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TV의 인기 법률 프로그램인 '솔로몬의 선택'에서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로 좌중을 '웃기는' 김병준 변호사(43)의 이력서를 보면 '평범한 사람의 평범치 못한 성공 스토리'를 연상시킨다.

대구 청구고 졸업, 계명대 사회학과 졸업, 성균관대 법대 졸업, 35세에 사법시험 합격. 그와 함께 출연하는 고승덕 변호사는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고시 3과를 모두 합격한 전형적인 엘리트 출신이며, 다른 두 여성 변호사도 모두 서울대를 졸업한 재원이다. 그에 비해 김 변호사는 고교를 졸업하고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할 때만 해도 지금의 모습과는 전혀 무관한, 지극히 평범한 인생 행로를 걷고 있었다.

그러나 뒤늦게 법대에 재입학하고 적지 않은 나이로 사시에 합격하기까지, 그는 도도하게 흐르는 '운명'의 물길을 바꿔놓으려고 피나는 싸움을 벌였던 노력파로 볼 수 있다.

그의 구수한 입담도 '평범'과 '출세' 사이에 가로놓인 깊은 수렁에서 겪어야 했던 수많은 시련이 소재를 제공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김 변호사는 1962년 군위군 군위읍에서 농사를 짓는 부모님 슬하에 3남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여느 농촌 개구쟁이들처럼 개울에서 물장구 치고, 산자락에서 진달래 따먹고, 논두렁에서 개구리, 미꾸라지 잡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의 부모님은 "못 배운 한을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다"며 김 변호사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대구 인지초등으로 전학시켰다.

대구 전학을 위해 가족의 주민등록을 모두 대구 친척집으로 옮겼지만, 실제로는 김 변호사만 홀로 남고 다른 가족은 군위에 그대로 살았던 것이다.

중학교 시절, 한 학생부장 선생님이 그를 불러세워 놓고 '위장 전학'이라며 혼을 낸 적이 있다고 한다.

"당시 저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가 '위장' 소리를 듣고 큰 죄를 지은 것 같아 서러워 몰래 많이 울었어요."

대구에서 고달픈 객지생활이 계속되는 동안 그에게 고향 군위는 한걸음에 달려가는 몸과 마음의 안식처였다.

"학창시절에는 주말이나 방학 때마다 군위로 내려가 지냈어요. 지금도 어머니와 형님, 그리고 친척들이 군위에 살고 계세요."

그는 추첨으로 청구고(15회 졸업)에 입학했다. 평준화 4기인 셈이다.

"비평준화 당시 대구시내에서 거의 이류였던 학교를 명문고로 탈바꿈시키기 위해 당시 모든 선생님이 대단한 열성을 갖고 학생들을 가르쳤어요. 당시 학풍을 나름대로 정의하자면 '악으로 깡으로'라고나 할까요."

대입 본고사가 있던 시절이어서 학교에서 우열반을 나눠 강도 높게 학생들을 가르쳤지만 그는 우수반에 들지 못했다.

사춘기에 객지 생활하면서 공부에만 전념한다는 게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토요일이면 하교 길에 만경관 부근 중국집에서 짬뽕 국물에 배갈을 마시기도 했고, 선·후배 간에 단합대회도 가끔 한 기억이 납니다."

그때 만난 첫사랑의 기억은 지금도 애틋하다.

"동촌유원지에서 함께 배를 저어도 봤고, 길을 따라 몇 시간을 걸어도 다리가 아픈 줄을 몰랐어요."

그러나 만난 지 몇달 안 돼 "우린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 대입을 위해 공부를 해야 한다"는 이해 못할 핑계를 듣고 그는 이별을 강요당해야 했다.

그 후 그의 학창시절은 방황의 연속이었다.

김 변호사는 지난해 KBS의 'TV는 사랑을 싣고' 프로에서 출연 섭외가 들어와 첫사랑을 찾았다.

그러나 그녀의 출연 거부로 끝내 만남이 성사되지 않자 그는 "꼭 한번은 만나고 싶었는데…"라며 착잡한 심경으로 발길을 돌려야했다.

그는 입시성적과 담임선생의 권유로 81년 계명대 사회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에 진학해서도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1년간은 학교 앞 당구장과 다방을 전전했다. 그러다가 그 해 늦가을, 그는 철학적인 고민에 빠지면서 인생의 첫 도약기를 맞는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원초적인 물음에 부닥친 것이다.

그는 수일간 식음을 전폐하다시피하며 동서양의 고전을 닥치는대로 읽었다. 뜻도 모르고 이해도 안되었지만.

"마침내 번민 끝에 도달한 결론은 '나는 누구인가'를 고민하기보다는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고, 결국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이었어요."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그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 그토록 바랐고, 자신도 선망했던 법조인이 되기로 결심하게 된다. 2학년에 올라가서는 중학교 영어책을 뒤지며 영어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강의시간에는 항상 맨 앞자리에 앉아 교수님의 침을 받아 먹어가면서 노트필기를 했죠. 교수님 농담까지도 받아 적었어요."

당연히 성적은 올라 '평점 A'를 넘었고, 난생 처음으로 공부에 자신감도 생겼다. 85년 대학 졸업 후 고향에서 14개월간 단기사병(방위)으로 근무하면서도 영어책을 놓지 않았다. 군 제대 후 가족 몰래 다시 대입 수험을 준비해 87년 성균관대 법대에 합격했다. 그러나 집안 형편상 입학금을 구할
 


솔로몬의 선택에 출연 중인 김병준 변호사(오른쪽서 두번째)<SBS제공>2


솔로몬의 선택에 출연 중인 김병준 변호사(오른쪽서 두번째)<SBS제공>
수 없게 되자 결국 입학을 포기해야 했다. 일단 학비부터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88년 대구에서 한국통신에 입사했다.

