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의 제국주의 - 오리엔탈리즘과 중국사
폴 코헨 지음, 이남희 옮김 / 산해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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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헨이 저술한 "학문의 제국주의"는 미국에서 이뤄지는 중국사 연구에 대한 사론을 담고 있다. 그에 따르면 미국에서 행해지는 전통적인 중국사 연구는 철저히 중국을 타자화한, 오리엔탈리즘에 입각한 것이다. 내용에 따라서 세 종류의 패러다임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그 첫번째는 '충격과 반응', 두번째는 '근대화론', 세번째는 '제국주의론'이다.


'충격과 반응'의 핵심은 중국 근대사가 능동성으로 대표되는 서구의 충격에 대해서 수동성으로 대표되는 중국이 반응한 결과물이라는 개념이다. 이를 바탕으로 '근대화론'이 구성되는데, 서양의 충격이 있기 전의 중국은 변화와 개혁이 전무한 정체된 사회였고, 서양의 자극으로 비로소 근대로 발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세번째 제국주의론은 '근대화론'에 대한 적극적인 비판의 입장에서 제기되었는데 서양이 감행한 자극은 오히려 중국의 근대화를 방해하는 부정적인 결과를 낳았다고 주장한다.


코헨은 위의 세 입장을 모두 비판하고 있다. 특히 세번째 제국주의론은 기존의 '근대화론'과

대립각을 세우며 형성한 이론임에도 서양의 자극 이전의 중국을 정체된 사회였다고 보고 있다는 점에서 근대화론과 같은 기반 위에 서 있다고 지적한다. 코헨이 궁극적으로 제시하는 방법론은 중국사를 내부에서 바라보자는 것이다. 자료들을 실증적으로 검토해 보면 중국의 역사는 결코 정체된 것이 아니었고, 중국 근대사의 전개 과정에 있어서 서구의 역할은 실제 이상으로 과장되어 왔다는 것이다.


외부자 -그것도 우월감을 바탕으로 대상자에 영향력을 행사했던 - 의 시각 대신 내부자의 시각을 반영하자는 저자의 주장은 타당하다. 적절한 균형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코헨의 주장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해결해야 할 문제점은 여전히 남아있다.


무엇보다 근대의 성립 요건에 대한 명확한 정리가 필요하다. 저자는 서구의 자극이 중국 근대사 전개에 미친 역할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하며 중국사의 자체적인 변화를 이야기하지만 그 변화의 실체가 무엇인지 모호하다. 서구의 자극이 가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진행되었다는 중국의 내부적 변화는 산업화와 민주정 확립으로 대표되는 근대화로의 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는가? 즉, 서구의 자극이 없더라도 중국이 자본주의화의 길을 걷거나 더 나아가 사회주의 혁명을 수행했을 수 있었다고 보는가? 혹 ‘자본주의와 민주정의 확립’을 근대의 요건으로 규정하는 것 자체가 서구 체제의 우월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런 편견에서 벗어난 근대상은 과연 무엇인가?


이 질문에 쉽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본다. 걸어보지 못한 길의 풍경을 묘사해보라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이 독자적으로 걸어가려 했던 역사의 방향성에 대한 검토를 거치지 않고 서구의 충격이 지니는 역사해석상의 무게를 덜어내는 행위는 자칫 무책임한 것이 될 수 있다. 이는 앞으로 섬세하고도 실증적인 자료 분석을 통해 극복해야 할 난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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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무라카미 류 지음, 한성례 옮김 / 동방미디어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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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동냥으로만 듣던 책을 이제서야 읽게 되었다.

등장 인물들은(화자를 포함해서) 예외 없이 폭주하고 있다. 과연 젊은 작가가 쓸만한 소설이라는
생각은 든다. 이 소설을 쓸 당시의 무라카미 류는 20대 초반이었다고 했던가? 고개가 끄덕여진다.
내가 그다지 일본 문학을 많이 읽어보지는 않아서 함부로 말할 수는 없지만 그네들 정서가 원래
감각과 이미지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인 것 같고, 이 책 역시 그러한 부류에 들어가는 것 같다.

말 많은 퇴폐적 장면 묘사 등이야 문제될 게 없다. (19세 미만에게 판매 금지라는 딱지에 실소
한번) 그러나  나는 '폭주하는 젊음' 같은 소재로 밀어붙이는 식의 글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더 어렸을 때 읽었다면 어땠을 지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몸만 성장한 채 칭얼대는 '어린 영혼'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낄 수가 없다. '여기가 어디냐', '돌아가고 싶다'는 식의 한탄도 영 가슴에 와닿지
않는다. 신선한 맛도 없고. 하기사 이 소설이 발표된 것도 꽤나 오래전  이야기니까...

무라카미 류가 쓰는 소설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은 사람은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그러나
쉴 새 없이 마약을 하고 난교를 하고 토하는 장면들이 이어지는 가운데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나?
(윤리적인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난 이 도식적인 집합들 속에서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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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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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전쟁 특수(?)로 많은 전쟁 관련 서적들이 기획되고, 또 팔리고 있는 것으로 안다.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은  전쟁사진이라는 주제를 통해 그러한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수전 손택은 다른 이의 고통을 '바라보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사진을
통해, 혹은 TV 화면을 통해 전쟁의 참상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적
으로 내 일이 아니다. 나와는 무관한 머나먼 곳 어디에선가 일어나는 일에 불과하다.
이는 과거에 비해 현대인들의 윤리성이 타락했기 때문이 아니다. 애시당초 우리는
남의 고통을 즐기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고통이 나의 것이 아닐 경우, 우리는 그것을
관조하며 어두침침한 쾌락을 얻는다. 나는 저곳에 있지 않다. 나는 안전하다.

