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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의 분할 - 미학과 정치 ㅣ 바리에테 8
자크 랑시에르 지음, 오윤성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8년 2월
평점 :
품절
자크 랑시에르의 <감성의 분할>의 3장에 이런 제목의 글이 있다.
'기계 예술들에 대하여 그리고 익명인들의 미학적/과학적 지위 향상에 대하여'
여기서 언급되는 기계 예술이란 사진과 영화를 말하고, 익명인이란 어떤 민주적인 지위를 획득한 '미학적 주체'라고 보여지지만 나는 이를 미디어아트의 상황에도 적용하여 생각해 보려한다.
기계 예술들이 대중들에게, 보다 정확히 말해 익명의 개인에게 가시성을 줄 수 있기 위해서는, 그것들은 우선 예술들로서 인정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그것들은 우선 복제 또는 보급의 기술들과 다른 것으로서 실행되고 인정되어야 한다. 따라서 누구에게라도 가시성을 주는 것 그리고 사진과 영화가 예술들일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동일한 원리다. 우리는 정식을 뒤집을 수도 있다. 그러한 주제의 기록이 하나의 예술일 수 있는 것은 바로 익명인이 예술적 주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익명적인 것이 예술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특유한 아름다움의 운반자이기도 하다는 것, 그것은 미학적 예술 체제의 고유한 특징이다. (...) 미학적 예술 체제, 이것은 우선 재현의 체계의 붕괴, 다시 말해서 주제들의 품격이 재현의 장르들의 품격(귀족들을 위한 비극,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희극; 역사화 대 풍속화 등)을 지배하던 어떤 체계의 붕괴다. 재현의 체계는, 장르들과 더불어, 주제의 비천함 또는 고상함에 알맞은 표현 형태들과 상황들을 규정했다. 미학적 예술 체제는 주제와 재현 양식 사이의 이 상관항을 파괴한다.(...) 기술적 행동 방식─그것이 단어들의 사용이건 또는 카메라의 사용이건─이 예술에 속하는 것으로서 규정되기 위해서는 우선 그 주제가 예술에 속하는 것이어야 한다. (...) 사진 예술의 지위를 확보한 것은 지극히 순수한 주제들과 회화주의의 연조 효과들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평범함(스티글리츠의 <3등 선실>의 이주자들, 폴 스트랜드 또는 워커 에반스의 정면초상 사진들)의 인수assomption다. 한편으로, 기술 혁명은 미학 혁명 이후에 온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미학 혁명은 무엇보다도─사진적이거나 영화적이기 이전에 회화적이고 문화적인─평범한 것의 영예다.(pp.42-44)
평범한 것을 어떤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로, 어떤 신화적 또는 환영적 형상으로 만들기 위해 평범한 것을 그 명백함에서 떼어내면, 평범한 것은 참된 것의 흔적이 된다. 미학적 예술 체제에 속하는, 참된 것의 이러한 환영적 차원은 인문사회과학들의 비판적 패러다임의 구성에서 본질적인 역할을 했다. 상품을 그 사소한 외관에서 떼어내야 하고, 한 사회의 모순들에 대한 표현을 상품에서 읽기 위해 그 상품을 환영적 대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페티시즘에 대한 마르크스의 이론은 이에 대한 가장 돋보이는 증언이다.(p.46)
'예술에 속하는 것'을 다루면 그것이 예술이든 기술이든 예술이 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그런데 여기서 다소 애매한 것은 예술적 범주가 무엇인지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인데, 랑시에르는 '뉴 헤이븐의 생선 파는 익명의 작은 여인'과 같은, 즉 익명적 대상이자 평범한 대상의 구성이 곧 예술적 범주가 됨을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지위 향상의 성립은 사진이 회화와는 독립적인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회화에서 하지 않던 평범한 익명인을 미적 대상으로 다루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독창성'으로 말미암아 사진은 예술로서의 독립적인 지위를 확보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랑시에르는 이렇게 확보된 평범한 대상들이 가지고 있는 진실 또는 사실로서의 '명백함'을 떼어내면, 어떤 '환영적 형상'으로 탈바꿈시킬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평범함은 참됨 그 자체가 아니라 참됨의 '흔적'만이 남게 된다. 그런데 바로 이렇게 되는 것이 예술적으로 성립된다는 것은 오랜 재현의 역사이지 않은가? 인문사회과학이 바로 이러한 점들을 비판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그 대표적인 예로 마르크스의 이론을 드는 것이다. 상품을 상품 그 자체의 '상품성' 또는 '상품으로서의 가치'로 보지 않고 다른 가치를 투영시켜 보는 '페티시즘'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 말이다.
