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2화
반민<왜구>
물을 마시고 난 이들은 배는 여전히 고팠으나 그래도 좀 살 것 같았다. 아낙이 바깥으로 나갔다 싶더니 곧 마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어민들은 이들이 가리키는 배를 보고 살동 일행이 표류민이라는 것을 알았다. 적대감은 없었다. 섬 사람들은 친절하게도 이들에게 조로 쑨 죽을 갖다 주었다.
“워메, 생명의 은인이 따로 없구만요. 암튼 엄청 고맙구만요.”
살동 일행은 통하지 않는 조선말로 인사하고는, 허겁지겁 그릇째로 죽을 훌훌 마셨다. 죽을 비우고 겨우 허기를 달랬다 싶었는데 갑자기 조선말이 들려왔다.
“당신들 어디서 왔소?”
“야? 워메, 조선말을 할 쭐 아는까보요?”
“나도 조선에서 표류해 이리로 밀려 온 사람이외다.”
“워메, 그라요. 우린 쩌기 조선 옥주(진도의 옛 이름)에서 왔는디라우.”
말이 안 통해 답답해 하던 터에 조선 사람을 만난 이들은 구세주를 만난 것 같이 좋아라했다.
“풍랑을 만났구려?”
“야, 다 죽고 우리 서니만 살아남았당게라우.”
마치 꽉 막아놓은 방죽이 터진 듯 말이 터져 나왔다.
허기를 면한 후, 그의 안내로 살동 일행은 곧 관리가 있는 와카마츠 섬으로 넘어갔다. 와카마츠 섬에는 히노 섬보다 조선에서 표류되어 정착한 사람들이 많았다. 굳이 고향 땅을 찾을 필요를 못 느꼈던 사람들이었다. 어민으로 살아온 그들로서는 어디든 바다가 있으면 생활의 터전이 되었다. 고향에 돌아간들 별다르게 생활이 나아지는 것도 아니요, 특별나게 좋을 것도 없었다. 오히려 탐관오리들의 닥달이 덜한 이곳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리 큰일 날 일은 없을 테니까 너무 걱정 마오.”
조선에서 흘러와 정착한 사람들은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그들을 살갑게 대해 줬다. 살동 일행은 말이 통하는 것만으로도 살 것 같았다.
“워메, 인제 제대로 되었구먼.”
서봉과 만석이 유난히 기뻐했다.
와카마츠 섬에 있는 관리는 정식 관리가 아니고, 마을의 촌장 역할을 하는 촌로였다. 촌로가 관리 대신 마을 대표로서 권리를 위임받은 것이었다. 일종의 공동체의 장이었다. 촌로는 조선 사람의 통역을 통해 살동일행에게 간단한 확인 질문을 하였다.
“무얼 하는 사람들이냐?”
“바다에서 해산물을 따는 사람들입니다. 주로 전복을 채취하고 있습니다.”
“일행 열한 명과 남쪽으로 내려왔다가 풍랑을 만나 다 죽고, 저희만 여기까지 떠내려왔습니다.”
통역을 통해 살동 일행의 말을 들은 촌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조선인 통역에게 일본말로 다음과 같이 전했다.
“조선말을 잘 아는 네가 저들을 거두어 잘 정착하도록 도와주거라. 배를 타고 왔다니,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면 언제든지 돌아 갈 수 있도록 해주어라.”
“네, 잘 알겠습니다.”
살동과 일행은 그렇게 히노 섬에 정착했다. 처음에는 고향에 돌아갈 생각을 많이 하였으나 배의 파손이 심했고, 섬사람들은 그들 에게 배를 내줄만한, 아니 배를 수리해줄 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들은 곧바로 조선에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고 당분간 이곳에 머물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배가 없는 그들은 전복 잡는 일을 포기하고, 섬사람들을 따라 배를 타고 나가 고기를 잡았다. 히노 섬의 어부들은 배를 잘 다루었다. 고기가 많이 모이는 곳을 잘 알았기에 살동 일행은 그들을 따라 다니며 고기를 잡고 수확을 나눠 받았다.
조선에서는 배를 타고 어업을 하는 것도 관의 허가가 필요했지만 이곳에서는 그런 제한이 없는 것 같았다. 수확물의 일부는 촌장에게 바쳐졌고, 그렇게 모인 고기들은 말려져 어디론가 실려 갔다. 그리고 다시 쌀과 조 등의 식량이 되어 돌아왔다.
그렇게 한 여섯 달쯤 지나자 세 사람은 섬 생활에 많이 적응하였고, 왜말도 조금씩 배워 알아듣게 되었다. 살동은 원래 머리가 영민했고, 언문도 쓸 줄 알았다. 그는 왜말을 들으면 나뭇가지로 땅 위에 언문으로 표시하며 왜말을 익혔다. 그래서인지 다른 친구들보다 왜말을 빨리 익혔다. 단어는 그리 많이 알지 못했지만, 아무튼 생활을 위한 의사소통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셋은 조선 사람들이 내준 작은 움막에서 함께 기거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그들은 가끔 포작 기술을 살려, 섬 근처 바닷 속으로 들어가 해산물을 따곤 하였다. 살동의 솜씨는 뛰어나 섬 사람들도 살동이 따오는 실하고 통통한 해삼이나 전복을 보고는 탄복했다.
그날도 날씨가 맑아 바다에 나가기 좋은 날이었다.
“어이, 사르동이. 오늘 날이 좋아 먼바다로 배가 나가는데 함께 가지.”
