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진성> 

가도입명(假道入明)

 

왜군 총대장 유키나가는 부산진성이 멀리 보이는 둔덕 위에 이르자, 손을 들어 진군을 멈추게 했다. 부산진성까지는 불과 한 마장 남짓한 거리로 성벽이 육안으로 보이는 곳이었다. 


“본진은 이곳에 둔다. 전령은 즉시 각 대에 전하라. 지금부터 세 열로 갈라져, 작전대로 성을 분산 공략한다.” 
“하아.” 

유키나가의 명령이 떨어지자 측근에 있던 전령들이 발에 흙을 튀기면서 날렵하게 달려 나갔다. 왜군은 중앙에 본진을 두고, 좌우에서 협공하는 학익진(鶴翼陣)의 대형을 짰다. 군사적 우세를 자신할 경우 취하는 공격 진형이었다. 

 

“전령! 다시 각 대에 전하라. 총공격에 앞서 돌격대를 선발해 내 보내도록.” 
“하아.”

 
유키나가는 앞서 떠난 전령들이 돌아오기도 전에 연이어 군령을 내렸다. 즉시 각 대열에서 돌격대가 선발되었다. 
중앙 공격을 맡은 유키나가는 자신의 부장 가운데 무용이 뛰어난 기도(木戶)와, 다케우치(竹內)를 발탁해 선봉을 맡겼다. 좌익을 맡은 대마도대에서는 후쿠다(福田)와 난바(難波)가 선봉이 되었다. 우익을 맡은 마츠우라대는, 영주 마츠우라의 부장인 니시(西)와 하시구치(橋口)가 선봉의 임무를 맡았다. 모두 전투 경험이 풍부 한 백전노장의 장수들이었다. 
들판을 사이에 두고 왜군이 대열을 분산시킨 후, 선발대가 성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 동문루에 있는 정발의 시야에 들어왔다.

 
“전군! 이제 곧 적의 공격이 시작될 것이다. 모두 무기를 들고 마음을 단단히 먹도록 하라.” 


정발은 큰소리로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는 한편, 자신도 임전태세를 갖추었다. 왜군 돌격대는 빠르게 성을 향해 다가왔다. 먼지가 일더니 순식간에 왜군의 윤곽이 뚜렷이 시야에 들어왔다. 성과 왜군과의 거리는 약 이백 보 정도로 좁혀졌다. 지금 바로 공격을 해 온다면 순식간에 성에 다다를 거리였다. 하지만 거칠 것 없다는 듯, 출렁거리며 밀려오던 왜군의 진군이 갑자기 멈춰 섰다. 


“저놈들이 대오를 정비해 일시에 공격을 하려고 저러는 것일 게 다. 궁수들은 활에 화살을 걸고 일제히 쏠 준비를 하라.” 
명령이 떨어지자 궁수들은 전통(箭筒)에서 화살을 뽑아 활에 걸치고 상대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왜군의 움직임은 멈춰진 그대로였다. 


“뭐하노? 저놈들이 뭔 꿍꿍이를 부릴려고 즈러고 있나. 올라면 빨리 오그레. 내 이 화살로 대갈통을 갈겨 줄끼라.” 
“저노마들도 속으론 우리가 무서운기라.” 


궁수들이 오른손의 화살을 활줄에 걸치고, 활을 왼손집게로 고정시킨 채, 불안한 마음을 달래려고 수군대고 있는데 왜장으로 보이는 자가 깃발을 손에 들고 단기로 성 쪽을 향해 튀어 나왔다. 기마대 뒤로는 창이 아닌 막대 같은 것을 어깨에 걸친 보병 십여 명이 뒤따라 오는 것이 보였다. 철포대였다.
정발은 긴장하며 다시 측근 부장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탐색을 위한 공격조일지 모른다. 긴장하고 경계를 소홀히 하지 마라!”


궁수들은 활시위에 올려놓은 화살을 슬쩍 당기며 왜장의 움직임에 맞추어 활을 위로 올렸다가 내리면서 거리를 가늠하였다. 활시위는 이미 팽팽하게 당겨졌다. 손가락만 놓으면 화살은 ‘휘익’ 하고 날아갈 판이었다.
그때 투구와 갑옷을 몸에 두른 채 말을 타고 있던 왜병장이 성벽을 향해 다가오더니, 손에 들고 있던 깃발을 필사적으로 흔들었다. 잠시 멈춰 섰다가는 성벽 위의 반응을 살피며 동문루 앞쪽으로 조심조심 다가왔다. 성벽에서 약 백 보 떨어진 거리로, 활의 사정거리였다. 


“영감! 사거리입니다. 활을 쏘아 저들을 잡을 기횝니다.”


조방장 이응순이 재촉하듯 정발에게 공격을 요구했다. 
이응순은 이들을 공격해, 동요하고 있는 성안에 있는 군사들에게 싸움의 의지를 명백히 하고, 또 한편으로는 사기도 북돋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공격을 요구한 것이었다. 
왜병들도 위험을 의식해서인지 더는 다가오지 않았다. 그리고는 그곳에서 성을 향해 큰소리로 뭐라 했다. 왜말이었다. 이어서 뒤에 있던 보병이 조선말로 크게 외쳤다. 왜장의 말을 통역한 것이다. 


