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진성
<군역과 대립제>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통해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 왕조를 세운 것이
1392년의
일이었다.
새
왕조가 들어선 후 조선에서는 약
200년간
커다란 전쟁이 없었다.
북방
지역에서 간헐적으로 여진족의 침입이 있어,
이를
진압하기 위한 전투가 있긴 하였으나,
모두
국지전에 불과했다.
명종
10년인
1555년에
을묘왜변이 일어난 일이 있다.
조선
조정이 세견선의 감축을 명하자,
교역량이
줄어들었고 그로 인해 일차적으로 경제적 타격을 받은 것이 대마도였다.
어려움에
직면하자 대마도에서 불만을 가진 자들이 늘었다.
이들
중 일부가 주변 섬의 왜구들을 규합하여 배
70여
척을 이끌고 남해안을 침범했다.
약
한 달여에 걸쳐,
영암을
비롯해 장흥,
강진,
진도
지역을 짓 밟았으나,
조정에서
파견한 이윤경과 남치근 등에 의해 무사히 진압되었다.
그러므로
그 피해 역시 조선 전역이 아닌 단지 전라도 이남에 그쳤다.
이처럼
오래전부터 남쪽 지방에 가끔 왜구들이 나타나,
사변이
없진 않았으나,
나라
전체가 혼란에 빠지는 큰 병란은 없었다.
오랜
평화 탓에 조정이고 백성이고 모두 전쟁에 대한 위기 의식이 없었다.
좋게
말하면 평화를 즐겼고,
나쁘게
말하면 일종의 무사안일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이성계를
도와 조선 왕조를 세우고,
새롭게
지배 세력이 된 사대부들은 통치 이념을 유교로 정했고,
중앙
집권의 양반 관료체제를 만들었다.
그들은
유교적 이상 정치를 내세워,
고려의
숭불 정책을 반대하고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을
실시했다.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은 이들은 유교의 발원지인 중국을 상국으로 모시는 사대주의를 택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외교는 명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외교뿐만 아니라 정치 제도,
학문
등 모든 것을 명에만 의지했다.
명나라를
상국인 대중화로 부르며 자신들의 조선은 소중화로 자처했다.
그들의
사대주의로는 명과 조선을 제외한 그밖의 모든 지역과 나라는 문명화가 안 된 한낱 오랑캐에 불과했다.
유교로
문명화된 명이 대중화요,
이를
따르는 조선은 소중화로서 문명국이라는 자부심이 강했다.
그러니
명은 상전이요,
명을
제외한 주변 국가는 모두 오랑캐로 치부되었다.
“명을
상국으로 모시는 한,
만주의
오랑캐들을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사옵니다.
명이
쇠퇴의 기미를 보이고,
여진족이
발호해 세력을 늘리고 있습니다만,
대국인
명이 그리 호락호락하진 않을 겁니다.
곧
만주에 진출해 여진을 진압할 것입니다.”
사대부들은
명을 상국으로 모시는 한,
국경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명
왕조가
16세기에
들어서 쇠퇴의 기미를 보이는데도 명에 대한 믿음은 변함이 없었다.
만주족이
창궐해,
가끔
돌발적으로 북쪽 국경을 침범해 골치가 아프긴 하였지만,
언제나
있었던 국지적 분쟁에 불과하다는 판단이었다.
바다
건너 남쪽에 위치한 왜는 미개한 나라로 치부됐다.
가끔
왜구들이 침입해 머리를 아프게 했지만,
통일된
강력한 중앙정부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마도처럼
강온책을 잘 구사하면,
국가적인
큰 변란은 없을 것으로 판단했다.
조선
왕조가 들어서고 초기에는 자주국방에 힘을 쏟았으나,
평화가
지속되자 스스로 국방력보다는 명에 의지하는 사대주의에 만족했다.
명을
상국으로 모시고,
주변국인
여진족과 대마도 왜인들에게는 때로는 강경책으로 무력 진압을 하였고,
또
때로는 온화책으로 조선의 관직을 제수해 그들을 회유했다.
이른바
사대교린이었다.
그게
얼마간은 먹혀 들어갔다.
