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스푼의 시간
구병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6년 9월
평점 :
품절


몇 년 전에 소설 「파과」를 통해 구병모 작가를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냉장고에 굴러 다니는 쭈글쭈글해진 과일을 보고 청부살인업자에 관한 이야기를 떠올렸다는 작가의
상상력에 감탄하면서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작품에서 받았던 작가의 느낌이 좋았기에 이 소설 또한 은근히 기대를 하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아, 역시 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작가임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명정이 운영하는 세탁소에 도착한 정체불명의 택배.
그건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아들이 보낸 것이었습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지금은 없어진 아들의
회사에서 만들었던 17세 아시아 남성용 로봇.

아내도, 아들도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낸 명정은 로봇에게 '은결'이란 이름을 붙여주고 함께 생활하기
시작합니다.

은결을 보기 위해 명정의 세탁소는 한동안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게 됩니다. 처음엔 신기한 구경거리
였던 은결은 차츰 동네 세탁소에서 세탁물을 수거하고 배달하는 심부름을 하면서 동네 사람들 사이에
당연한 존재로 스며들게 됩니다.

처음 은결이 세탁소에 왔을 때 그 사용법을 알려주었던 영문과 대학원생 세주, 서로 투닥거리는 13살
시호와 준교.

은결은 명정과 세주, 시호, 준교를 통해 로봇이 느낄 수 없는 인간의 감정을 어렴풋이 알아가기 시작
합니다.

명정도 아내와 아들 없이 헛헛한 마음을 은결 덕분에 채워가고, 은결이 로봇이 아니라 둘째 아들이
라고 생각하고 의지하게 됩니다.

세주가 결혼을 하면서 동네를 떠나고 준교도 학교 때문에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고 세월이 지나면서
하나 둘 동네를 떠나지만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명정의 세탁소와 은결.

은결보다 키가 작았던 준교가 어느 새 훌쩍 자라 이제는 은결을 내려다보게 되고...

준교 아버지의 죽음, 남편과 이혼하고 다시 친정으로 돌아 온 세주,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여러
개의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다가 결국은 주저 앉은 시호.

주변 사람들을 통해 로봇인 은결은 조금씩 인간의 감정을 느끼게 되는데...

로봇 은결이 진정한 사람다움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이 무척 아름답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한다. 하지 않는다. 하고 싶다. 하고 싶지 않다. 하고 싶지만 하지 않는다. 하고 싶지 않지만
해야 한다. 그때는 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하고 싶지 않은데 언제 다시 하고 싶어질지도 모른
다. 하다라는 기본형 동사에 따라붙어 나오는 수많은 분열체들 사이에 놓인 의미의 거리를
은결은 이론으로 익히긴 했으나 발화 시 오류가 따른다. 사람들 또한 직접 실행에 옮기거나
겪어보지 않고 글로만 배운 지식은 뜻대로 잘 활용하기 어렵다고 한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선 남의 그림을 보고 화풍을 외울 게 아니라 붓을 쥐어야 하며, 악기를 연주하기 위해선 악
보만 들여다볼 게 아니라 악기를 직접 잡아야 한다. (p 99)

무언가 묻거나 말하기 시작하면 그에게 관여하겠다는 것이다. 그를 온 몸으로 책임질 수 없
다면, 그의 짐을 나눠 지지 못할 것 같으면 그에 대해 궁금해해서는 안 된다. 그건 어림 반
푼어치 얄팍한 호기심에 지나지 않는다. 한 존재 한 생명을 전적으로 책임지면서 그녀가 가
장 먼저 알게 된 삶의 자세가 그것이다. (p 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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