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 화
<왜구들의 본거지>
살동과 왜구가 문답하고 있는데, 큰 배 위에서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던 왜구 중 머리에 투구를 쓰고 있던 자가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
“뭐라고 했느냐? 그놈들이 조선에서 왔다고 했느냐?”
“예, 그렇습니다. 이놈들이 조선 출신이라 우리말을 잘 모른다고 하는군요.”
“그놈들을 이리로 끌어오너라!”
“이놈들 전부를 말입니까?”
“아니, 조선에서 온 놈들만 끌어올리란 말이다.”
“알겠습니다.”
칼을 뽑아 들고 있던 왜구가 칼끝을 살동의 목에 대며 외쳤다.
“너, 이놈. 여기 너와 같이 조선에서 흘러온 놈이 누구냐?”
“셋입니다.”
“거짓말을 하면 죽을 줄 알아라! 말을 시켜보면 금세 알 수 있다.”
살동이 얼른 손짓으로 서봉과 만석을 불러 이들 셋은 배 이물 쪽에 모였고, 다른 히노 섬 어부들은 뒤쪽인 고물 쪽에 자리를 잡았다. 왜구들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말을 시켜 왜인인지 조선인인지 말투를 확인했다.
“네놈들은 저 배로 옮겨 타라.”
확인을 끝낸 후, 왜구들은 살동 일행만 자신들의 배로 옮겨 타도록 했다. 배 위에 있던 왜구들이 막대와 손을 아래로 뻗어 이들이 옮겨 타는 것을 도왔다.
히노 섬 어부들은 이들이 곧 돌아올 것으로 기대했으나, 왜구들이 탄 교역선은 이들을 내려주지 않고 그대로 돛을 올려 먼바다로 나가버렸다.
“저들이 왜구들에게 잡혀갔으니 이제 죽는 게 아니겠나?”
“그냥 죽이기야 하겠나?”
“아무튼 저들에게는 안됐지만 우린 운이 좋았네. 어서 섬으로 돌아가도록 하세.”
한편, 왜구들은 살동 일행이 교역선으로 옮겨 타자, 그들의 손을 뒤로 해 포박했다. 그러고는 양 쪽에서 어깨를 꾹 눌러 무릎을 꿇게 했다. 갑판 위에 무릎을 꿇고 있던 살동과 만석, 서봉은 겁을 잔뜩 먹고 덜덜 떨고 있었다.
왜구들의 인상은 하나같이 험상궂었다. 모두가 눈이 위로 치켜 올라가 있었다. 탐욕에 가득 찬 눈빛이었다. 남의 물건을 아무렇지 않게 약탈하고, 죄 없는 사람들이라도 쉽게 살인을 하는 자들이었다.
‘이젠 꼼짝없이 죽었구나!’
막막했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온몸을 휩쌌다.
풍랑을 만나 동료들이 바다로 휩쓸려 내려갈 때도 구사일생으로 운 좋게 살아남았던 그 들이었다. 그래서 운이 좋다고 서로 자위도 했던 터였다.
‘아, 이제 운이 다했구나.’
히노 섬에 표착해 여섯 달 동안 그래도 평안하게 지내왔다 싶은 때에 일어난 일이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이럴 줄 알았다면 무리를 해서라도 조선으로 돌아갈 걸….’
모두 곧 죽는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들의 등 뒤에는 감시병인 왜구가 칼끝을 올려놓고 있었다. 살동은 맨살이었는데, 칼끝이 닿아있어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칼끝이 따끔하게 살갗을 찔렀다. 섣불리 반항했다가는 시퍼런 칼끝이 그대로 등을 뚫고 들어올 것 같았다. 셋 중에서도 서봉이 가장 겁에 질렸던지, 턱이 덜덜 떨리며 이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살동의 귀에도 들려왔다.
‘이대로 죽는구나.’
모든 걸 체념하고 죽을 때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일본말이 크게 터져 나왔다.
“조선 어디에서 흘러 온 놈들이냐?”
왜말을 어느 정도 아는 살동이었지만 처음엔 무슨 소리인 줄 몰라, 그대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저놈의 고개를 들어 올려라.”
왜구 하나가 숙이고 있던 살동의 머리를 사정없이 잡더니, 들어 올렸다. 그곳에는 머리에 투구를 쓴 왜구가 두발을 넓게 벌리고, 거목처럼 갑판 위에 떡 버티고 서 있었다. 나이는 사십대 전후로 눈빛이 날카로웠다. 두령이었다.
