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혁명의 미래 - 디지털 기억 혁명은 우리의 미래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
고든 벨.짐 겜멜 지음, 홍성준 옮김 / 청림출판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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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라이프 로깅"
잃어버리는 기억들에 대해서 단 1초도 놓치지 않고 기록을 해 두었다가,
필요한 기억을 다시 되살릴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 과연 좋은가?

이런 라이프 로깅 프로젝트는 급진적이면서도 기술결정론적이다.
그러니까 이 기술이 더나은 삶을 제공해 줄 것이라는 장미빛 믿음을 강요하는 것이다.
물건에 대해 너무 많이 쌓아두고 있기 보다는 잘 버려야 잘 산다는 말이 있다.
내 생각엔 기억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생물학적, 인지과학적인 한계 때문에 모든 기억을 100% 담고 있을 수는 없다.
특히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는 치명적인 기억은 오히려 잊혀지는게 더 낳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모든 기억들에 대해 우선 100%로 기록을 하고,
필요에 따라 꺼내쓴다니...

당장 생각나는 문제거리만 해도 여간 골치아픈게 아니다.
개인의 사생활 문제도 그렇고 정보의 관리와 보안 문제 심각하지 않을 수 없다.
단순히 휴대폰 번호와 주민번호 누출되서 생기는 피해들과는 다른 형태의 신종 피해사례들이
쏟아져 나올 것 같다고 예상된다.
특히 이런 정보들은 사회적 능력에 따라 차등적으로 차지할 수 밖에 없는 구조이기 때문에
더욱 더 위험하기 그지 없다. 결국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은 더욱 더 정교한 지배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아마도 빌 게이츠는 인간의 더 나은 삶을 생각해서 이런 서비스를 만들려고 한다기 보다는,
또 다른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 사업화 하려는 목적 때문인 것으로 생각이 많이 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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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을 생각한다
김용철 지음 / 사회평론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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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은 한번 오르기도 힘든 세계 1위의 자리에 오른 기업이니 함부로 물어뜯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다.

대한민국은 오래전 부터 세계 초일류 국가의 대열에 오르려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해왔다.
그런데 그렇게 1위의 자리를 갖기 위해 달려온 지난 날을 다시 되새겨 볼 일이다.
아마도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고백도, 그리고 한참이나 지나서야 출간된 이 책은 조금 늦었다
싶은 마음이 있다. 하지만 우리 각자의 마음에 삼성에 대해 그리고 무한경쟁을 종용하는
사회 시스템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 보게 하기에 적절한 시기가 아닌가 한다.

이 책에 나오는 내용이 모두 사실이냐고 한탄하는 사람도 있어 보인다.
부조리에 대해 뒤에서 남 모르게 욕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당당하고 용기있게 실토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가진 김용철씨에게 다시 한번 박수를 보낸다.

이 책이 단지 삼성을 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삼성스럽지 않으면서도 함께하는 삶에 대해서
다른 대안적인 방식들을 꾸리는데 공부가 되는 책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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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 최대의 쇼 - 진화가 펼쳐낸 경이롭고 찬란한 생명의 역사
리처드 도킨스 지음, 김명남 옮김 / 김영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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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된 번역에 칭찬하고 싶은 책. but 도킨스식의 사고가 여전히 찜찜한 것은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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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의 분할 - 미학과 정치 바리에테 8
자크 랑시에르 지음, 오윤성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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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랑시에르의 <감성의 분할>의 3장에 이런 제목의 글이 있다.
'기계 예술들에 대하여 그리고 익명인들의 미학적/과학적 지위 향상에 대하여'

여기서 언급되는 기계 예술이란 사진과 영화를 말하고, 익명인이란 어떤 민주적인 지위를 획득한 '미학적 주체'라고 보여지지만 나는 이를 미디어아트의 상황에도 적용하여 생각해 보려한다.

