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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나의 민원인 - ‘외곽주의자’ 검사가 바라본 진실 너머의 풍경들
정명원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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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고 지쳤을 때 나를 돌봐주는 따뜻한 사람, 엄마이고 누나이고 친구같은 그런 사람. 염라대왕같은 이미지가 아니라 늘 옆에 있을 것 같은 사람. 그런 사람같은 검사 이야기입니다. 검사도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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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것들은 산 뒤에 있다
김용택 지음 / 창비 / 199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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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은 그런 사람이었다. '용태가!!!"라고 불렀을 때 씨익 웃으며 뒤돌아볼것 같은 정겨움이 그의 책에는 묻어있다.

진메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는 나를 어릴적 추억에 잠기게 한다. 김용택 시인은 나와 20여년 가까운 세월의 차이가 있음에도 그를 통해 나의 어린시절 시골동네의 모습은 생생하게 떠오른다.

초등학교 2학년때 서울로 떠나가 전까지 우리마을의 풍경은 그대로 '진메마을'과 같았다.

동네에서 돼지 잡는 날의 풍경도 분명히 우리마을에 있었고, 진메마을의 '그분'처럼 한방에 돼지를 보내지 못하여 논뚝으로 떨어져 울부짓던 돼지의 모습이 지금도 또렷이 기억나고, '인간 박한수'처럼 입이 걸면서도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는 어른과 '문계선씨'처럼 뒷짐지고 참견하며 왁자지껄한 동네분위기를 만드는 이도 또한 분명히 있었다.

김용택 시인의 어머니처럼 허를 찌르는 먹을 것 감추기에 나와 형, 동생은 그 숨겨진 달콤함을 찾기위해 숨바꼭질했던 기억들!

어느 땐가 형과 나는 할머니와 어머니가 집안일에 열중하고 있는 틈을 타 우리들 손이 닿지 않는 선반위에 놓인 '활명수'한병을 발견하고 단숨에 들이켰다. 그때만 해도 활명수가 약이라기 보다는 달콤한 음료수로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할머니가 우리를 발견하고 활명수 병에 담긴 '파리약'을 이놈들이 먹었다며 걱정하면서도 혼이 나고, 우리는 울면서 토하지 않으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계속 헛구역질을 해내던 기억도 새롭다.

아이스께끼 장사를 졸졸 딸아 다니며 녹아 흐르는 물을 손으로 받아 먹던 달콤함, 겨울에 꽁꽁 언 좁은 둠벙안에 빽빽히 모여 얼음을 지치던 일, 여름철 소금쟁이 잡다 물에 빠져 허우적 대는 형을 보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울고만 있던 기억, 학교갔다 오가다 형이 물빠진 저수지에서 '잉어'를 잡아(줏어다가) 고무신에 담아 할머니께 가져다 드린 일 등 그 어릴적 추억이 주마등 처럼 스쳐간다.

김용택의 책에는 그 어떤 풍경화보다 더욱 생생한 시골모습과 동네사사람들이 등장한다. 태어나고 자란 고향을 떠나지 않고 그곳에서 순수한 아이들을 가르치고, 가진 것에 불만없이 주어진 삶을 즐기고 있기에 그런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글빨이 생겼으리라...

진메마을 사람들의 정겨운 말투가 여전히 귓가에 맴돌며 나를 웃음짓게 한다. 




   
  사람은 밥을 많이 먹어야 똥을 많이 싼다.

좆도 씨벌, 일도 안하면서 니기미 잔소리는, 아 빨리 일이나 혀~

눈감아라, 눈감아라~

이거 튀밥 아니랑께, 이거 누에고치여~

자네는 인자 몇학년인가?/ 네. 인자 고등핵교 졸업합니다/ 그려 글먼 인자 중핵교에 가야겄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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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부패사건에 휘말리다 - 조말생 뇌물사건의 재구성
서정민 지음 / 살림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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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현직 검사의 시각에 역사의 한 장면은 어떻게 비춰졌을까하는 흥미로움으로 책을 들었다.

우의정,부원군,병조판서(조말생),공조참의 등 조정 최고 권신들이 김도련이라는 사람으로부터 노비를 수십명씩 증여받았다는 상소가 날아 드는 장면으로 책은 시작한다. 