조정으로서는
국방을 위해 백성들에게 과중한 부담을 주지 않으며,
국고를
낭비하지 않고도 종묘사직과 왕조의 안녕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상책이라는 생각이었다.
정책이
주효했는지 시대적 상황이 그러했는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조선은 큰 전쟁 없는 평화적 상황이
200년간
지속되어 왔다.
때문에
조정에서는 물론 민간에서도 외부 침략에 대한 대비 의식이 결여되어 있었다.
왕을
비롯해 조정 대신,
그리고
백성들도 모두 위기에 대비한 유비무환이라는 단어조차 잊고 살았다.
그러나 오랫동안 평화가 지속되다 보니 그 폐해는 먼저 병역 제도에서
나타났다.
조선
초기의 병역 제도는 병농 일치가 원칙이었다.
향리와
역리,
그리고
노비 등의 천민을 제외한
16세에서
60세의
모든 양인 장정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병역 의무가 부과되었다.
이들을
정병이라 칭하였고 이들이 이른바 국방의 요체였다.
군의
편제는 오위(五衛)를
중심으로 짜진 중앙군과 진관체제(鎭管體制)의
지방군으로 나뉘어 있었다.
오위인
중앙군의 병력은 무과를 통해 선발된 갑사와 특수 군인인 고위 양반의 자제가 주를 이뤘고 나머지는 의무명인 정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중앙군의
임무는 주로 왕도인 한성의 방어와 궁궐수비였다.
정병
소환을 받아 중앙군인 오위에 편성되면 지방에 사는 장정일지라도 한성에 올라와 왕궁의 시위 등을 맡으며 군역을 수행해야
했다.
지방군에
배속되면,
영진군(營鎭軍)에
소속되어 지방에 머무르며 군역을 수행했다.
세조
이후 성립된 진관체제하에서,
이들은
각 도에 설치된 병영과 진에서 절도사의 지휘를 받으며 병무에 복무하였다.
중앙군이
부족할 경우에는 이들 지방군 중 일부가 교대로 중앙에 올라가 번상 교대를 하게 되어 있었다.
초기에는
이러한 병역제도가 예외 없이 철저히 적용되었고,
병역을
어기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엄하게 벌해졌다.
그러나
국란에 이르는 큰 전쟁이 없이 평화가 지속되자,
군역
제도가 문란해지기 시작했다.
초기에
마련해 놓았던 병역 제도가 점점 유명무실해지며 그 근간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병화 없이 태평스런 세월이 이어지자 관민 모두 군역의 의무를 경시하는 풍조가 만연했고,
백성들
사이에 군역을 대신하는 대립제가 만들어져 횡행하였다.
즉
중앙군인 오위로 배치되어 한성으로 소집될 경우,
지방에
사는 양인 장정 중,
세도가
있거나 살림이 넉넉한 자들의 자식들은 이를 피하고자 자신이 직접 군역을 치르지 않고,
대리인을
고용해 대신 군역을 시켰다.
그들은
한성에 사는 천민 계급의 장정을 찾아 교섭했고,
흥정이
성립되면,
그들에게
곡물이나 피륙을 지급하고는 군역을 대신 시키는 제도를 불법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대립제란
가진 자들이 백성의 의무인 군역을 재물로 대신하는 행위였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불법적인 제도가 전국적으로 만연해,
공공연히
횡행하는 사태임에도 이를 지적하는 자가 없다는 데 있었다.
대립제는
그 자체로서도 문제였지만,
또
다른 폐단은 대립의 대가가 천차만별이라는 것이었다.
암암리에
이루어지는 행위이므로 양인과 천민 사이에 군역 대립에 대한 대가를 놓고 티격태격하는 일이 빈번히 야기되었다.
대가
지급을 놓고 언쟁 끝에 싸움은 물론 이요,
상해,
심지어
살인까지 일어나 커다란 사회적 문제로 번졌다.
11대
중종(1506년~1544년)은
자신의 재임 시절 대립제로 인해 병역에 관한 병폐가 만연하고 사회질서가 문란해지자 이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대립제야말로
국방의 근간을 흔드는 문제요.
자칫
잘못하면 사직이 위협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경들의 의견을 듣고자 하오.”
