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훔친 위험한 冊들 - 조선시대 책에 목숨을 건 13가지 이야기
이민희 지음 / 글항아리 / 200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레비스트로스를 비롯한 많은 인류학자들은 소수만이 알 수 있는 기호체계가 생기면서 새로운 권력이 형성되는 과정을 보여줬다. 단순한 기호체계가 그러하거늘 인간의 사유와 행동을 일정한 방향으로 유도할 수 있는 문자체계의 발명은 그 파급효과가 더욱 컸을 것이다. 문자의 발명은 ‘아는 자’와 ‘모르는 자’를 구별짓고, 아는 자의 모르는 자에 대한 정신적, 물리적 횡포를 유도하게 됐다.
문자를 아는 자는 정신적 영역에서 우위에 서게 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었고, 정신적인 헤게모니를 장악한 인간은 이내 정치적인 헤게모니까지 장악하게 되는, 지금으로서는 ‘자연스런’ 일이 발생하게 됐다.

하지만, 문맹률이 거의 제로에 가까운 현대 사회의 경우엔 어떠한가. 문자체계 독점을 통한 권력 강화에 실패한 지배계급은 이제 정보를 독점하기 시작한다. 권력에 불리한 정보를 담은 책을 불온서적으로 간주하여 책의 확산을 막는다거나, 더 심하게는 유통망을 초토화시키는 방법을 사용한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에 불리한 생각이나 정보를 담고 있는 책, 노래, 영화들을 판금조치했던 군부독재 정권은 정보의, 지식의, 사유의 힘을 가장 잘 알고 있었던 한국 정부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까지 든다. 성상파괴자들이 icon의 힘을 가장 잘 이해했듯이.

이민희의 <조선을 훔친 위험한 책들>(이하 <위험한 책들>)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검열시스템의 작동 기제를 조선사회에서 발견하고 있는 재밌는 책이다.

붕당정치의 폐해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사림의 훈구파 사냥법 중 하나는 책에 대한 말도 안되는 검열이었다. 사림은 최초의 국문 표기 소설인 <설공찬전>이 조선 사회를 떠받들고 있는 성리학의 근본원리를 흔든다는 명분으로 채수를 탄핵했으나, 실제 이유는 훈구파에서 사림파로 옮겨가던 정권 변동의 과도기에 사림파의 정치적 입지를 공고화하기 위한 얄팍한 정치술에 있다. 이유야 어떻든, 결국 사림은 스스로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특정 책을 금지시키고 그 유통을 막은 것이다.

어득강, 윤춘년의 ‘서사를 설치하자’는 주장이 씨알도 먹히지 않았던 역사적 사실 역시, 지식의 확산을 막아 백성들이 똑똑해지는 상황을 막기 위함이었다. 특유의 외교력과 백성들을 현장에서 지휘할 줄 알았던 영명한 소현세자로부터 권력 찬탈의 위험을 느낀 인종이 결국 아들을 독살하게 된 것 역시, 소현세자가 훌륭한 군주로 성장하고 있는 상황을 드라마틱하게 기록하고 있는 ‘심양장계’라는 국왕 보고서 때문이었다.

책의 유통을 막으려고 애썼던 조선의 권력자들. 그러면서도 새로운 책들에 대한 수집벽을 감추지 못하는 권력자들의 웃기는 시츄에이션. 이러한 이야기를 열 세 개의 꼭지로 풀어가는 <위험한 책들>은 ‘책’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과 파급효과를 가장 잘 이해했던 조선 사회 권력층의 모습을 생생히 보여주는 작품이 아닌가 생각한다. 책을 둘러싼 싸구려 투쟁술들이, 조선을 진정 아침(朝)이 고운(鮮) 나라로 만들어 줄 계기를 놓치게 한 것은 아닌지... 그래서 역설적으로 그 책들이 조선을 조선이게끔 하는 계기를 훔친 것은 아닌지 반문하고 있는 이 책에 별점 다섯 개를 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