조말생은 당시 병조판서를 지내고 있던 사람으로 소위 '고속 승진한 엘리트 관료'였다고 저자는 말한다. 조말생은 뛰어난 학문과 문장력으로 과거시험에서 으뜸을 보이며 명나라에도 여러차례 다녀오는 등 국제적 면모도 갖춘 사람이었다.

실록에 따르면 조말생은 태종 이방원의 총애를 받았고, 양녕대군이 세자에서 폐위되고 세종이 되는 충녕대군에게 양위할 무렵인 태종18년(1418년)에는 병조판서의 자리에 올라 병권을 총괄하게된다. 그 이전에는 국왕의 비서실장격인 지신사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조말생은 세종 3년(1421년) 태종의 딸 정정옹주와 맏아들 조선이 혼례를 치르도록 함으로써 왕실과 인연을 맺고 더욱 막강한 권력을 갖게된다. 세종4년에 태종이 사망하여 조말생은 나이가 50에 이르고 풍병이 있으니 사직을 허락해달라고 세종에게 청하였으나 세종은 집에서 쉬며 쉬엄쉬엄 일을 보라는 특혜를 부여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앞서 언급한 '김도련'은 노비소송을 대부분 승소하였고, 그 과정에서 유리한 결과를 보장하는 대가로 고위관료들에게 노비를 뇌물로 지불하는 로비스트였던 것이다. 과도한 승소에는 필연적으로 권력이 개입하였을 것이라는 의심을 갖게한 것이다.

사헌부에서 김도련을 수사한 결과 조말생이 김도련의 부탁으로 노비소송 담당 부서인 형조와 노비변정도감의 담당관리에게 유리하게 판결해 줄 것을 청탁하고 그 대가로 노비 24명을 증여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우의정, 곡산부원군, 형조참의 방장정량 등도 이에 연루되어 있었다.

책을 읽다보니 최근 우리사회를 떠들썩하게한 조모 고법부장 등이 연루된 법조비리 사건이 얼핏 생각나기도 한다. 잘못된 역사도 되풀이되는 것인가?

어쨋든 사헌부의 탄핵상소를 세종이 받아들였고, 조말생은 직첩을 빼았기로 귀향길에 오르게 된다. 그 사이 세종은 이 사건을 철저히 조사할 것을 사헌부에 지시하고, 그 결과 조말생에게는 매관매직, 직권남용 등의 혐의가 추가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조말생의 아들 조선이 사헌부 총수인 대사헌 김악정의 집에 노복을 보내어 동태를 감시하기도 하는 등 수사권자의 도덕성에 흠집낼 일을 획책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행태 또한 요즘 검찰이 사회적으로 파장이 큰 사건 수사를 하는 경우 자신의 범행을 은폐하기 위하여 수사검사를 음해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점에서 과거나 지금이나 그 작태는 변함이 없는듯 하다. 대선후보가 주가조작 등에 연루되었다는 정치권의 의혹이 고발로 이어져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옵셔널벤처스 주가조작사건에서도 김**는 수사검사가 대선후보를 보호하기 위하여 자신을 회유,협박하였다는 터무니 없는 주장을 하여 결국 수사검사에 대한 탄핵소추발의까지 이루어지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최근 있지 않았는가?

다시 책으로 돌아가 조말생의 범죄는 당시 법률인 <대명률>에 따르면 죄명은 "장오죄(贓汚罪)"중 "왕법수장"에 해당하고, 받은 뇌물의 수량에 따라 처벌되는 형량이 "교형" 즉 사형에 해당하는 것이어서, 사헌부는 조말생을 사형에 처하고 장물을 몰수할 것을 세종에게 건의한다. 그러나 세종은 한단계 낮은 등급인 "유형"을 선택하여 판결을 하였다.

이에 수사책임자이던 사헌부 집의 정연은 다음과 같이 세종에게 고한다.

   
  깊이 생각하건대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반드시 상을 주고, 죄가 있는 사람에게 반드시 벌을 주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큰 원리입니다. 한사람에게 상을 주어 천만 사람을 권장하고 한사람에게 벌을 주어 천만 사람을 두렵게 하는 상벌이 밝지 못하다면, 사람을 권장하고 징계하는 것이 없어져 법은 점점 쇠퇴해질 조짐을 보일 것입니다  
   



이러한 상소에도 불구하고 세종의 생각이 바뀌지 않자 사헌부 관원들이 집단으로 세종을 알현하고, 연이어 사간원에서도 조말생을 엄히 처단할 것을 대간하였으나, 세종은 중용론 또는 조종성헌(일종의 관습법) 등의 논리로 자신의 입장을 관철한다.

