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헤어지는 하루
서유미 지음 / 창비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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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보선 시인의 시 <오늘은 잘 모르겠어>를 떠올렸다. 시인은 지지난밤에 사랑을 나눴고, 지난밤에는 눈물을 흘리며 어제까지의 '나'는 인간이었다고 확신하고 있으나 오늘의 나는 잘 모르겠다고 고백한다. 다시 내일이 오면 지난밤에 고뇌에 빠졌으니 인간이었던 것 같은데, 오늘은 잘 모르겠는 불확실함의 고리가 끝없이 이어지겠지.



<모두가 헤어지는 하루> 속 여섯 단편의 주인공들은 모두 이런 불확실한 미래 앞에 한없이 작은 존재로 삶을 겨우 살아낸다. 보증금이나 월세를 올려달라는 집주인의 요구에 12월 31일, 시린 손으로 케잌을 들며 낯선 동네를 전전하는 주인공(에트르), 자신의 삶이 잘못되었음을 느끼지만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있는 사람(개의 나날), 이혼 후 찜질방을 전전하며 그 안에서 불안과 만족을 동시에 찾는 남자(이후의 삶) 등. 다른 이들은 도대체 이 지겹고 힘든 하루를 어떻게 버티며 넘겨내는 것일까?



소설은 이야기 내내 실체가 명확하지 않은 어떤 불길한 예감을 준다. 결혼 10주년 기념 여행에서 실종되어 사라진 남편을 두고 자꾸만 일이 많으니 찾으면 어떻게든 연락을 달라는 직장 동료들의 재촉(뒷모습의 발견)은 실종 사건을 자꾸만 별 것 아닌 것으로 느끼게 만든다. 어렵게 얻은 평일 휴가, 늦잠을 자는 바람에 이도 저도 아니게 집에서 뭉개게 되자 남자는 아내의 눈을 피해 몰래 담배를 피우며 아파트 구석구석 어쩐지 음산해 보이는 장면을 목격하지만 그가 나서는 일은 없다(휴가). 죽음의 예감은 우리를 자꾸 휘감는데, 애써 모른척하며 내 예감이 틀렸기를, 하지만 이상하게도 어쩐지 그 예감이 꼭 들어맞기를 바라는 모순적인 감정을 동시에 만든다.



어릴 적, 내가 꿈꿨던 어른의 삶이란 이런 것이던가? 어려움이 닥쳐도 척척 해결해나가는 ‘어른’스러운 모습을 그리지 않았던가? 책을 읽는 내내 나도 더 이상 오늘은 잘 모르겠다,고 중얼거리게 되었다. 나는 오늘 인간이 맞을까. 쉽게 읽히지만 가볍지 않고, 밑줄을 많이 긋게 하지만 집중력을 잃지는 않도록 한다. 결론을 제시하지 않는 모습이 오히려 삶과 닮아있다. 오늘을 잘 모르겠는 불확실함 속에서 우리는 내내 누군가와, 무언가와 헤어지며 하루를 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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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의 몽상
현민 지음 / 돌베개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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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헌재에서 대체복무 없는 양심적 병역거부는 헌법에 불합치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제껏 한국 남성들에게 20대의 상당부분은 “군대 아니면 감옥”이었으며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이번 결정으로 구체화될 대체복무제에 관심이 가게 된다.


『감옥의 몽상』 저자 현민은 양심적 병역거부자로, 2009년부터 2011년까지 1년 6개월 간 영등포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그러나 그는 병역거부자 중 9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는 여호와의증인이 아니다. 특별한 종교적 신념이 있는 것도, 삶의 모든 순간이 간디처럼 평화주의로 그려진 것도 아니라고 고백한다. 이런 평범한 20대 남성이 병역 “기피”가 아닌 “거부”를 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충돌하는 내•외적 요소와 투쟁해야 했다. 



