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Che)’는 영원하다.”
9일 사망 40주기를 맞는 ‘영원한 혁명가’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의 추모 열기로
라틴아메리카 대륙이 뜨겁게 달아 오르고 있다. 1997년 유해가 쿠바로 돌아올 때 최고조에 달했던 게바라 열풍에 다시 불이 붙고 있다.
볼리비아에는 게바라의 최후를 느끼려는 추모자들이 속속 몰려들고 있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그가 처형된 라이게라에서 7일 밤 추모 촛불행사가 열리는 것을 비롯, 유해가 발견된 비야그란데에서는 8일부터 5일 동안 ‘월드 체 페스티벌’이 진행된다. 페스티벌에는 볼리비아 에보스 모랄레스 대통령도 참석할 예정이다. 대통령궁 한쪽에 대형 게바라 초상화를 전시한 모랄레스는 “40년이 지났지만 게바라는 여전히 해방과 주권, 위엄은 물론이고 무엇보다도 정의와 평등의 상징”이라고 말했다.
쿠바 산타 클라라에서도 ‘혁명 영웅’ 게바라를 기리는 기념식이 준비되어 있다. 59년 바티스타 독재정권을 축출한
쿠바혁명 당시 대표적 격전지인 이곳은 돌아온 게바라의 유해가 안치된 ‘성지’이기도 하다. 건강이 악화된
피델 카스트로 대신 그의 동생 라울 카스트로 국방장관이 참석할 것으로 알려졌다.
게바라가 태어난 고향 아르헨티나에는 40주년을 맞아 새로운 동상이 세워진다. 칠레 산티아고에서는 게바라를 위한 특별 콘서트가, 베네수엘라에서는 음악과 미술 축제가 개최된다.
멕시코시티의 지하철 곳곳에는 학생들에 의해 게바라의 벽화가 그려지고 있다.
브라질의
해방신학자 프레이 베토는 “게바라는 우리의 혁명 패러다임이었다”고 말했다. 게바라는 쿠바혁명 성공 이후 수립된 카스트로 정권에서 중앙은행 총재와 상공부 장관 등 요직을 거쳤지만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혁명을 지원하겠다며 아프리카 콩고로 향했다. 콩고에서 돌아와 66년 12월에는 “혁명을 완성하겠다”며 다시 볼리비아로 떠났다. 그해 10월8일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지원을 받은 볼리비아 정부군에 생포돼 처형되기 전까지 게바라는 정글의 게릴라로 살았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에 불가능한 꿈을 간직하자”고 했던 게바라는 남미인들에게 여전히 진심으로 자신들을 사랑했던 동지로 살아 있다. 볼리비아 라이게라의 농부 마누엘 코르테즈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싸운 그를 평생 잊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독일 출신 가톨릭 수녀 안토니아 마리아 프로이드는 게바라의 시신을 봤던 때를 회고하며 “그는 마치 예수와 같았다”고 말했다고 dpa통신이 전했다.
불꽃 같은 삶을 살다간 체 게바라는 이제 잘 나가는 문화 아이콘이기도 하다. 완고한 무장 혁명군보다 붉은 티셔츠 속 잘 생긴 이미지로 더 친숙해진 게바라는 전세계 사회운동 진영의 우상이 된 지 오래다. 게바라의 삶을 주제로 한 책과 영화는 물론 커피잔과 포스터, 배지 등 게바라를 주인공으로 한 각종 소품의 등장으로 ‘혁명의 낭만화’라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게바라가 최후를 보낸 볼리비아에서 그의 흔적을 따라가는 ‘게바라 루트’ 순례 여행도 관광상품으로 나와 있는 상태다. 그러나 쿠바의 의대생 옌드리 가토르노는 “여기서는 게바라의 티셔츠를 입을 때마다 커다란 존경과 사랑을 담아서 입는다. 패션 기호가 아니라 우리가 진짜로 그것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게바라는 28년 아르헨티나 로사리오에서 태어났다. 53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잠시 의사로 일했으나, 55년 카스트로를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쿠바혁명에 가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