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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0년 10월
평점 :
이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데에는 TV광고에 소품으로 등장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겠지만, 굳이 그런 외적인 요인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많이 팔릴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는 '물건'임에는 틀림없다. 이야기 전개나 문체가 매끈하고 주인공들의 개성도 충분히 살아있다.
그런데 소설을 읽는 내내 막연한 삭막함을 느꼈다. 작가는 분명히 사랑을 이야기하겠다고 했지만 흔히 이야기되는 '따뜻한 사랑'따위는 소설에 등장하지 않는다. 소설에 묘사되고 있는 것은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인간 군상들간의 단절, 그에 따른 외로움, 거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무의미하고 가망없는 노력, 또는 체념들뿐이다. 결국 사랑이라는 것의 본질이 이런 것 아니겠냐는, 작가의 자조적인 음성이 문장 곳곳에서 묻어나오는 것 같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처음 읽어보았기 때문에 작가가 원래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는 지는 모르겠지만, 수시로 등장하는 적나라한 성행위의 묘사도 그 한계성이 절실하게 느껴졌다. 성행위도 결국은 외로움을 잊어보려는 한가지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작가가 자신의 주의주장을 전이시킨 대상은 주인공인 '나'와 '미도리'로 판단된다. 이들은 마치 자신과는 상관없는 것인양 세상을 관조하면 가끔씩 냉소적인 시선을 던지곤 한다. 가장 적나라하게 비웃음을 당하는 대상은 대학 내에서 가장 활동파라 할 수 있는 운동권 학생들이다. 운동권학생들의 이중성, 자아도취에 대한 작가의 생각은 비웃음을 넘어 경멸에 가까운 것이다. 이는 작가가 가지고 있는 비사회성과 회의주의, 개인주의적 성향을 반증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소설을 끝까지 읽어보아도 사랑의 감동 따위는 없다. 사랑을 쟁취한 미도리에게 축하한다는 이야기를 해줄 마음도 생기지 않는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사랑의 결과물이란 '행복'을 얻었다기보다는 '고통'이 약간 덜어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완전히 격리된 객체들이 자신의 고통을 덜어보고자 시도하는 것이 '사랑에 빠지는 것'이며, 뒤집어 말하면 사랑이고 뭐고 간에 결국은 나는 나, 혼자일 뿐이다.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주인공 혼자 흐릿하게 서 있는 마지막 장면은 그래서 이 소설의 분위기를 압축하는 상징이다. 과연 주인공이 자신의 실존을 자각하며 타자들과의 관계에 눈을 뜨며 살아가게 될지, 체념과 우울증에 빠진 자기중심적 인간으로 살아가게 될지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다른 소설들을 읽어보아야 가늠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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