자, 이제 나의 주변 상황을 둘러보자. 특히 한국적 상황에서 미디어아트는 어떠한가?
내가 미디어아트를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2004년)의 상황과 지금은 얼마나 달라졌다고 보는가?
당시에 참조할 수 있는 문헌이나 작품들은 거의 미국과 유럽, 일본, 호주의 것들이었다.
2003년에 번역되어 나온 마이클 러시의 <뉴미디어아트>가 미디어아트를 다루는 책의 전부인 것 처럼 보일 정도 였다.
책의 영향인지 모르겠으나 2004년~2007년 까지는 미디어아트를 비디오아트, 라이트아트, 옵아트, 전자예술(electronic art) 등과 같은 선(先)-디지털(pre-digital) 형태의 예술들로 보고, 보다 디지털적인 특성을 추구하며, 그에 따른 여러 첨단 디지털 기술들을 사용하는 예술을 '뉴미디어아트'라는 말로 쓰려 했던 것으로 보였다. 그러니까 주로 새로운(novelty) 기술(특히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실험에 치우친 작품들이 많았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러한 기술 추구형 예술 형태는 어떤 획기적인 기술 발전 구현을 보여주는 몇몇 작품들─예를 들어, 그래픽 기술과 패턴인식 기술의 향상에 따른 최초의 상호작용적 예술을 보여줬던 마이론 크루거의 <Video Place>, 가상과 실재 사이의 간극에서 발생하는 모순된 실재 속의 환영적 체험을 일으키는 어떤 상호작용을 체현하게 하려 했던 제프리 쇼의 <Legible City> 등─을 제외하면, 기술의 구현에 급급한 작품들은 잘 기억되지 않고, 스스로 사장되어 갔음을 알 수 있었다. 반면에 로이 애스콧이나 사이먼 페니 처럼 어떤 미디어적 환경과 그에 따른 개념을 정초하면서 실행하는 예술적 실천들도 있었다. 내가 주로 경험한 국내의 미디어아트 작품들은 1차원적 상호작용성 구현과 디지털 기술의 구현 그 자체에 집중되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니 기억되는 국내 작품들이 별로 없는 실정이다.
랑시에르가 '기술혁명은 미학혁명 이후에 온다'한 말을 적용하여, 미디어아트가 개념미술과 그 영향을 받은 미니멀리즘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그런 전통을 잇고 있다는 가설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개념미술과 미니멀리즘을 어떤 예술 운동(movement)의 양상으로써 가히 '혁명'적인 것으로 본다면 지금 시대의 미디어아트는 복제 기술 이후의 새로운 '기술 혁명'이 도래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시대에 도래한 디지털 기술 혁명을 과거의 기술 혁명과는 차원이 다른 것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는데, 누구나 쉽게 디지털 기기를 소유하고 디지털 기술을 사용하여 '정보'의 생산 주체이자 소비 주체인 '프로슈머'라는 해석과 인터넷으로 인해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소통의 장이 되었다는 것에 일부 동의하면서도, 여전히 정보가 권력과 자본에 복속되어 있고 그것에 격차(digital divide)가 있어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소유할 수 있는 '공기(air)'처럼 100% 비물질화된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소소한 미디어아트는 예술적인 주제를 다루기만 한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스펙타클'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디어아트는 그 어떤 예술 보다도 자본과 권력에 종속적인 경향이 있다. (삼성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고 있는 이이남 작가나 12월 15일 김대중 컨벤션센터에서 열린다는 삼성 PAVV LED 주최/주관의 '라이프 인 하이퍼리얼-미디어아트 프로젝트'에 출품하는 박준범, 신기운, 정영훈 등의 작가들을 보면 그런 경향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이제 미디어아트는 TV와 영화 속에, 닌텐도 Wii나 DS와 같은 게임 속에, 박물관에 적용된 가시화기술 영상에, 큰 대로변의 미디어 폴(poll)과 건축물의 대형 LED 외관에 나아가 좀 더 과장하여 말하자면, 그것이 미디어아트라는 속성을 가진 것임을 알자마자 쉽게 '미디어아트'라 말할 수 있는 일상적 대상이 되었다. 만약 아직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지라도, 그렇게 될 날이 머지 않았다. 결국 미디어 플랫폼의 홍수 속에 놓이게 될 것인데, 그런 환경이 마련된 이후에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일상화 되어 진부함의 나락으로 떨어질 위험의 절벽 끝에서 매체들 속에서 '익명적'인 것에 의한 어떤 '비자발적인 경험'들을 안겨주어 그것이 곧 예술임을 발견할 수 있는 새로운 예술 교육이 필요한 것일까? 그것이 앞으로 '미디어아트 전공자'로써 해결해야 할 일이 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