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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과학/예술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17년 연속 예일대 최고의 명강의 ‘DEATH’가 책으로 나왔다. 하버드대 ‘정의’및 ‘행복’과 함께 ‘아이비리그 3대 명강’으로 불리는 강의다. 그동안 우리가 생각해왔던 심리적 믿음과 종교적 해석을 완전히 배제하고 오직 논리와 이성으로 죽음의 본질과 삶의 의미를 고찰한다.

 

예전에 Snow라는 곳에서 이 강의를 본 적이 있다. 웰다잉이 화두인 요즘에 이 책을 읽어보고 싶다. 웰다잉이 곧 웰빙 아닐까? 가깝고도 먼 죽음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보자. 

 

 

 

 

 

 

그는 이 책에서 미국 역대 대통령들이 내놓은 잘못된 정책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장에서 미군들이 보여준 비극적이고 천박한 행동들, 부자들과 권력자들의 이익을 위해 희생당하는 노동자의 역경 등을 낱낱이 파헤치고 있다. 하워드 진의 역사적 투명성과 흔들림 없는 긍정주의 그리고 첨예한 질문들은 이번 책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 대선을 앞 둔 시점, 이 책이 읽고 싶어졌다. 대통령들은 지금까지 어떤 거짓말을 해왔고, 앞으로 어떤 거짓말을 할 것인가?
과연 하워드진의 말처럼 역사는 아래로 부터 이뤄질 것인가?

 

 

 

 

 

세계적인 사회학자 부부가 밝히는 글로벌 시대의 성, 사랑, 가족. ‘지구화’는 우리 삶에 무엇을 가져왔는가? 그것은 ‘금융 위기’, ‘언어의 위기’를 넘어 ‘가족의 위기’와 ‘개인의 위기’로 확산, 심화되고 있다. 그리하여 가족은 힐링과 위안의 최후의 안식처가 아니라 ‘사랑’을 둘러싼 온갖 카오스의 진앙이 되고 있다.

 

가족은 힐링과 위안의 안식처인가? 아니면 카오스의 진앙인가?

21세기 우리의 사랑의 아름다움은 존재하는 것일까?

율리히 백의 위험사회를 읽고나서 더욱 이 책에 관심이 간다.

 

 

 

대규모의 중앙 집중적 시스템은 ‘개발’이란 미명 하에 지구를 병들게 하고, 부족한 자원을 더 차지하기 위해 약소국을 착취하며, 인간 본연의 생활양식을 깨뜨려 문화와 가치관을 파괴시켜왔다. 경제 논리만을 앞세워 각 국가의 국민이 누려야 할 최소한의 삶의 질마저 외면하도록 만들었다. 이런 시스템으로는 우리가 사는 세계가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다. 양적인 성장은 분명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행복한가? 행복하지 않은가?

행복하지 않다면 왜 행복하지 않은가? 어떻게 행복해 질 수 있을까?

<오래된 미래>의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신작. ‘세계화’를 둘러싼 불편한 진실들을 파헤친다. 우리의 미래, 우리의 공동체, 그리고 진정한 삶의 목적을 생각해보는 계기를 가져보고 싶다.

 

자화상은 자아를 드러내야 하는 작가에 대한 요구이면서 풍부한 자아 인식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자화상은 예술에서 가장 뿌리 깊으면서도 가장 앞선 회화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주제가 되는 인물의 겉과 속을 오가며 그 두 개의 자아를 불가분의 영속적인 존재로 재창조한다. 즉, 자화상은 한 편의 예술작품이면서 그것을 빚은 창조자의 이미지이며 그가 자신에 대해 느끼고 상상하고 믿었던 것이 무엇이며 그 가운데 무엇을 선택했는가에 대한 진실의 요체이다.

 

그렇다. 자화상은 나 스스로가 나를 보는 방법이다. 화가들의 자화상은 어떠할까? 어떤 식으로 자신을 이해하고 표현 했을까? 그들의 자화상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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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식의 종말
제레미 리프킨 지음, 신현승 옮김 / 시공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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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은, 옛 인도의 대서사시 마하바라타에 나오는 글이다. <육식의 종말>을 읽을 때 이 말이 머리에 스쳐 지나갔다. <육식의 종말>의 저자 제레미리프킨은 미국의 세계적 경제학자이자, 문명 비평가이다. <육식의 종말>은 쇠고기의 숨겨진 이면을 잘 보여 준다. 저자는 우리가 쇠고기를 먹기 시작하면서 많은 문제가 파생 되었고, 그것은 여러 분야에 걸쳐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다고 말한다. 이 책이 나온 지 꽤나 되었으나, 채식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그리고 대학생 기자단 활동으로 채식에 대한 컨텐츠(http://blog.besunny.com/1188 관심 있으면 읽어 보시길) 를 쓰게 되면서 다시 읽어보게 되었다. 그 전에는 그저 그려러니 하고 훑어보았지만, 채식과 동물해방에 대한 관심을 갖고 나서부터 읽었던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 이나 피터싱어의 <동물해방> 같은 책과 언뜻 언뜻 비교하며 읽기도 했다.

