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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리된 기억의 세계
고바야시 야스미 지음, 민경욱 옮김 / 하빌리스 / 2020년 4월
평점 :
뇌출혈로 수술을 받고 난 후 깨어나보니 제가 정상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건 왼쪽 팔다리와
인지기능과 언어기능이었습니다.
오른쪽 편마비와 단기기억 상실.
이제는 오랜 시간이 흘러 그럭저럭 익숙해졌지만 제일 불편한 것은 단기기억 상실이었습
니다.
했던 말을 또하고 해야 할 일을 잊어버리고 아이들 준비물을 제대로 챙겨주지 못했습니다.
초등학생이었던 아이들은 결국 엄마의 기억을 포기하고 스스로 해결해갔습니다.
결국 저만 해결하면 됐는데 그 해결책으로 찾은 것이 바로 블로그에 일기를 쓰는 것이었습
니다.
시간대별로 어떤 일을 했는지 기록하는 것입니다.
특히 약을 빼먹으면 절대 안 되기때문에 약을 먹고 난 후엔 약봉지를 사진으로 찍어 저장
했습니다.
그래서 제게 스마트폰은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물건입니다.
그런데, 저처럼 후천적인 병으로 인한 단기기억 상실이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모든 사람들
에게 단기기억 상실이 일어난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TV에서 뉴스를 방송하던 아나운서는 10분이 지나면 자기가 무슨 내용을 전달했는지 잊어
버리고, 수술을 하고 있던 의사는 10분이 지나면 자신이 수술방에서 메스를 들고 무슨 일
을 하고 있었는지 잊어버려 환자의 생명이 위독하고.
그야말로 온 세상이 공황상태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여고생 유키 리노는 어느날 자신의 기억이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문득 정신이 들어 보니 컴퓨터 화면엔 이상한 글이 잔뜩 써 있습니다.
자신이 썼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글이 시간대 별로 적혀 있어서 처음엔 자신이 다중인격
이 아닌지 의심합니다.
하지만 컴퓨터에 저장된 글이 자신이 쓴 글이 맞고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자신의 기억이
10분 정도의 짧은 시간만 유지하고 그 후엔 리셋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SNS를 통해 단기기억 상실이 전세계적으로 일어난다는 사실을 깨닫고 사람들에게 어떻
게 행동해야 할지 알려줍니다.
리노처럼 전세계적으로 단기기억 상실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깨달은 사람들은 인터넷상
에서 커뮤니티를 만들고 문명의 존속을 위해 다양한 제안을 제시하고 실천에 옮깁니다.
리노는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켤 때마다 '자신의 기억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앱을 만들자고 제안합니다.
리노처럼 기억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문명의 존속을 위해 처음으로 노력한
사람들을 '제1행동자'라고 부릅니다.
'제1행동자'들은 기억장애를 해결하기 위해 외부기억장치를 만들어냅니다. 뇌 내부의
단기 기억을 반도체 메모리에 기록하고 사용자가 말이나 영상을 떠올리면 외부기억
장치에서 관련 정보를 검색하여 뇌 내부로 가져와 말을 하게 됩니다.
대망각의 시간이 지나고 기억 장치의 소형화도 이루어져 새롭게 태어난 아이들은 자
신의 뇌로 장기 기억을 수행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신체 위치에 소켓을 설치하고 메
모리를 삽입해 살아가게 됩니다.
책에서는 대망각이 이루어졌을 때의 혼란과 어떻게 사람들이 그 위기를 극복했는지,
대밍각 이후 태어난 사람들의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자 몸에 꽂힌 소켓에 남자의 메모리를 꽂으니 자신을 남자로 인식한다는 내용, 죽은
사람의 메모리를 무당에게 꽂으면 무당이 죽은 사람의 기억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설정.
공부 잘하는 아이의 메모리를 잠시 빌려 대리시험을 친 후 그 아이를 사라지게 하는 범
죄를 저지른 의사.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미래에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
습니다.
부담없이 읽기에 좋은 소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