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년생 다인이 작가정신 소설향 23
김종광 지음 / 작가정신 / 200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71년생 다인이지만 90학번 다인이기도 합니다. 90 학번. 앞대가리가 80년대 학번과 다르다고 해서 90들의 앞대가리가 되었냐하면 처신이 어줍잖아 80년대 학번에 꽁무니에 붙어 다니기 바빴습니다. 하지만 87년을 정점으로 폭풍처럼 몰아치던 학생운동도 그 때엔 이미 허덕이기 시작할 때였습니다. 그러다 91년 소련의 붕괴가 결정타였습니다. 학교 앞 전장을 누비던 무용담을 자랑스러워 하던 선배들이 당황해했습니다. 도마뱀의 꼬리처럼 열심히 꽁무니에 붙어다니던 90학번은 당황하기 보다는 황당했습니다.

'열심히 쫓아와, 달려, 달려!'해서 죽을 힘을 다해 따라왔는데 언덕을 넘어보니 약속의 땅 대신에 끝없는 사막만 펼쳐져 있었습니다. '어! 뭐야, 이거'하기는 80년대 학번들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러나 80년대 학번들은 역전의 용사답게 금세 전의를 가다듬고 새로운 조직을 구축했지요. 이른바 '386 세대'라는 것입니다. 뭉치고는 싶은데 이념은 안 먹힐 것같고, 이거 어쩌지? 하면서 잔머리를 굴리다 무릎을 탁 친 게 발로 '386'입니다.

'386 세대'라는 말 자체가 이제는 이념으로부터 자유로와 지고 싶은 80년대 학번의 심리를 묘하게 대변하고 있습니다. 이념은 없고 단지 80년대에 같이 학교를 다녔다는 이유로 이들 세대는 뭉쳤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통령에게 몇 학번이냐며 깐죽거리던 검사도 떳떳하게 자신을 386이라고 소개할 수 있습니다. 학생운동의 맥이 제대로 이어졌고 그래서 80년대 학번을 만약 전대협 세대라고 부른다면 짱돌 한번 안 던져봤을 그 검사가 '나, 전대협 세대요.'라고 할 수 있었을까요?

어쨌든 처세에 능한 386세대에 낄 수도 없는 게 90학번이었습니다. '386세대'라고 자기들끼리 똘똘 뭉치자 그럼 우리는요? 했더니 도마뱀 꼬리 자르듯 던져버리고 슬금슬금 도망가버렸습니다. 전대협 세대라고 불렸다면 비겁하게나마 엉덩이라도 비비고 들어갈 수 있었을텐데 이건 아예 법적으로 '386'이라고 못을 박아놨으니 엉덩이는 고사하고 머리카락 하나 들이밀 곳이 없습니다.

어쨌든 우리도 대학생활을, 20대를 정리해야 했습니다. 어떤 형식으로든 통과의례를 치르고 30줄에 첫 발을 디뎌야 했습니다. 최영미, 방현석을 비롯한 80년대 학번 작가들은 자신이 쫓던 이상과 현실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어 무척 고생을 했나 봅니다. 좌절하자니 앞으로의 창창한 삶이 억울하고, 시대에 발을 맞추자니 변절같이 느껴지고. 치열했던 대학생활 만큼 80년대 학번들은 그것을 벗어버리는 데도 엄청난 진통이 필요했습니다.

90학번은 어땠나요? 하지만 소설로만 놓고 보면 90학번의 통과의례는 한 번도 치뤄진 적이 없습니다. 아니 타석에는 들어섰는데 모조리 시범경기여서 제가 기억을 못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역시 90학번은 80년대 학번보다 치러야할 진통이 가벼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통과는 해야하는데 의례는 필요없고, 그냥 PASS! PASS! 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의례를 치르자니 80년대 학번들이 웃을 것 같기도 합니다.

이 때 지명타자로 타석에 등장한 작가가 90학번 김종광입니다. 쟤는 뭐야? 새로운 타자인가? 번트라도 댈 줄 아는 거야? 라고 관중들은 수근덕거리는 사이에 김종광 타자는 산뜻한 안타를 날렸습니다. 80년대 학번식의 무거움과 진지함을 벗어던지고 한 없는 가벼움과 경쾌한 스피드로 길고 긴 터널을 단숨에 통과해 버렸습니다. 80년대 학번들은 이 이념을 계속 품고 가야하나, 버리고 가야하나, 그도 아니면 버린 척 품고 가야하나로 고민했을 때 우리의 김종광은 까짓 이념 따윈 잊어버린 지가 오랩니다.

71년생 다인이에게 이념은 내 일기장의 한 페이지일 뿐이고, 그것에 발목 잡혀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촌스러운 짓 따위는 없습니다. 가히 '90학번식'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될 것 같습니다. 김종광 덕택에 90학번은 80년대 학번의 꽁무니였다는 꼬리표를 떼어버리고, 90년대 이후 학번을 이끄는 선봉이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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