그러나 입사 이듬해에 불어닥친 집안의 불행은 법조를 향한 그의 발걸음에 더 이상의 지체를 용납하지 않았다.

현역복무를 마치고 갓 제대한 동생이 갑자기 시름시름 앓더니 백혈병 진단을 받아 투병 6개월만에 가족의 곁을 떠났다.

불행은 겹쳐 온다고 했던가. 동생을 가슴에 묻었던 아버지도 이듬해인 90년 5월 단옷날 한 많은 세상살이를 등졌다.

사랑하는 가족을 한꺼번에 잃고 한동안 정신적 공허에 빠져있던 그는, 주위 만류에도 불구하고 직장에 사표를 내는 것으로 삶의 돌파구를 찾아 나섰다.

법대에 못 가더라도 독학으로 사법시험을 준비하겠다는 의도였다. 그는 91년 군용 더블백에 간이침낭과 옷가지 몇 개만 싸들고 무작정 상경해 신림동 고시촌으로 들어갔다. 그 때 나이 스물아홉. 주위에 아는 사람 하나 없다보니 자연히 말상대도 없고, 오히려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성균관대 법대 편입학 시험공고를 보고 응시했다가 합격, 92년 성균관대 법대 3학년에 편입하게 됐다.

5년 전 입학금이 없어 학교 문턱에서 주저 앉았지만 결국 제자리로 돌아온 셈이다.

편입 이후 교내 고시반에 들어가 학교도서관과 신림동 고시촌을 오가며 죽어라 공부만 했다.

"오전 6시 기상, 밤 12시 취침으로 규칙적인 생활을 하려고 노력했고, 하루 10시간 , 1주일 6일 공부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공부하면서 힘들고 지칠 때마다 먼저 간 동생과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자신을 채찍질했다.

한국통신에서 만난 아내 이정은씨(39)와 93년 7월 결혼식을 올렸고, 그녀의 내조도 든든한 버팀목이 돼 줬다.

아내는 그의 뒷바라지를 위해 대구에서 계속 직장을 다녀야했기 때문에 그들은 한 달에 한 번 정도 만나는 '월말부부' 생활을 했다.

시험공부를 시작한 지 6년, 월말부부 4년째 되는 97년에 그는 35세의 나이로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2000년 처음 서울 서초동 법조타운에 법률사무소를 연 그는 초창기에는 벌이가 신통치 않았다.

형사사건보다는 민사사건 수임이 대부분이었고, 그나마 다른 사무실에서 잘 맡지 않는 사건, 소액사건 등이 그의 몫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2002년 '솔로몬…' 출연을 계기로 사정이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김 변호사는 이 프로를 처음 기획한 담당 PD인 지금의 이창태 CP(Chief Producer)가 출연을 부탁해 나오게 됐다. 이 CP는 김 변호사의 고교 1학년때 같은 반 친구라고 한다.

"처음에는 친구라는 담당 PD가 제가 말한 법률 견해는 편집에서 쏙 빼버리고 농담한 것만 계속 방송에 내보내 마음고생이 컸습니다."

그러나 나중에야 그것이 이 프로가 자신에게 요구하는 캐릭터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그는 '시청자를 웃기는 변호사'로 통하게 됐다.

그러나 그것만이 김 변호사 인기 비결의 전부는 아닌 것 같다.

"변호사라고 하면 일반인들이 딱딱하고 권위적이라고 생각하는데, TV에서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모습이 시청자의 공감을 사는 것 같습니다."

그에게 '법조계 휴머니스트'라는 별명이 따라 붙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아무튼 방송 출연은 그의 변호사 활동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되고 있다.

언젠가 강탈당한 재산을 찾아달라는 민사사건의 원고측 변호를 맡게 됐는데 승소할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재판 도중에 피고측 증인이 원고측에 불리한 증언을 했다가 1주일 후 김 변호사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와 자신이 위증했다고 고백하는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증인은 "원고측 변호사가 방송에 나오는 유명한 변호사님인줄 모르고 위증을 했다"면서 "증언 후 1주일 동안 잠을 자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고 한다.

그의 증언번복 덕에 김 변호사측은 1심에서 승소했고, 피고는 사문서 위조 및 동 행사, 위증교사 등으로 구속됐다.

그러나 TV 출연으로 '유명세'도 톡톡히 치러야했다.

"방송 출연 후 전국 어디를 가도 알아보는 사람이 있어 행동이 몹시 조심스럽고, 가족과 외식을 가더라도 꼭 구석 자리를 잡아야 한다"며 고충을 털어놓았다.

김 변호사는 최근 뜻밖의 전화를 한통 받았다.

지난해 TV 출연을 거부해 그를 상심케했던 첫사랑으로부터 "죽음 문턱에 이를 정도로 많이 아파 출연할 수 없었다. 죽기 전에 한번 보고 싶다"는 내용의 전화가 걸려온 것.

그래서 김 변호사는 지난주 지방에서 올라온 그녀와 서울에서 27년만에 중년의 모습으로 다시 만났다.

"처음에는 다소 어색한 시간이 흘렀지만 곧 예전의 열병처럼 앓았던 사랑의 추억보다는 해질녘 낙조를 바라보는 담담한 심정으로 서로 지난 날의 얘기를 나눴어요. 서울에서 제일 좋은 호텔에서 저녁을 대접하고 직접 서울역까지 바래다 주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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