로 재발견하고 받아들여 해결코자 노력한다. 이런 이야기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먼저 귀를 기울여야 하고 발견하며 상상해야만 한다. 여기서 필요한 능력이 “타인의 고통을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다.


물줄기가 모여 향하는 곳.

이 책을 읽고 한 일주일쯤 지났을 무렵이었다. 자정 무렵 어디선가 “문 열어! 문 열어!! 문 열어!!!”라는 외침이 들려왔다. 늦은 시각이니만큼 누군가 술주정을 부리고 있는 게 분명 했다. 종종 있는 일이므로 이맛살을 찌푸리며 가볍게 무시했다. 그러나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한밤중의 크레셴도로 점점 더 크게 들려왔다. 그 괴이한 외침은 마치 U보트의 어뢰에 당해 침몰해가는 상선에 갇힌 사람들이 내는 구조 요청을 위한 모르스부호처럼 끊임없이 그리고 간곡하게 들려왔다.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었다. 내심 무서웠고 범죄에 휘말릴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잠들 수도 없었다. 이불을 박차고 나가 현관문을 열어보니 그 소리는 바로 옆집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옆집은 할아버지 혼자 사는 집이었다. 기억 속의 옆집 할아버지는 새벽 5시에는 어김없이 교회를 나가고 부지런히 돌아다니시는 정력적인 분이었다. 일단 옆집 현관의 문을 노크하고 별일 없는지 할아버지에게 안부를 물었다. 할아버지(?)는 창문에 열쇠를 실로 매달아두었으니 그걸 열고 들어오라고 외쳤다. 나는 평소에 이어폰으로 음악을 많이 들어 귀가 좀 먹었는지라 잘 들리지 않았지만 그렇게 들렸다. 어머니에게는 관리 사무소나 파출소, 119등에 연락해달라고 부탁했다. 다른 사람들이 오기 전에(결국 아무도 오지 않았다.) 내가 먼저 고생 끝에 문을 열고 들어가자 놀랍게도 할아버지는 화장실에 쓰러져있었다. 용변을 보시다가 중심을 잃고 쓰러지신 것. 알고 보니 할아버지는 파킨슨병으로 투병 중이었다. 파킨슨 병은 손, 발의 운동신경이 점점 마비되어가는 병이라고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셨던 것 같은데 어떻게 이렇게 되셨을까 하는 생각이 스친 것도 잠시뿐, 심야라 할아버지의 간병인도 없었다. 나는 일단 자꾸 중심을 못 잡고 픽픽 쓰러지려는 할아버지를 앉히고 주변에 흩어진 오물들을 정리했으며 옷을 벗기고 몸을 약간 더운물로 씻어내고 새 옷을 갈아입힌 후, 잠자리를 봐 드렸다. 거의 한 시간 넘게 걸렸고, 할아버지는 지금이 몇 시냐고 물었다. 시간은 새벽 1시가 넘었다. 할아버지는 저녁 8시부터 그렇게 쓰러져있었고, 지나가는 사람이 내 소리를 듣고도 발길로 차며 조용히 하라고 하고 지나갔다고 야속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나 나도 크게 그 행인과 다를 바 없었다. 옆집에 사는 나는 할아버지의 그 구조 요청 소리를 30분 가까이 듣고 있으면서도 애써 무시하고 있었으니까. 아마도 오전에 간병인이 오기까지 12시간도 훨씬 넘게 할아버지가 그렇게 방치될 수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오싹했다. 나라면 부끄러움을 이기고 그렇게 자신의 어려움을 도와달라고 외칠 수 있었을까?  어쩌면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일상적인 소음을 주의 깊게 듣는 귀, 들으려는 귀가 없다면, 혹은 자신의 어려움이나 타인의 어려움을 말하는 입, 말하려는 입이 없다면, 우리는 서로를 들을 수도 없고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리고 다시 일주일 전에 읽었던 이 《비밀의 강》을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눈치빠르고 영리하며 타고난 시인인 칼포니아가 가까운 이의 불행을 대하는 태도를. 그 불행을 자신과 접점이 없는 무관한 평행선으로 만들지 않고 공감과 행동의 접선으로 그어나가는 올곧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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