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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아렌트와 토크빌을 읽었다 하는가 - 한국 인문학의 왜곡된 추상주의 비판, 비평정신 1
박홍규 지음 / 글항아리 / 2008년 8월
평점 :
품절
학부 3학년 시절. 벌써 7~8년의 세월이 흘렀다. 학회 강독을 위해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이진우 역, 한길사 刊)을 과실에서 읽고 있었다(독일어 실력이 미천하여 영어판과 대조하면서 읽고 있었던 데다가 어줍지 않은 희랍어 실력으로 군데군데 개념어 번역을 보니 오역 투성이임을 알 수 있었던 책이다.). 한참 책을 읽고 있는데, 흔히 말하는 NL 선배 하나가 들어와 무슨 책이냐며 책 커버를 휙 들쳐보더니 책을 빼앗아 쓰레기통에 집어 던지는 것이다. '이딴 책을 왜 읽느냐'며. 선배의 교양머리없는 횡포에 책 한 권을 두고 옥신각신 실랑이가 있었다.
"그럼 왜 읽으면 안되는지 이유를 대보세요"
"..."
이유가 궁색해지자 선배는 그냥 과실을 나가버렸다. 명확한 이유도 없이 아렌트에 대한 편견에 사로잡힌 몇 몇 꼴통 운동권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줬던 그 날이었다. 이런 모습들을 박홍규가 말하는 '한국 인문학의 왜곡된 추상주의'의 한 영역에 슬쩍 집어넣어도 무방하지 않을까. 추상적인 비판과 독서를 통해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려는 무책임한, 수준 이하의 태도. 추상의 추상이고, 또한 왜곡된 추상이다.
쉽게 욕할 수 없는 지식인 박홍규가 책을 냈단다. <누가 아렌트와 토크빌을 읽었다 하는가>. 제목이 참으로 도발적이다. 니들이 읽었다고 하나 과연 그게 읽은 것이 맞느냐. 제대로 읽긴 한 것이냐. 하는 반문을 제목으로 옮긴 것이다. 책의 제목만큼이나 내용 또한 도발적이다. 박홍규는 아렌트와 토크빌을 따로 분리시키지 않고 그 둘을 연결시켜, 아렌트를 토크빌 사상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하고 있다.
자치와 자유의 민주주의. 평등 보다 '자유'를 중시했던 '자유'주의자(이 표현의 적확성은 잘 모르겠다) 토크빌. "혁명의 목적은 자유의 창설"(p.272)이라고 선언한 자유의 신봉자 아렌트.
그들의 실천적 정치사상 혹은 정치적 실천의 프레임이 현 CEO 출신 대통령 이명박이 집권하고 있는 요즘 어떠한 유효성을 지니고 있는지 검토하는 것이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이다. 일테면, 최근 광화문 일대의 '촛불'이 가진 가능성과 실제로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한(집권층의 철저한 개무시로 인한) '촛불'의 무기력함에 대한 설명의 틀거리를 토크빌과 아렌트의 정치 사상으로부터 마련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목적은 아렌트와 토크빌의 지위를 격상시키는 것. 좀 더 제대로 연구해보는 것. 그래서 쥐뿔도 모르면서 함부로 후배의 책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리는 몰상식한 행동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게 하는 것. 뭐 그런 거 아닐까. 제대로 알고 제대로 씨부리는 인문학도, 인문학 지식인들의 모습들이 아쉬운 이 때 속시원한 책 한 권이 나왔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