  

   사실 이 책은 한국어 번역처럼 육식의 종말이라는 뜻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정확히 말해 이 책은 육식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소에 대한 문화인류학적 고찰이 좀 더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처음에는 서양 문화권에서 형성된 소에 대한 가치와 태도를 훑어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미국 역사에서 드넓은 목초지가 추악한 자본에 의해 소떼로 점령당하게 되는 과정이 환경을 어떻게 황폐화시켰는지 설명한다. 마지막으로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를 인용해 육식을 즐기는 사람들의 의식구조와 호전적 문화까지 분석한다. 저자는 서부 개척에 대한 신화 이면에는 아메리칸 인디언에 대한 잔인한 살육과 추방, 버팔로 학살, 공유지를 사유지로 만드는 강제적인 인클로저, 중남미에 대한 착취 같은 추악한 진실이 숨어있다고 말한다. 또한 구조주의 분석을 통해 육식을 즐기는 사람들, 육식을 즐기는 문화의 호전성과 남성 우월주의, 계급주의를 비판하였다. 그리고 이 책은 미국 내 소고기 산업과 햄버거 산업의 유착을 파헤치고, 추악한 자본의 이기심이 지구 환경을 얼마나 오염시키고 있는지를 논한다. 현대문명에서 쇠고기 산업은 각종 제도와 시설로 포장하여 실체를 잘 드러내지 않는 차가운 악(cold evil)이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잘게 부수어져 내가 고기를 먹고 있는지조차도 알 수 없게 가공하고 포장한다.

  

   쇠고기를 먹음으로 인해 야기된 문제는 마치 나비효과와 흡사하다. 전혀 연관되지 않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많이 연관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기아문제를 예로 들 수 있다.

 

농업분야에서 대풍작을 기록했던 1950년부터 1985년 사이에 미국과 유럽에서 2/3나 증가한 곡물 생산은 사료 곡물 재배에서 이루어 졌고, 그 중 대부분은 소 사육에 사용되었다. 곡물 재배에 사용되는 1 에이커 토지는 육류 생산에 사용되는 1에이커 토지보다 5배 많은 단백질을 생산 할 수 있다. 콩류(대두, 완두콩, 렌즈콩)을 심으면 10배 많은 단백질을 생산하며, 잎이 많은 야채를 심으면 15배 많은 단백질을 생산하고, 시금치를 심으면 쇠고기 생산에 사용되는 1에이커의 토지에 비해 무려 26배나 많은 단백질을 생산할 수 있다.

 

 

저자는 기아의 문제는 물론이거니와 소 사육으로 인해 생태계는 파괴되고, 인간은 온갖 병에 시달리고 있다고 하였다. 또한 21세기에는 인류가 이러한 것을 극복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끝을 맺는다. 지구상에서 축산 단지들을 해체시키고 인류의 음식에서 그 것을 제외하는 것이야말로 향후 수 십 년 동안 우리가 이루어야 할 중요한 과업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우리가 소 도축을 금해야하는 이유를 지극히 인간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인간이 병에 시달리지 않으며 생태계를 보존하여 조금 더 평화로운 삶을 위해서이다. 그러나 쇠고기의 도축, 아니 더 나아가 육식을 금해야 하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생명 존엄성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우리에게는 여자를 불태워 죽이는 것, 흑인을 때려죽이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시대가 있었다. 또한 지금 우리는 돼지 한 마리 죽이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피터싱어의 견해를 빌려 말한다면 첫 번째는 성(sex)차별주의, 두 번째는 인종(race)차별주의, 세 번째는 종(species)차별주의이다. 우리는 여자에게도 흑인에게도 존엄성이 있다는 당연한 진리를 우리가 이해하고 실천하는데 수 백 년이 걸렸다. 이제 우리는 언젠가는 당연한 진리가 '' 동물의 존엄성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동물 역시 감정을 갖는다. 기뻐하고, 슬퍼하며 때로는 눈물을 보인다. 인간이 조금 더 똑똑하다는 이유로 동물의 생사여탈을 결정할 권리를 가진다면 수 있는가? 도대체 어떠한 명분으로 이러한 행동이 정당화 될 수 있는가? 남자라는 이유로, 백인이라는 이유로 어떤 존재가 존엄성을 획득할 뿐만 아니라, 여자와 흑인의 생사여탈을 결정할 권리를 가진다면, 우리는 그것은 불의이고, 가장 끔찍한 차별이라며 항거할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라는 이유로, 지능이 높다는 이유로 우리는 존엄성을 획득할 뿐만 아니라, 동물의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왜, 이것을 불의라고 말하지 않으며, 우리는 왜, 이것은 끔찍한 차별이므로 항거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가?

  

   어떤 사람들은 식문화에 대해 본인의 가치관과 생각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말은 굉장히 진보적인 발언인 것처럼 들리고 다원주의를 존중하는 문명인의 모습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커다란 오류가 숨어 있다. 다원주의는 다른 존재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하는 관용(tolerantia)의 정신을 전제로 한다. 관용(tolerantia)이란 나와 다른 존재, 사상, 견해, 종교, 삶의 방식들에 대하여 그 가치와 정당성을 존중해주는 정신을 말하는 것이다. 과연 관용의 한계는 어디인가? 여기에 아주 정확한 대답이 있다. "다른 모든 것을 관용(Tolerance)해도 불관용(Intolerance)을 관용할 순 없다. 바로 이것이 다원주의의 대전제이다. 다른 존재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고 배제하며 핍박하는 정신까지 관용하는 것은 결코 다원주의가 아니다. 육식은 동물의 자유와 삶의 권리를 명백하게 억압 하고 있기 때문에 결코 관용의 대상이 될 수 없다. , 앵똘레랑스는 똘레랑스의 대상이 아니라는 뜻이다. '인간의 존엄성'이란, 우리 스스로의 발명품은 아니였을까? 그 대신 우리는 그것을 생명 존엄성이라 표현하는 것은 어떠한가? '생명의 존엄성'이라는 말에는 그 어떤 단서가 붙어서는 안 된다. 이제는 인간 종(human species)이라는 오래된 의식의 벽을 부수고 보다 많은 존재를 향해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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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1-10-13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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