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생활백서 - 2006 제30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박주영 지음 / 민음사 / 2006년 6월
절판


인간은 살아 있기 때문에 집을 짓는다. 그러나 죽을 것을 알고 있기에 글을 쓴다. 인간은 무리를 짓는 습성이 있기에 모여서 산다. 그러나 혼자라는 것을 알기에 책을 읽는다. 독서는 인간에게 동반자가 되어준다. 하지만 그 자리는 다른 어떤 것을 대신하는 자리도, 그 무엇으로 대신할 수 있는 자리도 아니다. ― 다니엘 페낙, 『소설처럼』중에서-간지쪽

오늘 서점에 간 나는 딱 두 권의 책을 샀다. 그 책 중의 한 권은 오늘이 가기 전에 다 읽게 되겠지만 또 다른 한 권은 읽지 않은 채 둘 것이다. 그러고는 가끔 페이지를 들춰보면서 상상할 것이다. 내가 아직 가보지 못한 세상을, 그 안에서 숨 쉬는 인간들의 욕망을.-10쪽

모든 것이 이미 결정되어 있겠지만 내가 읽지 않는 한 그 세상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 세상의 존재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채 내 손안에 있다.-10쪽

여전히 살아 있음에 유효한 희망 사항이 있다.-10쪽

내가 산다고 하지 않고, 구한다고 표현하는 책은 오래 전에 절판된 책이다. 뭐 그렇다고 희귀본이라거나 그런 건 아니다. 다만 이제는 서점에서 반질반질한 모습으로 만나볼 수 없는 책일 뿐이다.-13쪽

지금 이 상태가 최상은 아니지만 나빠질 가능성보다는 나아질 가능성이 많다. 시간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아주 많은 문제는 지나고 나면 늘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그러므로 나는 기다리지도 소원하지도 노력하지도 않는다. 다만 책을 읽고 또 읽을 뿐이다. 이것이 내 방식이다.-22쪽

나는 단 한 번도 젊음을 부러워해 본 적 없다. 나에게 젊음은 어리석음이나 무모함과 동일하다. 어서 나이를 먹어서 최소한 서른 살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꿈꿀 수 있는 일도 아주 줄어들 것이고, 더 많은 책을 읽었을 것이며, 세상은 더 만만해져 있을 것이다.-33쪽

나는 영화광은 아니지만 극장은 좋아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영화가 막 시작됙 직전 손님들이 자리를 쉽게 찾을 수 있도록 비춘 엷은 불빛이 완전히 사라지고 대형 스크린과 비상구의 등만이 보이는 그 순간이 좋다. -57쪽

막연한 것, 실현 가능성이 없는 것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게 되는 것. 그것이 스물을 향해 가는 이들과 서른을 향해 가는 이들의 차이인지도 모른다. 서른을 향해 가면서도 나는 아직 막연한 것, 실현 가능성이 없는 것에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건 아닐까.-61쪽

나는 내가 제대로 하지 못할 일은 시작하지도 않는다. 즐겁고 행복한 일이 아니라면 집착하고 싶지 않다. 좋아하지도 않는 것에 열광하는 척하면서 인생을 낭비할 수는 없다.-63쪽

나는 그냥 좋아하는 책을 읽을 뿐이다. 막연하긴 하지만 책을 읽고 있는 순간만은 적어도 내 삶이 허무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현재로서는 책이 나를 계속 살아갈 수 있게 하고 살고 싶게 만든다는 것밖에는 알지 못한다.-79쪽

오직 나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듯한 사람이 세상에 있다면 아마도 오직 나만을 위해서 쓰인 듯한 책도 있지 않을까. 나는 어쩌면 그런 책을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95쪽

누군가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나는 늘 안도한다. 뭔가가 빠져 있는 듯한 삶이지만 그걸 굳이 채우려고 발버둥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그럴듯한 애인도 없이 자랑할 만한 직업도 없이 살고 있지만 나에게는 책이 있다. 추운 방에서 홀로 책을 읽으면서 지내도 누구보다 행복할 자신이 있다. 이 세상 어떤 누구보다도 행복한 표정으로 지낼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115쪽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걸 알고 있으므로 나머지는 의미없다고 여긴다. 가질 수 있을 때까지 미루거나 참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은 내게 없어도 되는 것이다.-115쪽

더 이상은 추락할 곳도 없다. 왜냐하면 나는 올라간 적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실패도 모른다. 무얼 바라고 희망해야 실패란 것도 있는데 그런 적이 없다. 그런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너무 오래되어 기억도 나지 않으니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131쪽

그때나 지금이나 내 유일에 가까운 희망은 편안하게 책이나 마음껏 읽으며 사는 것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점점 유토피아가 되어가고 있다. 불가능하다는 뜻의 유토피아. 뭔가 해야 한다.-138쪽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게 하기 위해 변해야 한다. 이것은 쉽고, 불가능하고, 어렵고 해볼 만하다. (쉼보르스카, 여인의 초상)-168쪽

붉은 해파리들이 떠난 바다는 아주 멀고 넓을 것이다. 내가 떠날 수 있는 가장 먼 곳은 어디일까.-171쪽

영화에서처럼 인생에서 멈추어 기다려야 하는 때와 움직여 가야 하는 때가 있을 것이다. 가라는 지시는 오래전에 내려졌는데 지금 여기서 도대체 무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주인공의 말처럼 나도 내가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사실은 지금이 기다려야 할 때인지 가야할 때인지조차도 모르겠다.-171쪽

책을 이해하는 것은 쉽다. 책은 이미 한 사람을 완전히 통과해서 정리된 기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작가처럼 일관된 어조로 자신을 설명할 수도 없고 상황을 묘사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떤 마음일지 다만 짐작할 뿐이다.-177쪽

어떤 사람들은 처세술에 관한 책을 읽기 좋아하는데, 정말 현명해지려면 소설을 읽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처세술에 관한 책은 결론을 가르쳐주지만 소설은 결론으로 나아가도록 생각하는 법을 몸에 배게 해준다. 스스로 생각하여 얻은 결론만이 인생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189쪽

좋아하는 책을 함께 이야기하는 것은 즐겁다. 싫어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그런 부류는 아니다. 그리고 책에 관해서라면 내가 싫다고 말하는 것은 정말 싫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완곡한 표현으로 예전보다 좋지 않다는 뜻이다. 내가 끝까지 다 읽은 책에 대한 내 태도는 그렇다. 싫으면 나쁘면 마음에 안 들면 더 이상 읽지 않는다. 세상에 책은 많다. 책은 사람처럼 죽지도 않고, 한 사람이 아주 여러 권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그러므로 마음에 들지도 않는 것을 가지고 버티는 끈기는 무모하고 무가치하다.-192쪽

저런 건 저 나이에 제일 잘 쓸 수 있는 얘기잖아. 너도 네 나이에 잘 쓸 수 있는 이야기, 아니 네가 잘 쓸 수 있는 게 있을 거야.-197쪽

내게 가능성은 언제나 둘이었다. 죽음 혹은 책 읽기. 그 가능성 가운데 늘 책 읽기를 선택해 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281쪽

책을 소유하는 가장 바람직한 방식은 그것을 쓰는 것이라고 발터 베냐민은 썼다. 나는 책을 소유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이 소설에는 내가 좋아해 마지않는 것들이 아주 많이 포함되었다. 쓰면서도 읽는 것이 더 즐거울 때가 많았다. 하지만 읽는 것보다 쓰는 것에는 더 많은 자유가 있었고, 나는 그 자유가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이 소설을 쓰는 동안 나는 읽는 것보다 쓰는 것이 더 재미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느낌을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다.-3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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