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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파워
김익현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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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득하니 정독할 만한 책은 아니다. 하지만, 엔트로피를 극단으로 치닫게 하는 사이버 공간에 하나의 이정표를 던져주는 책. 바로 김익현 씨의 <블로그 파워>다. 한 인터넷 카페를 통해 알게된 김종민 씨가 나에게 준 책. 철학서가 아니면 눈으로 스캔하듯 읽는 나의 독서 습관이 이 책에서도 나타났다. 하지만, 저자가 충분한 사례를 들어 내용을 정리하고 있어 주요내용은 놓치지 않았다.  

블로그 파워. 이미 2년이 다되어가는 책이지만, 이 책은 아직도 유효하다. '블로그 최대한 활용하기' 혹은 좀 더 거창하게 말하자면, '풀뿌리 저널리즘의 실천' 정도로 요약이 될까. 너도 나도 나의 블로그를 관리하기 위해 타인의 블로그를 엿보고 있는 요즘, 풀뿌리 저널리즘을 실천한다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처럼 보인다. 하지만, 누구나 말을 할 수 있는 것처럼, 누구나 판단을 할 수가 있어, 도대체 무엇이 옳은 것인지 해답을 내리기 더욱 애매한 지금이다. 표현의 주체는 있으되, 판단의 주체가 없는 상황. 지금 우리가 처한 21세기의 모습이다.

정보와 텍스트의 과잉 속에서도 왜 우리는 블로그에 매달리는 것일까. 

저자는 그 대답을 직접적으로 내뱉는 대신, 블로그의 힘을 암시하며 한 발짝 슬쩍 나아간다. 

"우리가 탁월한 선동가의 열정적인 연설보다 친한 이웃의 어눌한 말에 더 쉽게 공감하게 되는 것처럼, 평소 블로그 공간을 통해 신뢰를 주고받은 이웃들을 통해 전파되는 수많은 의제들은 때론 흩어져 있던 블로그를 하나로 모으는 강력한 힘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블로그 파워>는 그 힘을 파헤친 책이다" 

이제 이 책을 몇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스케치해본다. 

람 팍스(Salam Pax) = 블로그를 주제로 하는 책들이 거의 모두 빼놓지 않고 언급하는 인물. 살람 팍스. 'Where is Raed?'라는 블로그로 전세계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던 사람이다. 이라크 전쟁이 시작되던 지난 2003년 3월, 살람 팍스라는 필명을 가진 한 이라크 청년은 자신의 블로그에서 언론이 외면하고 있는 현지의 숨가쁜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이렇게 조심스레 올려진 인터넷 일기는 '21세기판 안네의 일기'로 묘사되기도 했다.

이터 스모그(Data smog) =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보부족이 아니라 정보 과잉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움베르토 에코는 '지나치게 많은 정보는 없는 정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정보 수집능력보다 중요한 것이 정보여과 능력이라는 것. 뉴스를 여기저기서 모아오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것들을 편집할 수 있는 능력이 더욱 중요하다. 에코에 따르면 "먼저 정보를 사용하는 방법을 배운 다음, 그걸 절제있게 사용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삭제의 기술은 도덕 및 이론 철학의 지류들 중 하나가 될 것이다".(이 책 45쪽에서 재인용) 

로고스피어(Blogosphere) = 모든 블로그들, 혹은 커뮤니티나 사회 연결망으로서의 블로그를 지칭하는 용어. 1999년 9월10일 브래드 그레이엄이란 블로거가 약간은 장난스럽게 처음 사용한 용어. 그 뒤 2002년 우리리엄 퀵이 다시 사용하면서 블로그 세계를 묘사하는일반 용어로 자리잡음. 

이러한 상황과 맥락 하에서, 

저자는 RSS(Really simple eyndication), 트랙백 등 블로그와 블로그를 이어주는 기능을 설명하고 있으며, 최근 블로그 공간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보과잉추방운동'인 '텍스트지향운동'을 소개하고 있다. 정확한 표현, 정확한 출처 표기를 권장하자는 운동이다.  

이처럼, 블로그 사용법, 블로거들이 서로 연대할 수 있는 기술적 방법, 그러한 과정에서 건강한 블로그 문화 정착을 위한 텍스트 지향운동 등을 설명하며 저자가 지향하는 목표는 무엇일까.

