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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마리오네뜨
권지예 지음 / 창비 / 2002년 1월
평점 :
"날 사랑해"
"응"
"정말"
"응"
"곧 후회하게 될거야"
"네가 사랑한 나는 뭐니? 이래도 날 사랑할 수 있니?"
소설집 마지막 작품인 [사라진 마녀]에 나오는 대사의 일부분이다. 이 부분을 읽을 때는 다른 활자를 볼 때와 달리 내 경험과 일치되어서 소설을 읽는 거 같지 않다.
한 번 들은 것도 아니고
여러번 반복해서 이 말을 들었다.
내가 왜 자기를 좋아하는지 모르겠다고...
그리고는 항상 자기의 성격을 이야기하며 이래도 날 사랑할 수 있냐는 식이다.
상처로 외로워서 자기 자신을 방어하는 듯이 보이더라.
혹시, 자신이 나를 사랑하게 될까봐 두려워서.....,
사실 내가 겁내하는 건 따로 있다.
집착하는 듯이 매달리다가 그냥 돌아서 버릴까봐서 나는 내 자신을 위로하고 마음을 다스리면서
또 다른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해설) - 사랑의 소멸과 시작 - 백지영
"삶의 법칙은 늘 인간의 의지와 어긋나는 것이며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운명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 뿐이다."
빠리에서 지낸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들을 구성했다.
나도 빠리를 다녀왔다고 그 지명들이 낫설지 않고 어렴풋이 .....,
다시 그 도시를 유영하고 싶다.
불현듯, 외국에서 살아보고 싶은 꿈이 머리에 와 앉는다.
지금은 아니다.
하지만 그 때를 준비해야 하긴 하겠다.
치열하게 삶을 살았다면 그것을 바탕으로 자기의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이다
권지예의 소설을 읽으면서 든 생각이다.
소설집 마지막에 실려 있는 [사라진 마녀] 부터 찾아 읽게 되었다. 두번 째 읽는 것이 맞는 걸까 의문이 들 정도로 새롭게 읽히는 문장들이 속속 박혔다.
"너와의 사랑 ....., 그것도 사랑이라고 불러야 하는지 ....., 마치 한 순간의 신기루 같았지. 신기루는 그냥 환영일 뿐이잖아. 하지만 신기루는 사람의 마음이 간절할 때만 나타나거든."
헤어지고 나서 생활에 적응하기 힘들 때 이런 생각이 들었던 적이 있었다. 아마도,
사랑이라는 감정의 풍요가 사라진 후에 나타나게 되는 허탈함 같은 게 아닐까 싶다.
그녀를 떠 올려 보면 이 보다 더 적절한 문구가 없어 보인다.
"다시 만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왠지 만나선 안될 거 같았다."
이 문장을 읽고 흔들리는 마음을 부여 잡을 수 있었다.
그녀에게 다시 연락을 한 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 당시의 감정이 되 살아날 것도 아닐텐데 말이다.
그래도, 자꾸 그녀가 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말이지.
젠장할.....,
"우먼이 아닌 휴먼으로 살고 싶었을 뿐이야. 이렇게라도 살아 있는 내가 얼마나 지독한지 .....,"
[투우] 라는 단편을 읽으면서도 포스트 잍을 찾게 된다.
"예술은 노동의 아들이지 유희의 아들이 아니래. 나는 그 말 믿어. 예술가도 노동자일 뿐이야"
이 문장을 두 번, 세 번 되뇌여 보았다.
정말, 그런 걸까?
"산다는 건, 세상의 빠져나오지 못할 올가미에 갇힌 줄도 모르고
생피를 흘리는 투우와 무엇이 다를 것인가."
이 글의 마지막은 단편 [사라진 마녀]에 나온 문장으로 끝마쳐야 겠다.
"청춘이 제일 고통 스럽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