섬사람들은 살동이란 발음이 사르동으로 들리는지 항상 사르동이라 불렀다. 배가 뜬다는 소식을 들은 서봉과 만석도 함께 어부들을 따라서 배에 탔다. 어민들은 바다로 나가 대나무를 쪼개 만든 원통 그물이나 삼베 망을 이용해 고기를 잡았다. 몸이 날래고 잠수에 익숙 한 살동은 대통을 잡고 물에 들어가기도 했고, 물속에서 대통을 들어올리기도 했다. 섬사람 들은 힘이 좋고 몸이 날랜 살동이 물속에서 대통이나 삼베 망을 잡아 주면, 고기 잡기가 수 월해 아주 좋아했다. 살동과 함께 작업을 하면 항상 수확이 좋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날도 살동이 부지런히 움직인 덕에 어획이 좋아 배 위로 고기들이 수북이 쌓여 갈 무렵이었다.
“저게 뭐여? 집채만 한 배가 다가오네, 그려.”
살동이 수평선 멀리서 다가오는 배들의 무리를 보고 그 크기에 놀라 왜말로 중얼거렸다. 조선에서의 경험으로는 저 정도 큰 배라면 대개가 수군들이 움직이는 군선이나 한성으로 진상품을 바치는 상선이었던
것이다.
“어허, 큰일 났네. 조용히하고 쳐다보지 말게.”
“왜 그럽니까?”
“저들은 교역을 핑계삼아 바다를 떠돌며 약탈을 주로 하는 해적 집단이네. 가까이 오면 그냥 머리를 숙이고 모른 척하게.”
살동과 어부가 말을 주고 받고 있는데, 다가오는 배 위에 타고 있는 왜구들의 복장을 본 만석이 기겁하며 조선말로 살동과 서봉에게 침을 튀기며 말했다.
“워메, 저거 왜, 왜구네. 왜구들이여. 아이고 이젠 죽었당께.”
섬의 어부들도 안색이 변했다. 모두 긴장하는 모습이었다.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바닷속에 넣었던 그물을 걷어 올리고 배를 돌리려 할 때였다. 왜구들이 타고 있는 큰 배가 물살을 가르며 옆으로 달라붙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곧 커다란 배에서 밧줄이 날아왔다.
“밧줄을 잡아 배에 묶도록 하라.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다가는 목과 몸이 따로 놀 것이다.”
그들의 손에는 어구 대신 날카로운 칼이 들려 있었다.
섬사람들은 반항하지 않고 시키는 대로 배 모서리에 밧줄을 감았다.
“어디에서 나온 놈들이냐?”
배 위에서 일본말이 들려오자 살동은 얼굴을 들어 왜구들의 배를 쳐다보았다. 굵고 넓은 판자로 만들어진 배였다. 크고 단단해 보였다. 만일 배가 곧장 부딪쳐 온다면 그들의 작은 배는 그 자리에서 산산조각 날 것 같았다.
왜구들은 배 위에서 아래쪽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는데, 모두 웃통을 벗은 채였다. 누런 이를 드러내며 손에 들고 있던 칼로 허공을 쑤시듯 휘둘러댔다. 살동은 날이 하얗게 선 칼을 보자 겁이 덜컹났다. 날카롭게 잘 갈아진 칼끝은 뾰족한 게 살기를 내비추고 있어 섬칫했다. 겁을 먹은 살동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이어서 왜구들과 어부들이 주고받는 말이 들려왔다.
“저희들은 여기서 얼마 안 떨어진 히노 섬에서 나온 어부들입니다.”
“그래, 우리가 오랫동안 생선 맛을 못 보았으니 잡은 물고기가 있으면 내놓아라.”
왜구 셋이 배 위에서 밧줄을 타고 내려와 날쌔게 옮겨 탔다. 그 중의 하나가 칼이 들어 있는 칼집으로 만석을 툭 치며 명령 투로 말을 하였다.
“배 밑창에 잡아 놓은 생선을 꺼내 올려 보아라.”
만석이 일본말을 잘 못 알아들어 어리둥절하자, 왜구가 역증을 내며 만석을 칼집으로 내려쳤다.
“이 자식이 말이 안 들리나! 죽고 싶어 환장했나? 이놈이 사람을 무시해?”
화가 난 왜구가 칼을 뽑아들었다. 얼른 살동이 앞으로 나서며 왜구를 막아섰다.
“죄송합니다. 이 친구가 아직 이곳 말을 몰라서 그런 것 뿐입니다.”
“뭐라? 말을 몰라? 그럼 네놈들은 히노 섬에서 온 게 아니란 말이냐?”
“아닙니다. 히노 섬에서 온 것은 맞습니다. 저희는 원래 조선 사람입니다. 풍랑을 만나 이곳에 표착했습니다. 지금은 히노 섬에서 살고 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서투른 일본어로 더듬거리며 살동이 설명하자, 다른 왜구들도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살동의 곁으로 다가왔다. 만석은 칼을 뽑아든 왜구를 보고 겁을 먹어 얼굴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그리고 얼른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려 싹싹 빌고 있었다.
“잘못했응께, 살려주시라고요.”
“이놈이 뭐라 하는 거야?”
왜구가 만석이 하는 말을 몰라 살동에게 물었다.
“잘못했다고 살려달라 빌고 있습니다.”
살동의 더듬거리는 일본말을 들으며 왜구 하나가 다시 물었다.
“조선에서 흘러왔다고…?”
“네, 그렇습니다.”
살동과 왜구가 문답하고 있는데, 큰 배 위에서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던 왜구 중 머리에 투구를 쓰고 있던 자가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제 13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