이 과정에서 법규정상 사형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음에도 세종이 다른 논리를 들어 조말생의 처벌을 한단계 낮춘 것에는 세종이 사형의 선고에 극도의 신중함을 보여주고 있는 면도 있으나, 논리적인 면에서는 대간들의 엄벌논리가 더욱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결국 조말생은 2년의 귀향생활 끝에 세종10년(1428년)에 전격적으로 사면을 받게 된다. 오늘날에도 대통령이 전권으로 행사하는 특별사면은 남용의 여지가 있어 적정성 여부를 두고 많은 논란이 있다.

세종의 사면도 대명률에 따르면 사면제외 대상에 대하여 사면을 행한 것으로 결국 법률에 위반된 사면인 것이다. 이에 사헌부에서는 사면은 국왕의 고유권한인 만큼 존중하되, 서울.경기지역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거주를 제한할 것을 건의하였고 이러한 건의는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다시 세종은 조말생의 직첩을 돌려줄 것을 명하여 논쟁의 불씨를 집힌다. 세종12년(1430년)의 일이다. 사건원, 사헌부 양사에서 동시에 상소를 하며 들고 일어나는데 우사간 변계손은 다음과 같이 상소한다.

 



 
   
  상벌은 국가의 중대한 법이고, 염치는 선비의 기풍을 세우는 중요한 절개입니다. 상벌이 적중하지 못하면 옳은 일을 권하고 나쁜 일을 징계하는 길이 밝지 못하고, 염치의 도리를 잃으면 탐오한 풍습이 날로 일어날 것입니다..............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직첩을 도로 주라고 하신 명을 급히 거두시고 종신토록 자격을 가지지 못하게 하여 선비의 기풍을 바로잡고 후세를 경계하게 하옵소서
 
   
오늘날에도 비리정치인에 무차별적 사면복권이 자칫 국가의 기강을 문란하게 할 우려가 있어, 사면이 이루어질 때마다 항상 조선시대와 같은 논쟁이 벌어지는 것을 보면 아이러니하다.

어쨋든 계속된 이들의 주장은 조말생의 죄는 중신불서용에 해당하므로 평생 직첩을 돌려주지 아니하여 관리로 쓰지 않음이 타장하다는 것이었다. 세종은 이에 무응답으로 응수하였다. 결국 20여일 정도 지난후 고신만 돌려줄 뿐 벼슬을 주지않는 것으로 1차 논쟁은 마무리가 된다.

그러나 세종은 그로부터 2년후인 세종14년(1432년) 조말생을 동지중추원사에 제수함으로써, 2년의 유배생활, 2년의 자중기간을 거친후 다시 공직에 등용을 하였다. 동지중추원사는 종2품직으로 파면 직전 정2품의 병조판서보다는 한등급 낮은 직책이다.

다시 논쟁은 시작되었다. 이번에도 보다 포괄적으로 관료의 부패와 국왕의 인사권이라는 두가지 개념을 두고시 치열한 논리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사헌부 집의 이견기는 세종과 치열한 논쟁을 전개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조말생의 죄목은 사책에도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무런 공도 덕도 없는 말생에게 갑자기 작명을 제수하셨으니 역사의 기록을 보고서 후세 사람들이 어떻게 보겠습니까. 어떤 대신이 전하께 말생을 쓰자고 논의하였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말생을 다시 쓰자고 의논한 자도 또한 탐묵의 무리라고 이르겠습니다. 신둘은 국가의 도리를 튼튼히 하여 조정에 보탬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전하께서는 말생의 벼슬을 거두어 조정의 기풍을 바로 하옵소서
 
   
여러번의 논쟁과정에서 세종은 흥분한 나머지 스스로 재결한 조말생 사건의 판결에 있어 장물 계산이 잘못되었다는 말실수를 함으로써 발목을 잡히게 된다.


 
   
  말생은 다만 노비를 받았을 뿐인데, 그때 사헌부에서 사람까지 아울러 장물로 계산하였으니 실로 너무 심하였다. 내 소견이 어쩌다 옳지 않을지는 모르나 경들의 청은 결단코 따르지 못하겠다.
 