왕은
잘못된 대립제를 철저히 단속하고,
군역을
엄격하게 관리하기 위한 방법을 찾고자,
대신들의
의견을 물었다.
“지당한
말씀이옵니다.
그러나
많은 백성이 대립제와 연관되어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옵니다.
완전히
폐지하면 가난한 백성들은 당장 생계를 위협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하오니,
없애기보다는
율을 마련해 백성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분쟁을 줄여주는 것이 좋을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잘못된
것을 폐지하기보다는 오히려 대립제를 법제화시키자는 쪽으로 대신들의 의견이 기울었다.
‘법제화되어도
재력 없는 상민들은 혜택을 누릴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대립제의 혜택을 보는 자들은 세도가나 재산이 많은 양반이었으니,
그들로서는
대립제를 폐지하는 쪽보다는 제도화하는 편이 좋았던 것이다.
결국
대립제를 폐지하고자,
대신들의
의견을 모으던 중종조차 처음 의도와는 달리 대립제를 법제화시키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대립제의
폐해가 언젠가는 결국 국가를 위기에 빠뜨릴 수 있다는 위기의식에서 마련된 중신회의가 국방을 위한 원칙론보다 실정을 반영한다는 미명하에 오히려
합법화되어 버린 것이었다.
현실을
반영한 결론이라지만,
국가
존망을 흔들 수 있는 선택이었다.
이에
따라 중종은 재임
36년(1541년)에
군적수포법(軍籍收布法)을
마련해 공포했다.
즉
지방에서 중앙으로 상경하여 근무하게 되어 있는 번상 정병에게 군역 대신 납부할 가포(價布)의
수납 절차와 수포액(收布額)을
국법으로 통일시켜 정해준 것이었다.
군역
대신 정해진 가포만을 지방관에 내면 군역이 면제되는 제도가 합법적으로 마련된 것이었다.
제도가
마련되자 신이 난 이는 세도가와 재력가들이었다.
이제까지는
쉬쉬 하며 군역을 대신해 줄 상대를 물색하고 대가를 지불했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조차 없어졌다.
장정을
물색하고 교섭을 해야 할 번거로움이 없어졌으니,
가진
자들은 너도나도 군역의 의무를 재물로 대신하였다.
그런데
한번 잘못된 폐단이 마련되자,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원래
중앙군에 근무하는 번상정병들에게만 해당되었던 군적수포법이 지방에까지 확산되었다.
그러자
각 영(營)과
진(鎭)
의
지방관인 책임자들이 군역 의무 대신 포를 받기 시작하였으며,
그들은
거두어들인 포를 중앙에 방납하여야 했으나,
이를
중간에서 착복하였다.
그뿐만
아니었다.
몰래
뇌물을 받고는 장부상에 병역을 이행하는 것처럼 기재를 하고,
근무를
면제해 주었다.
잘못된
제도가 법제화되자 그에 따른 병폐가 전국적으로 만연 하였고,
대립제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만든 군적수포법이 더 커다란 사회문제를 발생시켰다.
대립제가
개인 간의 일어난 폐단이라 한다면 대립제의 법제화는 관이 결부된 국가의 병폐로 나타났다.
이
같은 병역비리의 만 연은 그대로 국방력 약화로 이어졌다.
중앙과
지방 모두 장부상으 로 병사들의 군적은 존재하였으나,
실제
병사는 존재하지 않는 유령화된 군사와 껍데기로 변해버린 병역 제도만 남았다.
‘힘없고
돈 없으면 군역 이행,
세도나
재력 있으면 군역 면제.’
수포를
납부할 수 없는 가난한 자들만 병무를 이행하는 상황이 되어 버리자,
빈곤층인
백성들의 불만이 팽배했다.
결국
명목상의 중앙군과 지방군이 존재했으나 군적뿐이었고,
병사가
존재하긴 했으나 기강 또한 형편없이 무너져 있었다.
잘못된
제도로 인해 국방력은 약화할 대로,
가난하고
권력 없는 백성들의 가슴은 조정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 차 민심은 분열될 대로 분열되었다.
외세의
침략이라도 있게 되면 금세라도 무너질 누란지위의 상황이 조성된 것이다. 
제 26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