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화 가족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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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이쯤에서 이야기가 끝났더라면 한 편의 훈훈한 가족영화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생은 영화가 끝난 이후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되는 법이다. 지루한 일상과 수많은 시행착오, 어리석은 욕망과 부주의한 선택... 인생은 단지 구십 분의 플롯을 멋지게 꾸미는 일이 아니라 곳곳에 널려 있는 함정을 피해 평생 동안 도망다녀야 하는 일이리라. 애초부터 불가능했던 해피엔딩을 꿈꾸면서 말이다. -45쪽

코는 어떻게 해요? 난 항상 코가 어디로 가는지 궁금했어요.
이것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 스페인 처녀 마리아가 키스를 하려는 공화파의 요원 로버트 조던에게 하는 말이다. 지금은 다소 유치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당시엔 얼마나 가슴 설레는 대사였던지! -63쪽

ㅡ그럼 남자의 인생은요?
내가 웃으며 응대하자 그가 대답했다.
ㅡ그건 더 간단하지. 남자는 그냥 비위만 좋으면 돼. -75쪽

헤밍웨이의 전집을 처음 읽기 시작한 이후, 나에겐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그것은 대부분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생각해보면 인생이 늘 계획대로 진행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부지불식간에 무언가에 발목이 잡혀 이리저리 한 세월 이끌려다니기도 하는게 세상살이일 터인데 때론 그렇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가게 내버려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273쪽

나의이야기는 여기까지다. 하지만 삶은 멈추지 않게 계속되는 법이다. 내 앞에 어떤 함정이 기다리고 있을지 나는 짐작할 수 없다. 운좋게 피해갈 수도 있지만 자칫하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것에 대해 미리 걱정하느라 인생을 낭비하고 싶진 않다.
나는 언제나 목표가 앞에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 이외의 모든 것은 다 과정이나 임시라고 여겼고 나의 진짜 삶은 언제나 미래에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 결과 나에게 남은 것은 부서진 희망의 흔적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헤밍웨이처럼 자살을 택하진 않을 것이다. 초라하면 초라한 대로 지질하면 지질한 대로 내게 허용된 삶을 살아갈 것이다. 내게 남겨진 상처를 지우려고 애쓰거나 과거를 잊으려고 노력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겠지만 그것이 곧 나의 삶이고 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286쪽

여기서 나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헤밍웨이가 아기였을 때, 완벽한 문장으로 처음 한 말은 '나는 버팔로 빌을 몰라요'였다고 한다. 작가 그레이엄 그린이 처음 한 말은 '개가 불쌍해'였다고 알려져 있다. 역시 비범한 작가들은 뭔가 달라도 처음부터 다른 모양이다. 그렇다면 내가 완벽한 문장으로 처음 한 말은 뭐였을까? 그것을 말해줄 사람은 이제 세상에 없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는 나도 알고 당신도 알고 우리 모두가 안다. 그것은 틀림없이 다음과 같은 말이었을 것이다.
맘마.-287쪽

엄마 집으로 들어와 살게 되면서 새삼 깨닫게 된 것은 엄마에 대해 내가 아는 바가 별로 없다는 사실이었다. -2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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