   
왕과 대간들간의 논쟁으로 임금에게 정치적 부담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조말생은 왕에게 용퇴하겠다는 뜻을 피력하면서 슬쩍 자신의 억울함도 있다는 주장을 같이 하였고, 세종은 용퇴할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계속하여 이견기는 장리를 서용하지 않는 법은 법률에 뚜렷이 있다는 주장으로 조말생의 파면을 청하였고, 왕은 "권도"로서 행하였다는 말로서 성리학의 근본이념인 왕도정치가 아닌 패도정치를 하겠다는 말과 다름없는 주장을 하게 된다.


   
  신으로 하여금 이 직책에 있게 하시려면 말생을 내치시고, 말생으로 하여금 재상의 반열에 있게 하시려면 신을 파면하옵소서.
 
   
사헌부. 사간원 전 직원은 사직의사를 밝히며 왕을 압박하였으나 안정된 왕권과 뛰어난 학문적 성과를 바탕으로 고도의 정치술을 구사하던 세종과의 정치싸움에서는 패하고 말았다.

이후 세종15년 조말생은 함길도 관찰사에 제수되어 함경 남,북도 지역의 행정 사법권을 행사하는 자리에 오른다. 이에 대해 저자는 세종이 법치주의를 거스른 인사를 한 것을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실리주의자였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즉, 조말생의 8년간 병조판서롯의 경험, 명.여진 등 미묘한 국제정세속에서 외교감각을 갖춘 적임자로서의 소양, 적극적 대마도 정벌 주장 등에 대하여 높이 평가하여 세종의 자주국방의지를 뒷받침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결국 조말생은 시대적 필요성에 의하여 세종이 낙점한 유능한 원로이자 정치적 동지였다.
 
   
세종은 서북면에는 최윤덕을 동북면에는 조말생을 기용하여 여진족을 효율적으로 제압한 것이다. 이러한 점을 포함한 인재등용의 한계가 있었던 당시 시대적 상황 등에 비추어 보면 세종의 조말생 기용은 불가피한 측면도 있어 보인다. 오늘날에도 인재 등용시 실용을 중시하여 개인적 흠은 가벼이 여기는 경우가 있는데 그러한 등용이 적정했는지 여부는 후일에 평가가 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잠잠하던 논란은 두아들 문제로부터 시작되었다.

조말생은 세종의 신임을 얻어 예문관 수장인 대제학을 지낼 세째 아들 조근이 문과 한성시에 합격하였으나 조말생의 전과를 이유로 합격자 등록을 미루는 일이 발생하여 조말생이 상소하자 세종은 이와 같은 조치가 잘못되었다고 판단하여 조말생에게 힘을 실어주었고, 둘째 아들 조찬이 사헌부 감찰에 임명되었으나 사헌부로부터 서경을 거부당하는 일이 발생하자 아들 구명을 위한 상소를 하면서 오히려 자신이 범했던 장오죄의 무죄까지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는 일이 벌어진다.


 
   
  사헌부에서 병오년에 무고하게 얽어 놓은 죄상에 의거하여 아들의 앞길을 막사오니, 노년에 좋지 못한 꼴을 당하여 정확이 매우 박절하옵니다. 비옵건대 유사에 명령을 내리시어 신이 범장한  여부를 변명 해석하게 하옵소서.
 
   
조말생은 아들에 대한 구명을 빌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며 자신이 처벌받은 부패범죄 사실을 전부 부인하면서 오히려 사헌부에서 나쁜 감정으로 자신을 무고하였다는 대담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세종과 대간과의 대립구도는 조말생과 사헌부의 대립구도로 재편되었고, 결국 세종은 서경하라는 명령을 하면서 다만 유, 무죄에 대한 특별한 이유는 제시하지 아니한 채 사태를 마무리 짓는 수순을 밟았다.

책에 수록된 무죄주장 상소문을 읽어보니 오늘날 재판에서 피고인들의 수시로 무죄를 주장하면 제출하는 탄원서의 내용과 별 다를바 없다. 불충분한 증거조사, 수사기관의 수사절차에 대한 문제 제기, 대질조사를 요구하였으나 하지 않았다는 것, 사람(노비)을 장물로 계산한 것은 잘못되었다는 법리적 주장에 이르기까지....... 