기계 예술들이 대중들에게, 보다 정확히 말해 익명의 개인에게 가시성을 줄 수 있기 위해서는, 그것들은 우선 예술들로서 인정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그것들은 우선 복제 또는 보급의 기술들과 다른 것으로서 실행되고 인정되어야 한다. 따라서 누구에게라도 가시성을 주는 것 그리고 사진과 영화가 예술들일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동일한 원리다. 우리는 정식을 뒤집을 수도 있다. 그러한 주제의 기록이 하나의 예술일 수 있는 것은 바로 익명인이 예술적 주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익명적인 것이 예술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특유한 아름다움의 운반자이기도 하다는 것, 그것은 미학적 예술 체제의 고유한 특징이다. (...) 미학적 예술 체제, 이것은 우선 재현의 체계의 붕괴, 다시 말해서 주제들의 품격이 재현의 장르들의 품격(귀족들을 위한 비극,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희극; 역사화 대 풍속화 등)을 지배하던 어떤 체계의 붕괴다. 재현의 체계는, 장르들과 더불어, 주제의 비천함 또는 고상함에 알맞은 표현 형태들과 상황들을 규정했다. 미학적 예술 체제는 주제와 재현 양식 사이의 이 상관항을 파괴한다.(...) 기술적 행동 방식─그것이 단어들의 사용이건 또는 카메라의 사용이건─이 예술에 속하는 것으로서 규정되기 위해서는 우선 그 주제가 예술에 속하는 것이어야 한다. (...) 사진 예술의 지위를 확보한 것은 지극히 순수한 주제들과 회화주의의 연조 효과들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평범함(스티글리츠의 <3등 선실>의 이주자들, 폴 스트랜드 또는 워커 에반스의 정면초상 사진들)의 인수assomption다. 한편으로, 기술 혁명은 미학 혁명 이후에 온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미학 혁명은 무엇보다도─사진적이거나 영화적이기 이전에 회화적이고 문화적인─평범한 것의 영예다.(pp.42-44)

평범한 것을 어떤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로, 어떤 신화적 또는 환영적 형상으로 만들기 위해 평범한 것을 그 명백함에서 떼어내면, 평범한 것은 참된 것의 흔적이 된다. 미학적 예술 체제에 속하는, 참된 것의 이러한 환영적 차원은 인문사회과학들의 비판적 패러다임의 구성에서 본질적인 역할을 했다. 상품을 그 사소한 외관에서 떼어내야 하고, 한 사회의 모순들에 대한 표현을 상품에서 읽기 위해 그 상품을 환영적 대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페티시즘에 대한 마르크스의 이론은 이에 대한 가장 돋보이는 증언이다.(p.46)

'예술에 속하는 것'을 다루면 그것이 예술이든 기술이든 예술이 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그런데 여기서 다소 애매한 것은 예술적 범주가 무엇인지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인데, 랑시에르는 '뉴 헤이븐의 생선 파는 익명의 작은 여인'과 같은, 즉 익명적 대상이자 평범한 대상의 구성이 곧 예술적 범주가 됨을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지위 향상의 성립은 사진이 회화와는 독립적인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회화에서 하지 않던 평범한 익명인을 미적 대상으로 다루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독창성'으로 말미암아 사진은 예술로서의 독립적인 지위를 확보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랑시에르는 이렇게 확보된 평범한 대상들이 가지고 있는 진실 또는 사실로서의 '명백함'을 떼어내면, 어떤 '환영적 형상'으로 탈바꿈시킬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평범함은 참됨 그 자체가 아니라 참됨의 '흔적'만이 남게 된다. 그런데 바로 이렇게 되는 것이 예술적으로 성립된다는 것은 오랜 재현의 역사이지 않은가? 인문사회과학이 바로 이러한 점들을 비판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그 대표적인 예로 마르크스의 이론을 드는 것이다. 상품을 상품 그 자체의 '상품성' 또는 '상품으로서의 가치'로 보지 않고 다른 가치를 투영시켜 보는 '페티시즘'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 말이다.