“너, 이놈. 우리말을 알면서 왜 대답을 안 하느냐?”
“네? 무슨 말씀인지?”
살동이 말을 잘 못 알아듣고 일본말로 더듬거리자, 왜구는 다시 천천히 고쳐 말했다.
“어디에서 왔느냐?’
“아, 네! 옥주에서 왔습니다.”
“그곳이 어디냐?”
“저기 조선 아래쪽에 있는 섬입니다.”
살동은 일본말을 더듬거렸으나, 뜻을 분명히 전달하기 위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 보며 방향을 잡은 뒤에 머리로 오른쪽을 가리켰다.
“그곳의 지리를 잘 아느냐?”
“네, 그럼요.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니 잘 알다 뿐이겠습니 까요. 게다가 전복을 잡으러 여기저기 다녔기 때문에 남쪽 지방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왜구 두령이 묻는 말투를 듣고 살동은 불현듯이 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모든 신경을 집중해서 상대의 일본말을 알아 들으려 애를 썼다.
‘말 한 번 잘못하면 목숨이 날아간다.’
군데군데 모르는 말도 있었으나, 잘 모르는 말은 문맥을 생각해 짐작하며 할 수 있는 일본말을 총 동원해 대답하려 애썼다.
“그럼, 쓸모가 있겠군. 다음에 우리를 그리로 안내해라!”
“네?”
살동은 말은 알아들었지만 무슨 뜻인지를 몰랐다. 그렇다고 되 물을 수도 없었다. 섣불리 되물었다간 화를 돋우어 그대로 칼에 맞을지도 몰랐다. 무언가 말뜻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기 위해 주변에 있던 왜구들의 얼굴을 두리번거리며 바라보았다.
“안내하라는데 말을 못 알아듣느냐?”
옆에 있던 왜구가 다시 한 번 말해 주었다.
“아, 네! 잘 알겠습니다.”
‘이젠, 살았구나.’
살동은 너무 기뻐 손이 뒤로 묶인 채, 그 자리에서 머리를 갑판에 조아리고 절을 하는 시늉을 했다.
“이놈들 손을 풀어주고 먹을 것을 좀 주도록 해라.”
만석과 서봉은 포박이 풀어지자, 살았다는 것을 눈치로 알고 서로 손을 잡고 기뻐했다.
“워메, 인제 살아부렀네. 살아부렀어.”
“난 그대로 황천으로 가는지 알았그만.”
“살동아! 니가 왜말을 알아들어서 살아부렀다. 너 아니믄 우린 죽어뿌렀다. 하이고, 안 그라냐? 만석아. 야가 생명의 은인이여.”
“만석아! 우리도 살아남을라믄 왜말을 째깐 배워야 쓰겄다, 잉.”
“그려잉, 그라구만. 듣고 봉께 그말이 맞네 그려! 배워서 남주냐는 말이 딱 맞어 떨어져부렀그만. 워메 증말로 쪼금 전까지만 해도 뒤지는 줄 알았당께.”
왜구들은 살동 일행을 자신들의 본거지로 데려갔다. 그들은 길잡이용으로 끌려간 것이었다.
살동의 일행이 끌려간 곳은 오도열도에서 가장 큰 섬인 후쿠에 섬이었다. 오도열도의 영주인 우쿠씨의 거성이 있는 곳이었다. 몇 개의 산으로 이루어진 섬은 넓어 농토도 제법 많았고, 그만큼 호구 수도 많아 주민도 많았다. 남쪽에 높이 솟아오른 산이 있었는데, 산등성은 바다를 향해 완만한 경사를 이루었다. 산비탈이 끝나는 곳에서 바다를 향해 평지가 이루어졌는데 그곳에 영주의 거성이 있었다. 그곳이 섬의 중심지였다.
영주인 우쿠씨가 후쿠에 섬을 거점으로 오도열도 전체를 지배해 관리하고 있었지만, 관리가 미치지 않는 곳에는 어민과 왜구들이 뒤엉켜 살고 있었다. 왜구들은 어민들과 함께 살며 어업을 하는 척 하였지만 주된 일은 해적질과 약탈한 물건의 교역이었다.