풀뿌리 민주주의이며, 1인 저널리즘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 그는 댄 길모어 前 새너제이 머큐리 뉴스의 IT 전문 기자의 경우를 벤치마킹한다. 저자의 서술을 따라가면, 댄 길모어는 "자신이 쓰려는 칼럼의 주제와 배경 이야기를 자신의 블로그에 미리 올려놓은 뒤 이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과 코멘트를 참고해 완성된 칼럼을 작성했다. 이런 방법을 통해 댄 길모어는 자기 혼자 힘으로 칼럼을 쓸 때보다 훨씬 풍부하고 폭넓은 글을 쓸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길모어는 이 같은 자신의 실험을 오픈소스 저널리즘이라고 부르고 있다".
 
분명, 블로그는 기성 매체 보다 참신한 형식과 내용의 텍스트를 생산해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현존하는 매체의 권력에 어떻게 틈새를 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저자 역시 오픈소스 저널리즘의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것은 블로그의 힘이 미약하다는 것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블로그를 보다 효과적으로 활용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한 책.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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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 - 피귀르 미틱 총서 8
자크 아순 책임편집, 고광식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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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아담과 하와의 자식은 둘이 있었다. 아벨과 카인.

어떻게 보면, 아벨은 아무런 이유없이 야훼의 신임을 받아 이쁨을 받던 재수없는 애였고, 카인은 아무 이유없이 정성스럽게 바친 제물을 거부당한 소외받는 애였다. 아벨이 양의 피를 바쳤다면, 카인은 곡물을 바쳤을 것이다. 그래, 야훼는 육식주의자였나보다..

헤브라이즘이 유목적 전통을 가지고 있었고, 그리고 나서야 기록된 물론 이, 기록의 시점을 정확히 따지려면 문헌학적 검증이 있어야겠지만) 창세기 신화에서는 당연히 기독교도들의 역사적 전통을 강화시키기 위해 '아벨'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 이유야 어쨌든, '카인'은 야훼의 마음에서 버림받았다. 이것은 카인의 살인 동기 중 가장 직접적인 것이다. 아벨을 왜 죽였냐고? 야훼를 놓고 카인은 아벨을 '질투'한 거다. 그렇게 보면, 태초에는 로고스(말씀) 뿐만이 아니라, 살인도 있었고, 질투도 있었다. 질투로 인한 살인.

창세기 기록자는 이 최초의 살인사건을 인간성이 사회성으로 거듭나면서 드러난 첫번째 양상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일까. 물론, 성경을 보면, 카인이 추방되고 나서 아담과 하와는 '셋'을 낳았는데 셋의 후예 가운데 '에노스'라는 애가 있다. 얘는 카인의 장자 '에녹(카인은 자신이 세운 도시의 이름을 '에녹'이라 불렀다)'과 이름이 비슷한데, 근거는 없지만 에노스와 상징하는 바가 비슷한 것 같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에노스는 'man'이라는 뜻이라는데 에녹도 비슷하지 않을까 한다. 이건 모르겠고. 어쨌든 특이한 건. 창세기 기자는 카인의 후손을 먼저 기술하는데, 카인의 아들 에녹, 그리고 막 지나가다가 에녹의 자손 가운데 '아다'는 '야발'을 낳았는데, 그는 양치기였고, 그 동생 '유발'은 악기를 다루던 음악가였으며, 에녹의 5대 손 라멕은 실라라는 아내와 합체, '두발카인'이라는 대장장이를 낳았다. 이게 창세기 4장 17절에서 22절까지의 내용이다. 그 뒤에 5장 이하로는 다시금 아담의 계보를 진술하는데, 여기서는 카인의 후예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쭈욱 그 이름들을 서술하는데 그들의 직업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다 5장 마지막에 등장하는 '노아'는 '셈'과 '함'과 '야벳'을 500세에 낳는다. 물론, 신(엘로힘)은 노아만 마음에 들어해서 노아의 후예들만을 살린다고 기자는 전한다. 

창세기 기자는 왜 이 지루한 족보 열거를 통해 도시 문명의 상징을 카인의 후예 '에녹'으로, 문화예술(음악가)과 철강산업(대장장이)의 모태를 유발과 두발카인으로 표현한 것일까. 물론, 야발이라는 유목적 직업을 가진 후손도 있었지만, 이 셋에 비하면 그 비중이 감소되는 편이기도 하고, 그 이유가 내 의도하는 바에 맞지 않기 때문에 언급하지 않겠다. 창세기 4장 이하를 보면, 인류의 문화 형성에 기여한 최초의 사람들은 모두 카인의 후예다.  