자, 이제 나의 주변 상황을 둘러보자. 특히 한국적 상황에서 미디어아트는 어떠한가?
내가 미디어아트를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2004년)의 상황과 지금은 얼마나 달라졌다고 보는가?
당시에 참조할 수 있는 문헌이나 작품들은 거의 미국과 유럽, 일본, 호주의 것들이었다.
2003년에 번역되어 나온 마이클 러시의 <뉴미디어아트>가 미디어아트를 다루는 책의 전부인 것 처럼 보일 정도 였다.
책의 영향인지 모르겠으나 2004년~2007년 까지는 미디어아트를 비디오아트, 라이트아트, 옵아트, 전자예술(electronic art) 등과 같은 선(先)-디지털(pre-digital) 형태의 예술들로 보고, 보다 디지털적인 특성을 추구하며, 그에 따른 여러 첨단 디지털 기술들을 사용하는 예술을 '뉴미디어아트'라는 말로 쓰려 했던 것으로 보였다. 그러니까 주로 새로운(novelty) 기술(특히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실험에  치우친 작품들이 많았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러한 기술 추구형 예술 형태는 어떤 획기적인 기술 발전 구현을 보여주는 몇몇 작품들─예를 들어, 그래픽 기술과 패턴인식 기술의 향상에 따른 최초의 상호작용적 예술을 보여줬던 마이론 크루거의 <Video Place>, 가상과 실재 사이의 간극에서 발생하는 모순된 실재 속의 환영적 체험을 일으키는 어떤 상호작용을 체현하게 하려 했던 제프리 쇼의 <Legible City> 등─을 제외하면, 기술의 구현에 급급한 작품들은 잘 기억되지 않고, 스스로 사장되어 갔음을 알 수 있었다. 반면에 로이 애스콧이나 사이먼 페니 처럼 어떤 미디어적 환경과 그에 따른 개념을 정초하면서 실행하는 예술적 실천들도 있었다. 내가 주로 경험한 국내의  미디어아트 작품들은 1차원적 상호작용성 구현과 디지털 기술의 구현 그 자체에 집중되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니 기억되는 국내 작품들이 별로 없는 실정이다.

랑시에르가 '기술혁명은 미학혁명 이후에 온다'한 말을 적용하여, 미디어아트가 개념미술과 그 영향을 받은 미니멀리즘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그런 전통을 잇고 있다는 가설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개념미술과 미니멀리즘을 어떤 예술 운동(movement)의 양상으로써 가히 '혁명'적인 것으로 본다면 지금 시대의 미디어아트는 복제 기술 이후의 새로운 '기술 혁명'이 도래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시대에 도래한 디지털 기술 혁명을 과거의 기술 혁명과는 차원이 다른 것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는데, 누구나 쉽게 디지털 기기를 소유하고 디지털 기술을 사용하여 '정보'의 생산 주체이자 소비 주체인 '프로슈머'라는 해석과 인터넷으로 인해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소통의 장이 되었다는 것에 일부 동의하면서도, 여전히 정보가 권력과 자본에 복속되어 있고 그것에 격차(digital divide)가 있어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소유할 수 있는 '공기(air)'처럼 100% 비물질화된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소소한 미디어아트는 예술적인 주제를 다루기만 한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스펙타클'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디어아트는 그 어떤 예술 보다도 자본과 권력에 종속적인 경향이 있다. (삼성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고 있는 이이남 작가나 12월 15일 김대중 컨벤션센터에서 열린다는 삼성 PAVV LED 주최/주관의 '라이프 인 하이퍼리얼-미디어아트 프로젝트'에 출품하는 박준범, 신기운, 정영훈 등의 작가들을 보면 그런 경향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이제 미디어아트는 TV와 영화 속에, 닌텐도 Wii나 DS와 같은 게임 속에, 박물관에 적용된 가시화기술 영상에, 큰 대로변의 미디어 폴(poll)과 건축물의 대형 LED 외관에 나아가 좀 더 과장하여 말하자면, 그것이 미디어아트라는 속성을 가진 것임을 알자마자 쉽게 '미디어아트'라 말할 수 있는 일상적 대상이 되었다. 만약 아직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지라도, 그렇게 될 날이 머지 않았다. 결국 미디어 플랫폼의 홍수 속에 놓이게 될 것인데, 그런 환경이 마련된 이후에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일상화 되어 진부함의 나락으로 떨어질 위험의 절벽 끝에서 매체들 속에서 '익명적'인 것에 의한 어떤 '비자발적인 경험'들을 안겨주어 그것이 곧 예술임을 발견할 수 있는 새로운 예술 교육이 필요한 것일까? 그것이 앞으로 '미디어아트 전공자'로써 해결해야 할 일이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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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잘 쓰는 방법 움베르토 에코 마니아 컬렉션 9
움베르토 에코 지음, 김운찬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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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움베르토 에코가 이런 책을 썼다는 것에 대한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면서 무척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의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한 진단과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사뭇 현실적이면서도 진지한 이야기가 계속 고개를 끄떡이게 했다. 그리고 어떤 자신감 같은 것을 함께 부여해 주고 있는 좋은 책이라 여겨져 소개하고자 한다.