조말생은 세종의 총애를 받으며 중추원의 최고직인 정1품 영중추원사에 이르렀으며, 세종은 그의 나이 70세 되던 해에 노신을 예우하는 궤장연까지 베풀어 주었다. 적어도 세종은 말생의 허물을 가려주고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요직에 등용하였고, 말생은 이러한 세종의 뜻에 따라 능력을 발휘하였으나 부패관료라는 오점때문에 영.판.지 의 중요직책에는 오르지 못하였다.

저자는 세종의 이러한 태도가 결국 옳았다며 정치적 대립을 통합으로 이끌고 상생정치를 실현하여 성공한 국가경영자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독자로서는 세종의 이러한 태도보다는 대간들의 목숨을 건 비판과 직언에 더욱 무게를 두고 싶다. 

대간들의 직언과 상소가 이어지지 않았다면 세종은 선대로부터 이어내려온 조말생과의 인연을 사사로이 여겨, 그릇된 판단으로 법치도 실리도 그 어느것도 챙기지 못하는 어리석은 판단을 했을 지도 모를일이다. 지금 공직자들에게 요구되는 고도의 도덕성의 관점에서 보면 조말생이 오늘날 정부요직을 차지하기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검사인 저자가 바쁜 가운데서도 과거의 법제도와 사례를 연구하고 자신의 경험을 적절히 조화하여 의미있는 저술을 한 것에 대하여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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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승의 과학 콘서트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정재승 지음 / 동아시아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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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심슨 사건은 배심제의 문제점을 지적할 때 자주 등장합니다.

정재승 교수가 과학콘서트라는 글에서 OJ심슨사건이 남긴 교훈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먼저 피해자의 변호인단 측이 평소 심슨이 아내를 때리고 폭언을 일삼았으므로 심슨의 살인가능성을 제기하자 심슨의 변호인단은 이런 주장을 합니다.


 실제로 남편에게 폭행을 당하는 아내 중에서 자신을 때린 남편에 의해 살해당한 경우는 천명 중의 하나, 즉 0.1%도 안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내 니콜을 때렸다는 사실은 심슨이 아내의 살인범이라는 가능성에 대해 아무런 단서를 제공하지 못한다.
그러나 템플대학 수학과 교수 John Allen Paulos 교수는 이러한 계산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범하는 오류'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폈다고 합니다.


만약 매맞는 아내가 있다고 하자. 이 여자가 자신의 남편에 의해 죽을 확률은 얼마일까? 이 문제에 대해서라면 심슨의 변호사가 주장하는 내용이 맞다. 0.1%밖에 안될것이다. 그러나 심슨 사건의 경우에서는 이미 아내가 죽었다. 따라서 이경우에는 '매맞던 아내가 죽었을 때 그녀를 평소 때리던 남편이 범인을 확률을 계산해야 하는 것이다. 그럴 확률은 무려 80%가 넘는다. 따라서 심슨이 평소 아내를 때렸다는 사실은 심신이 아내 살인범일 가능성에 대해 충분한 단서가 되는 것이다.
이 점을 포함하여 DNA 테스트결과의 일치, 발자국의 크기의 일치 등의 문제에 있어서도 변호인단은 확률의 문제를 통해서 배심원들을 현혹한 끝에 결국 무죄를 받고 말았습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배심제가 실시되면서 국민들의 큰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부 언론에서는 검찰이 배심제의 취지를 무색하게 선고된 모든 사건에 대하여 불복하고 항소를 제기하고 있다는 비판을 하기도 합니다. 

검찰, “국민참여재판 승복 못한다”


과연 그럴까요?


 아주 중요한 문제를 착각하고 있다. 지금 그들은 '아무 죄없는 사람이 여러가지 자신에게 불리한 증거를 가질 확률'이 매우 낮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여러가지 자신에게 불리한 증거를 가진 사람이 아무 죄가 없을 확률이 높다'는 사실을 부각시켜 심슨의 무죄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결국 재판부는('배심원을 포함한') 심슨 변호사측의 손을들어주는 오판을 저지르고 말았다. 확률에 관한 오해로 인해 재판부가 변호인의 말장난에 넘어가 살인자를 무죄 석방해 버린 것이다
모처럼 마련된 배심제이므로 운용의 묘를 살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배심제에 참여하는 검사, 배심원, 판사 모두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범할 수 있는 이와 같은 오류를 방지하기 위하여 더욱 치밀한 재판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언론도 팩트를 국민들에게 정확히 전달하는 노력이 어우러질때 국민참여재판이라는 취지가 비로소 그 빛을 발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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