그렇다면, 무언가 의도가 있지 않을까. 인류 문명의 형성에는 '살인'과 '질투'가 전제되어 있었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건 아닐까. 카인이 자신의 죄를 느끼고 고향을 떠나 에녹이라는 도시문명을 건설했기 때문에 인류 문명이 생겼다는 것을 넌지시 알려주는 게 아닐까. 그 잘난 기독교 창조신화에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카인의 후예들이 인류 문명을 건설했다는 사실은, 질투의 대상이 되는 타자의 존재를 개인 역사에서 삭제해버리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을 사회성에서 발견한 창세기 기자의 목청높힌 이야기는 아닐런지. 존재-삭제(혹은 말소)의 충동은 타자를 향하기도 하지만, 자기 자신을 향하기도 한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우리가 '유서깊은 살인자 혈통의 후예'라고 말을 했던 것인가.

하지만, 이런 류의, 문헌적 근거에 토대하지 않은 이런 상상은 허무하기 짝이 없다. 

상상력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곳은 바로 문헌학적 공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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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 살림지식총서 25
양운덕 지음 / 살림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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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푸코의 지적 작업에 대해서 쉽고 명쾌하게 설명해 놓았다. 마치 직접 말을 듣는 것과 같은 글을 읽으며 시간 가는줄 몰랐다.

푸코는 데까르트의 코기토가 근대 주체를 세웠다는 식의 주장을 거부한다. 이건 이 책에 쓰여있진 않지만, 이 책을 읽기 위한 하나의 전제와도 같다. 또한 푸코는 칸트의 계몽과 이성을 거부한다. 이것 역시 하나의 전제다. 그는  주체가 이성적 사유를 통해 존재근거를 찾고 그로 인하여 근대 세계를 구성하는 것은 아니며, 칸트의 계몽과 이성을 '비판'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근대적 권력은 계몽적 이성을 가지고 가치'들'의 관계'들' 속에 불법적으로(사실 중심이 없는 권력 체계의 관점에서 볼 땐 합법적이다) 위계질서를 부여하여 이성/광기, 정상/병리, 순수/오염 등의 대립항을 설정하였다. 권력의 이러한 작동방식을 미세한 영역에서부터 보여주는 게 푸코의 작업이고, 위의 대립항 가운데 우위를 선점한 가치가 현전한다고 믿는 속세의 형이상학을 비판한 이는 데리다이다.

푸코의 저작 중 '감옥의 탄생'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감시와 처벌>을 읽으면 마치 권력의 잔혹함에 대해 비판하고, 그것에 대항하여 싸워야할 것 같은 근거없는 느낌이 들지만, 푸코는 그런 것을 의도하는 것 같지가 않다. 단지, 그는 특수한 관점으로 특수한 시기(17-18세기)의 서구를 관찰하면서 권력은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그런 권력망 속에서 이른바 근대적 주체라고 호명할 수 있는 존재는 어떻게 훈육되고 있는지 살필 뿐이다. 푸코는 '권력에 대항하여 거리로 나서라!'고 외치지 않는다. 그건 독자들의 몫일 뿐이다. 

이 짧은 책은 푸코를 잘 모르는 독자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을 쉽게 하고 있다. 훈육된 신체니, 규율권력이니, 생체권력(bio-politique)이니 하는 것들에 대한 문외한인 내가 이해할 정도로 쉽게 설명해 주었다. 무엇보다도 저자의 해박한 지식 때문이리라.

이 책에서 아쉬웠던 것은 푸코를 인용하는 부분에 '(Foucault, 1976 122)'와 같은 표기가 많이 등장하는데, 책의 후미에서 푸코의 저작을 소개해주지 않을 뿐더러, 책 전체를 다 뒤져보아도 '(Foucault, 1976...)'와 같은 식으로 인용하고 있는 책이 어떤 책인지 별도의 서지학적 정보가 없으면 알 수가 없게 되어 있다는 점이다.

저자의 제안처럼 푸코의 작업에 대한 관심을 갖고 권력이 지켜보고 있는 우리 일상의 작고 미세한 삶의 조건들을 살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 점만은 명심하자! "권력은 하나의 중심을 갖지 않는다"(본 책,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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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학이란 무엇인가
김경용 지음 / 민음사 / 199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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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 김경용씨는 이 책을 먼저 쓰고 <기호학의 즐거움>이라는 책을 썼는데, 내가 말하고 싶은건. 이론적 깊이가 전제되고 나서야 응용편으로 들어가서 치밀한 분석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기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대답될 수 있다. 기호학이 태동되기 까지의 배경과 사변철학안에서도 포함되어온 기호signe에 대한 다양한 관점들을 치밀하게 정리하면서 조금씩 형성되어가고 있는 기호학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이 첫번째이다. 두번째는 현대 기호학이 나아가고 있는 방향을 폭넓게, 그 기호학의 외연을 방대한 코퍼스를 통해 묘사하는 것이다. 이 책은 물론, 어느 쪽에 대해서도 깊이가 있지 못하고, 심지어 책의 초반부에서 학자의 이름을 잘못쓰는가 하면, 소쉬르나 퍼스의 기호관을 왜곡하기도 한다.

