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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199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나'란 무엇인가? 할 일 없이 뒹굴 수 있는 한 나절도 제대로 가지지 못한 채 바쁘게만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이런 질문은 어떻게 보면 참으로 사치스러운 물음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깊은 산골 밤하늘 아래에서 날마다 두 시간이나 세 시간 동안 보초를 서는 군인들처럼 아무 할 일도, 할 수 있는 일도 없을 때는 이런 질문이 머리를 쳐들기도 합니다.
'나'란 무엇인가? 태어날 때 가졌던 세포는 남김없이 다 죽었고 새로운 세포가 바뀌어도 몇 번을 바뀌었을 테니 내 육체도 그 옛날의 '내'가 아닙니다. 내가 살아온 만여일 동안의 시간동안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날이 없으니 그 날을 살았던 대부분의 기억도 사라졌습니다. 비어버린 내 기억의 장애를 채울 수 있는 것은 몇 권의 일기, 몇 장의 사진, 그리고 내 과거를 대신 기억하고 있는 몇 명의 친구들. 하지만 일기와 사진과 친구들의 대화 속에 불려져나오는 '나'를 나는 기억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컴퓨터를 새로 한 대 샀습니다. 푼돈을 아껴 모아 산 컴퓨터이기 때문에 'honey'라는 애칭도 붙였습니다. 처음에는 아무 고장 없이 잘 굴러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당연히 이것저것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모니터를 새로운 것으로 교체하고, 키보드도 갈고, 램도 바꾸고, 그러다보니 처음에 가지고 있었던 컴퓨터 부품은 '하드디스크'를 빼고 남은 게 없습니다. 그런데 결국 하드디스크도 바이러스에 걸려 포맷을 하게 됐습니다. 그래도 이 컴퓨터는 내가 처음 샀던 'honey'일까요?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의 주인공 페드로는 기억상실증에 걸렸습니다. 페드로는 잃어버린 과거를 찾기 위해 실마리가 될 만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지만 결국 그들이 기억하고 있는 것은 지금의 나는 알 수 없는 또 하나의 타인일 뿐입니다.
페드로와 우리가 다른 점은 무엇일까요? 우리보다 페드로는 훨씬 가까운 과거를 훨씬 더 많이 잊고 있습니다. 그것 뿐이지요. 우리 역시 스틸사진처럼 저장되어 있는 몇 장의 기억 외에 가지고 있는 과거는 없습니다. 어떤 과거는 아무리 회복시키려 애써도 복원되지 않습니다. 당신은 83년 10월 18일 저녁 6시에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그리고 그것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 때의 당신은 지금의 당신과 어떤 관계입니까? 무엇으로 20년전의 당신을 지금의 당신과 동일 인물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모디아노의 소설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 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