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의 핀볼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 열림원 / 1997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1973년의 핀볼'은 하루끼의 데뷔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속편입니다. 속편이라고 하지만 전편의 이야기가 연장되는 것은 아니고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 나왔던 주인공들만 같을 뿐입니다. 또다른 이야기가 시작되지요. 쌍동이 자매니, 핀볼이니. 물론 하루끼의 도시적 허무는 여전합니다.

소설의 주인공인 '나'는 바 한구석에 있는 핀볼게임에 빠져듭니다. 핀볼이란 게 적당한 공간만 있고 이것저것 아무 게임기나 한 데 구겨넣으면 오락실이 되는 줄 알고있는 사장님한테나 관심있는 물건인줄 알았는데(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핀볼기계도 나름대로 계보가 있고, 그래서 명품도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미국에는 적잖은 핀볼 매니아가 있나 본데 그러고 보면 척 노리스가 나올 법한 미국 영화에서는 모래 먼지 나풀대는 시골 바에서 카우보이 모자가 핀볼을 튕기는 장면이 여지없이 등장합니다.

어쨌든 소설의 주인공이 사귀었던 핀볼머신(실제로 소설 속에서 주인공은 핀볼과 대화를 합니다)도 그런 명품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핀볼머신이 있던 오락실이 하루아침에 망해버렸고, 당연히 그 핀볼머신도 자취가 묘연해졌습니다. 어젯밤까지 옆에 누워있던 애인이 새벽녘에 메모 하나 없이 사라져버린 셈이지요. 망연자실해있던 주인공에게 그러나 구원의 메세지가 날아왔고, 도쿄 근처 시골에 사는 핀볼 수집가가 바로 그 핀볼기계를 소장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습니다. 그래서 '나'는 핀볼머신을 만나기 위해 택시를 타고 수집가가 안내해준 창고에 이르게 됩니다.

드디어 소설의 주인공이 오랫동안 헤어져있던 연인을 만납니다. 소설의 주인공이 핀볼머신을 만나는 이 장면. 이 장면이 소설, '1973년의 핀볼'의 백미입니다. 얼음창고에서 스며나온 차가운 공기를 가르고 암흑 속에 들어선 하루끼가 펑하고 전원 스위치를 올리는 순간 백대도 넘는 핀볼 기계가 사열하듯이 주인공에 눈 앞에 드러누워 있습니다. 하루끼의 놀라운 상상력 아닙니까? 눈만 감으면 장관이 펼쳐집니다. 이 드라마틱한 장소에서 '나'는 헤어졌던 애인과 조우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그리워했던 애인이었지만 막상 서로의 모습을 보자 서먹해집니다. 생활에 대한 자질구레한 몇 마디의 대화를 나눈 뒤 혹시라도 있을 지 모를 해후를 기약하며 '나'는 도쿄로 돌아옵니다.

핀볼머신이란 게 참 부질없는 오락거리입니다. 동전 몇 개를 집어넣고 레버로 공을 튕겨 점수를 올립니다. 그것도 고스톱이나 포커처럼 마주 보고 하는 게임이 아니라 어두운 조명 아래 다른 사람들과는 멀찍이 떨어져 혼자 하는 게임입니다. 최고 점수가 나왔다 하더라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 새로운 공간이 생겨납니다. 나만의 공간. 그 공간 속에서 또다른 나를 발견하고 대화합니다. 외부를 차단하고 자기만의 공간을 구축해나가는 주인공 '나'는 곧 하루끼, 그리고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루끼는 핀볼 머신을 1973년에만 만났지만 핀볼 머신의 아우라는 평생 작가와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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