“여기 우리 대장님의 경고가 적혀 있다. 잘 보고 답을 주어라.” 


보병은 두 손을 입에 대어, 성벽을 향해 큰소리로 전하고는 말 위에 걸치고 왔던 널빤지를 말 위에서 내려 땅바닥 위에 꽂아 놓고, 부리나케 왜병 진영으로 되돌아갔다. 


“저놈들이 뭬라 지껄인거냐? 그리고 저건 무어냐?” 
“아마도 왜군이 무언가를 써서 알리려는 것 같소이다!” 
“병사를 내보내 가져오도록 하라!” 


이정헌이 답하자 정발은 급하게 명령을 내렸다. 혹시라도 거기에 싸움을 피할 방법이 쓰여 있을까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장교가 병사 넷을 끌고 나가 왜군이 꽂아 놓은 널빤지를 첨사에게 가져왔다. 판자에는 먹이 채 마르지 않은 채, 네 글자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假道入明(명으로 들어가기 위한 길을 빌리고자 한다.)' 


먹물은 검은 핏물처럼 줄줄 위에서 아래쪽으로 번져 내리고 있었다. 어떤 장문의 협박장보다 무섭고 짧은 문장이었다. 


“천하에 죽일 놈들!” 


정발 옆에 있던 이정헌이 눈꼬리를 치켜올리며 일갈했다. 가도 입명이라는 말은 길을 비켜주면 싸움을 피할 수 있다는 마지막 권고였다. 상대의 입장을 배려한 그럴 듯한 말이었지만 즉 항복하라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명나라를 상전으로 모시는 조선 양반인 그들로서는 ‘언감생심’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을 왜군이 요구한 것이었다. 


“영감, 어찌 하시렵니까? 저들과 협상하는 척하며 원군이 올 때까지 시간을 끌 수도 있습니다만, 길을 내줄 수는 없습니다.” 


옆에 있던 이정헌은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듯했다. 협상을 하며 시간을 버는 것은 인정하지만 왜군의 가도입명을 위해 길을 열어 준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는 말투였다. 은근히 첨사의 결단을 촉구하고 있었다. 
정발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만주에서 오랑캐 등과 싸워 몇 차례나 진압에 성공했다. 그런고로 싸움 경험이 없진 않았으나, 저렇게 많은 대군을 실제로 접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길 자신이 없어 솔직히 두려웠다. 그러나 무관으로서 부하들 앞에서 항복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마도 항복이라는 소리를 입에 담는 순간, 충절을 중시하는 부하들의 칼을 받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게 조선 무신의 기개였다. 차라리 목숨이 아깝다면 핑계를 대고 혼자 부임지를 빠져나갈 수는 있어도 항복은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성을 버리고 나갈 수도 없었다. 항복을 하거나 부임지를 버림과 동시에, 수령으로서의 권위와 위엄은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죽을 각오로 버텨야 한다.’
나라를 위해서도, 임금을 위해서도, 그렇다고 부하 병사들과 백성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자신과 가문의 일족을 위해서라도 버텨야 했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성을 지키거나, 아니면 장렬하게 죽는 일만이 남은 길이었다. 그 외의 선택은 있을 수 없었다. 만일 성을 버리고 몸만 빠져나가 목숨을 부지한다 하더라도 후에 역적으로 몰리어 자신은 물론 가문 일족이 몰살될 것은 뻔한 일이었다. 목숨을 부지한 채 비루하게 살아남는다 해도 자신을 기다리는 것은 굴욕과 치욕뿐. 게다가 후손들은 역적의 후예로서 노비가 되어 개, 돼지처럼 살아가야 한다. 조선의 무장으로서, 양반으로서 그것만큼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용케 왜적을 물리치고 성을 지켜내, 살아남는다면 충신의 칭호를 받을 것이다. 부귀영화와 권세가 보장될 것이고, 가문은 충신의 반열에 올라 자자손손까지 칭송을 받을 것이다. 전투에 패하더라도, 장렬하게 전사한다면 자신의 일신을 던져 일족과 가문은 구할 수 있다.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가는 죽음도 두려웠지만 살아서 받을 굴욕이 더 두려웠다. 그럼에도 생애 대한 애착은 땅속 깊이 뿌리를 내려 혼자만의 힘으로 빼려야 뺄 수 없는 말뚝처럼, 머릿 속에서 떨쳐낼 수가 없었다. 


‘삶에 대한 애착을 뿌리쳐라. 나는 조선의 무장이다. 장수답게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인간으로서의 삶의 본능과 상황 이해에 따른 이성이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다. 


“첨사! 저들에게 우리의 필사의 의지를 보여주어야 하오."                                                                                                                                                                                                제34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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