*졸업논문 작성을 위한 네 가지 명백한 규칙
1) 테마가 지원자의 관심에 상응할 것 : 지원자가 치른 시험 유형과 독서 유형, 정치/문화/종교적 환경과 연결되어 있을 것
2) 준거로 할 출전들이 입수 가능할 것
3) 준거로 할 출전들이 쉽게 다룰 수 있을 것 : 지원자의 교양능력에 합당한 자료여야 함
4) 연구의 방법론적 범주가 지원자의 경험 영역에 해당할 것

*테마의 선택에 있어서...
분야를 제한할수록 작업은 더욱 잘 이루어지고 더욱 확실하게 진행된다는 것이 기본 원리이다.

*논문 작성에는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가
3년 이상도 안되고 6개월 이하도 안 된다.
만약 3년 안에 테마를 확정하고 필요한 자료 수집을 못했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경우 때문일 것이다.
1) 우리의 능력을 넘어선 잘못된 논문을 선택했다.
2) 모든 것을 말하고자 하는 불만족감이 있다. 그러면 20년 동안 논문 작업을 계속하게 된다.
3) 논문에 대한 노이로제가 시작되었다. 즉 논문을 포기했다가, 다시 시작했다가, 실현이 불가능하다고 느꼈다가, 절망상태에 빠졌다가, 논문을 여러 가지 비열함의 알리바이로 이용하다가, 결국은 절대 졸업을 하지 못하게 된다.

* 논문은 최소한 자기 생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방법을 배우는 데 도움이 된다.

* 논문을 단기간 내에 쓰고 싶을 때 (준비기간) 6개월짜리 논문의 필요조건
1) 테마가 한정되어야 한다.
2) 테마는 가능하다면 현대의 테마가 되어야 한다. 참고 문헌들을 통해 언급된 역사가 비교적 짧거나, 관련 주제가 비교적 독창적인 것이어야 하기에...
3) 모든 종류의 자료들은 손쉽게 참조할 수 있고, 제한된 범위 안에서 활용될 수 있어야 한다.

* 과학적 논문일 경우 과학성이란 무엇인가
1) 다른 사람도 인정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정의되거나 인정되는 것을 대상으로 한다.
2) 연구 대상에 대해 전혀 언급되지 않은 것들을 말하거나 또는 이미 언급된 것들을 다른 시각에서 재조명해야 한다.
    - 편집 논문 역시 과학적으로 유용한 것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편집자는 동일한 테마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이미 발표한 견해들을 모아 유기적으로 연결시키기 때문이다.
3) 연구는 다른 사람들에게 유용해야 한다.
4) 연구는 그것이 제시하는 가설들의 검증 및 반증을 밝혀 줄 요소들을 제공해야 한다.
   - 그 연구의 공개적인 지속을 위한 요소들을 제공해야 한다.

책에서 읽은 내용들을 바탕으로 지금 내가 해야할 일을 정리해 보면 이런 결론이 나온다.
1) 독창적이거나 재해석의 여지가 있고, 남들에게 유용하기도 한 한정된 테마의 관심 주제를 먼저 정해야 한다.
2) 그래야만 모든 것을 말하고자 하는 불만족감으로 부터 해방될 수 있다. 사실 다 알 수도 없고 다 알 필요도 없지 않은가...
3) 논문 쓰기가 기억력 훈련의 하나라고도 볼 수 있으므로 관련 주제에 대한 준거가 되는 자료들을 잘 기록을 해둘 필요가 있다.
참고도서, 참고논문, 참고사이트 이런 것들을 유기적으로 묶어줄 수 있는 '마인드 맵'류의 훌륭한 툴이 있으니 도움을 받자.
개인적으로는 Concept Leader의 도움을 미약하게나마 받고 있다가, 얼마전 연구실 동료 선생님의 도움으로 디자인과 유기적인 링크, 배포에 더 뛰어난 MindJet; Mind Manager로 바꿨다.
트라이얼 버전을 아래 링크에서 다운로드 할 수 있다.
http://www.mindjet.com/products/mindmanager-8-win/overview

음... 어서 빨리 '논문에 대한 노이로제'로부터 해방되고 싶다. 더이상 내 상황을  '비열함의 알리바이'가 되도록 놔둘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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