예를 들자면, (몇 페이지인지는 정확히 생각이 나지 않지만.. 퍼스의 기호관을 설명하는 삼각형이 나오는 페이지다) 퍼스가 생각하는 기호는 표상체-대상체-해석체로 구성되어 있다. 퍼스해석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리츠카에 따르면, 퍼스의 대상체는 '실제 사물(actual thing)'이 아니다. 대상체object는 머리 속에서 상상이나 기타 정신작용에 의해서 포착되는 대상적 개념이다. 하지만, 김경용씨는 이러한 사실에 대해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이, 삼각형 하단부에 떡하니 실제 심장을 지시하는 그림을 가져다 놓았다. 책의 전반부를 통틀어 이런 행위가 반복되는 것은 김경용씨가 일개 대학을 졸업한 나보다도 공부를 더 안하고 책을 썼다는 말밖에는 성립되지 않는다.

이 책은 전반적으로 기호학에 대한 오해와 오류로 점철되어 있어 보다 쉬운 말로 대중들을 오도하는 나쁜 책이다. 차라리 기호학을 소개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이 책은 절대로 권하고 싶은 책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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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바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44
페르 라게르크비스트 지음, 한영환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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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 라게르크비스트의 이 소설은 양심이 무엇인지에 대해 잘 말해준다. 일개 도적에 불과한 바라바라는 인물이 자신을 대신해 죽음을 맞이한 예수라는 인물을 조금씩 알아가면서, 심경의 변화를 느끼게 된다. 예수라는 인물의 위대함, 신성성을 전제한 채 그를 숭배하는 많은 예수주의자들과는 그 접근방식이 다르다. 바라바는 오직 한 가지 의문, '왜 그 사람이 나 대신 죽어야만 했는가?'라는 예수의 숙명적 희생에 대한 의문에만 매달려있다. 더럽고 추잡한 짓을 일삼아 온 자신의 생명보다, 더욱 성스럽고 고결하게 살아왔던 예수의 생명이 더 가치가 없다는 것인가? 왜 희생을 택했을까? .. 등등의 의문으로 바라바는 예수를 향해 한걸음씩 나아간다.

기본적으로 바라바의 예수에 대한 관심은 자기 행위의 도덕성에 대한 실망감에서 비롯되며, 예수에 비해 나을 것이 하나도 없는 자신이 예수를 죽이고 살아남았다는 '살아남은 자의 고통'에서 비롯된다. 이것이 곧 양심이다. 바라바는 자신의 '양심'에서부터 예수의 가르침에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로부터 죄의 사함을 얻었지만, 예수주의자들로부터는 '죄인'이라는 낙인을 면치못했던 저주받은 양심적 인간. 그가 바라바였다.

예수주의자들은 다가올 구원의 메시지에 집착하면서 목적론적으로 얽매여,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왜곡해왔다. 소설 속에서도 예수주의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집단적 배타심리를 읽을 수 있었다. 이들은 예수에 대해 바라바처럼 양심적으로 접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라바는 비록 죄인이었으나,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몸과 마음으로 느끼고 그 죄사함을 받고자 소박하지만 진실한 마음으로 예수를 (몰래몰래) 바라본 것이다.

이 소설은 종교의 허구성을 논하지는 않는다. 다만, 종교집단의 비진실성(어떤 의미에서는 허구성이라고 말해도 좋으리라)을 한 양심적 인간을 통해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종교적 인간(homo-religious)을 세계 속에서 사물의 본질과 심연의 깊이를 알고자 하는 본래적 인간으로 정의할 수 있다면, 종교성이라는 것은 어디에서나 발견되는 사유의 형식일 것이다. 그렇다면, 페르 라게르크비스트의 '양심에의 호소'는 다만 종교집단에만 국한되지는 않을 것이다. 난 그가 소외되고 억압받는 개인의 양심이 전체적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희생당하는 모든 상황을 비판하는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거라 생각한다.

중요한 건, 사회 속에서 무엇을 믿는가, 누구를 믿는가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 솔직한가이다. 같은 이데올로기라고 해도, 자기-기만을 일삼지 않는 이데올로기가 더 나은 법이다. 비록 바라바는 예수의 가르침에 대해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자신의 양심적 논리에 따라 예수를 사랑하게 된 비참한 사람이었다. 화려한 배경과 탁월한 정신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그는 솔직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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