신체가 부서지고 영혼이 짓밟히는 고통도 그것이 나의 것이 아닐 경우 충분히 미적
감상의 대상물이 될 수 있다. 부서짐의 미학이 작동하는 것이다. 고통받는 이들을
철저히 타자화하면서 우리는 그렇게 변태적인 미감을 즐긴다. 안됐다느니, 불쌍하다
느니 하는 감정 또한 일종의 감상에 불과하다. 그것은 어쩌면 영화관에서 슬픈 영화
를 보며 느끼는 감정과 비슷할 수 있다. 영화관을 나서며 '너무 슬퍼서 좋았어.'라고
내뱉는 것처럼...

어째서 전쟁은 없어지지 않는가? 아니, 없어지기는 커녕 매일같이 뉴스와 신문 지면에
끊임없이 등장하는가? 모르겠다. 어쨌건 고통받는 이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이 그저 '구경
거리가 되는 것'은 아닐터이다.

* 덧붙임: 책 중간중간에 전쟁 관련한 사진들이 많이 실려 있다. 신체 훼손 사진도 꽤
있으니 신경이 너무 가는 사람은 조심하는 게 좋을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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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포토저널리즘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 시선 <타인의 고통>
    from 風林火山 : 승부사의 이야기 2007-08-07 03:56 
    타인의 고통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이후(시울)전반적인 리뷰2007년 8월 5일 읽은 책이다. 이 책의 리뷰를 적으면서 처음 안 사실이 지금 현재 내가 갖고 있는 책의 표지와 지금의 표지가 다르다는 것이다. 뭐 이 책의 발간일이 2004년 1월이긴 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에는 이 책이 다루고 있는 것을 보면 기존의 책 표지 자체도 타인의 고통을 드러내는 그림이었기에 이 책에서 얘기하고 있는 바와 약간은 상충되는 부분도 없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
 
 
 
기초한문독해법
최완식 외 지음 / 명문당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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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와 한문은 다르다.
'한자검정시험'으로 대표되는 한자 공부는 일종의 어휘 공부다. 어휘를
풍부하게 하고 생활 용어를 읽고 쓰는 데에는 도움이 될 지 모르지만, 이것만
으로는 오랜 기간 우리 조상들의 정신셰계를 구성했던 고전에 접근할 수 없다.
고전을 읽기 위해서는 한문 공부를 해야만 한다.

그러나 한문은 영문법 등에 비해 문맥에 따른 해석의 여지가 넓고 체계적이지 못한 점이
있어 초심자가 골탕을 먹기 일쑤다. 국내에서 한문 문법이 체계적으로 정리된 책을 찾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본 책은 대단히 만족스러운 내용을 담고 있다. 애매한 한문법이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어 공부하기에 편할 뿐더러 풍부한 고전 예문들은
독자에게 충만감을 주기 충분하다. 뜻이 있어 한문 공부를 시작하는 사람이
읽는다면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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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문명의 아버지 고선지 평전
지배선 지음 / 청아출판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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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제목에서 멈칫하게 된다.

고선지가 유럽 문명의 아버지라... 이건 좀 너무 나간 것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본문으로 들어가면 제목에서 느꼈던 우려가 기우가

아님을 알게 된다.


고선지에 대한 저자의 애정은 대단하다. 한 인간의 삶을 하나하나 더듬는 작업을

하다 보면 그에 대한 애정이 생기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책은

애정이 지나쳐 평전으로서 가져야 할 품위를 감쇄시키는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역사적 업적을 쌓은 인물의 인품이 반드시 고매할 필요는 없다. 세계 제일의

제국을 세운 칭기스 칸은 잔인하고 여색을 밝히며 엉뚱하게도 개를 무서워했

다고 한다. 아메리카를 ‘발견’한 콜롬부스는 광신(狂信)에, 비열했으며 욕심

사나운 인물이었다고 한다. 소위 역사를 움직인 위인이란 자들은 오히려

‘악하고 독한’ 인물들이었을 수 있다. 이러한 점들을 낱낱이 밝히는 것은

화려한 커튼 뒤에 숨겨진 위인의 면모를 드러내고 한 사람의 인간으로써

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따라서 고선지에 대한 기록에 그의 잔인하고 탐욕스러운 성품이 서술되었다고 해서

이에 대해 정색을 하고 반박하는 것은, 어쩐지 불필요해 보인다. 여기에

탈라스 전투에서의 패배조차도 고선지의 잘못이 아니라는 식의 싸고도는 어조는

저자가 객관적이고 균형잡힌 시각을 가지고 있는지 의심하기 충분하다.


다른 무엇보다 저자는 ‘유럽 문명의 아버지’라는 감당하기 힘든 칭호에 걸맞는 고선지의

업적을 제시하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고선지는 유럽이라고는 구경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가 유럽에 미친 영향이래봐야 탈라스 전투에서의 패배로

제지 기술 등이 아랍을 통해 유럽으로 전해졌다는 데 있다. 그러나 이는 결코 고선지가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몇몇 발명품의 간접적 전파를 두고 ‘문명의 아버지’를 운운한다는

것 자체가 유럽 문명에 대한 컴플렉스를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굳이 이들 발명품을 유럽 문명과 연결시키고자 한다면 오히려 '중국은 유럽 문명의 아버지'

라는 표현이 설득력 있으리라.


전체적인 논조에서 균형감을 잃고 있지만 쉽게 읽히는 문장과 원색 그림들, 자료 소개

등은 훌륭하다. 어차피 책을 읽는 행위는 일방향이 아닌만큼 독자가 적절히 걸러서

읽는다면 뜨거웠던 8세기 중앙아시아와 그곳을 누볐던 고구려 유민 고선지를 느끼

기에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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