성주인 우쿠씨는 이들을 통제하지 않았다. 어민들과 섞여 사는 이 들은 통제하기도 어려웠지만, 성주로서 때로는 그들이 필요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성주는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들에게서 세물을 거두거나 성내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 받았다. 때로는 그들 을 통해 교역도 해, 얼마간의 이득을 내어 재정을 채우는 부분도 있었다. 일종의 필요악이었다.
살동 일행은 후쿠에 섬 동쪽으로 바다를 면하고 있는 야트막한 산 밑 해안가로 끌려갔다. 산능선 아래에서 해안으로 이어지는 평지에는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언뜻 보면 어촌 마을이었으나, 안쪽에는 돌성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었다. 두령이 거주하는 곳으로 보이는 산 중턱 움막은 사방이 돌로 둘러쳐져 있어, 천혜의 요새였다. 바닷가에는 망루가 높이 쌓아올려져 있었고, 그곳에서 왜구들은 먼바다의 움직임을 살펴볼 수가 있었다.
왜구들의 본거지는 영주가 있는 지역에서 동쪽으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동쪽은 산으로 가로막혀 있어 육지로 접근하기가 용의치 않은 지역이었다. 거의 치외법권 지역이었다.
“신사부로 저놈들에게 거처를 주고 함께 지내도록 하라!”
“하아, 알겠습니다.”
두령의 명령을 받은 신사부로라는 왜구는 살동 일행을 끌고 산 중턱으로 올라갔다. 거기에는 경사를 긁어 바닥을 평평하게 만든 움막이 있었는데, 움막에는 그들 말고도 넷이 더 있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왜구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움막 가운데는 땅을 파 불을 피울 수 있게 화덕을 만들어 놓았고 그들은 그곳을 이로리(圍爐裏)라 불렀다. 일종의 부엌의 역할을 하는 장소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다른 움막에는 중국에서 잡혀 온 사람도 몇인가 있었다. 그들은 이곳 생활에 익숙한지 발음이 조금 서툴긴 했지만 왜말로 이야기 하고 떠들고 웃곤 하였다.
산비탈을 내려가면 바닷가 오른쪽으로 오두막이 많이 있었다. 그곳에는 어민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배를 띄워 바다에서 고기를 잡으며 생활했다. 그들은 이들 왜구들을 무서워하지 않았고, 그들 앞에서 잡아온 생선을 널고, 말리고 하였다. 때론 이들 왜구들에게 생선을 가져오기도 하고 이들의 약탈품을 받아가곤 하며 자연스럽게 교류하고 있었다.
왜구들은 커다란 교역선 외에도 작은 어선을 몇 척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왜구들은 바다로 나가 고기를 잡진 않았다. 이들은 평소에는 놀고먹는 일에만 치중하다가 날씨가 좋은 날을 택해 배를 타고 먼바다로 나갔다. 그리고 교역과 어선을 가장해 해적질을 하였다.
왜구들은 한번 출항을 하면 먼바다로 나가 며칠에 걸쳐 항해를 했다. 가지고 간 물건을 주고 식량과 바꾸기도 하고, 기회다 싶으면 약탈도 일삼았다. 배에는 항상 병장기를 감추고 있었다. 두령급들은 칼을 잘 다뤘다. 주로 남쪽으로 내려가 류큐(오키나와)국이나, 루손(필리핀)섬, 그리고 중국해역을 침범하여 물자를 강탈해 왔다. 약탈품 중 식량 등은 자체 소비하였고, 도자기나 장신구 등 귀중한 물건은 규슈의 나가사키나 오사카 근처 사카이에 가져가 교역했다. 약 백여 명의 인원이 무리를 이루어 움직였다. 이들 중에는 중국인, 류큐인, 루손인도 섞여 있었다. 포로로 잡혀온 사람도 있었고, 풍랑을 만나 표착된 사람들도 있었다. 왜구들의 생활은 일반 어민들의 비해 넉넉한 편이었다. 한번 약탈을 다녀오면 며칠씩 먹고 마시고 즐겼다. 여자들을 포로로 잡아오면 성 노리개로 삼거나 잡일을 시켰다.
섬으로 잡혀온 사람들은 그들이 어디로 잡혀왔는지도 몰랐다. 알 수도 없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자포자기 상태로 그들 속에서 함께 생활하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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