"어떤 사람의 눈에는 병역거부자의 모순처럼 보이겠지만 실로 모든 삶은 이질성으로 그득하기 마련이다. 내게 완결된 서사는 불가능하며 매력이 없다. 완결된 서사의 이면, 즉 내밀한 일상의 파편은 정치적 올바름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치를 다르게 사고할 수 있는 자원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저자가 혹독했던 수감생활을 떠올리며 쓴 옥중 문학이다. 왠지 감옥은 사색을 위한 최적의 장소 같지만(신영복 선생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등) 사실 그보다 가장 낮은 차원에서 살아 남기 위해 계속해서 투쟁해야하는 “전쟁”같은 곳이다. 신체적으로 제한된 장소에서 시간과 공간의 관념, 감옥과 남성성, 자아와 몸에 대한 성찰 등 극단적인 공간에서 작가가 발견하고 탐구한 주제들이 매우 흥미롭다. 작가의 솔직하고 문학적인 문체, 통찰력있는 시각이 돋보이는 매우매우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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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집 무너지는 거리 - 주택과잉사회 도시의 미래
노자와 치에 지음, 이연희 옮김 / 흐름출판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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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집 무너지는 거리


전세 계약이 거의 끝나가서 요즈음 새로 이사할 집을 알아보는 중이다. 입지 좋은 역세권은 터무니없이 높은 보증금으로 이미 포기한 지 오래고, 가격이 합당하다 싶으면 어김없이 준공 연도가 내 생년월일보다 한참 이르다. 나보다 어르신인 집을 모시고 살아야 할 노릇이다.


일본에는 2033년 즈음에 3채 중 1채가 빈집이 될 것이라는 연구결과가 있다. 다들 자기 집이 없어 난리 아니었나? 빈집이 늘어나고 주택과잉사회가 될 거라는 건 무슨 뜻일까? 환경공학과 도시공학을 전공한 건축학과 교수 노자와 치에가 일본의 주택 문제와 허술한 정책을 꼬집는다. 


부동산은 오래 전부터 장기적인 수익을 내는 투자로 여겨졌다. 투자와 투기, 자산 상속의 목적 등으로 부동산을 찾는 이들을 타겟으로 건설업체는 주택을 무분별하게 만들어냈다. 2020년 도쿄올림픽 특수 같은 초단기적인 시각을 가지고 날림으로 지은 주택은 자연히 불량이거나 관리가 부실하여 가치가 하락하는 일이 발생했다. 부동산이 ‘빚동산’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일단 짓고 본다’는 근시안적인 태도,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비도덕적인 태도가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 초고층 맨션과 거주자가 존재하지도 않는 임대아파트를 만들어냈다. 도심은 물론 교외와 지방도시까지 마구잡이 주택 건설이 확대되었는데, 특히 도심 바깥은 인프라 없이 무분별하게 확장되어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저자는 부동산 시장을 예측하고자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낡은 집, 빈집은 늘어가고 수요 없는 초고층 새집이 생기는 기이한 현상을 마주하자는 것이다. 노후한 주택에 드는 사회적 비용을 줄이고 도시계획가 주택정책을 정비하여 다음 세대에게 ‘살 곳’을 제대로 물려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디에 살 것인가’는 중요한 문제다. 삶의 질은 많은 부분 주거 환경에서 결정된다. 내 방, 내 집, 나아가 내가 살고 있는 동네와 도시까지. 집을 짓고 도시를 계획하는 건 단순히 건물을 올리는 데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삶까지 함께 설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당연히 좀 더 긴 시각으로 접근해야 하는 문제고, 당장의 이익에 쉽게 편승해서는 안 된다. 


빚을 내더라도 집을 사야한다는 한국에서 일본의 이야기가 묵직하게 읽힌다. 주택은 하나의 신화고 이를 둘러싼 수많은 행위자가 어떻게든 이익을 보기 위해 수싸움을 하고 있다. 계획 없는 무분별한 건설, 사후 관리에 소홀한 노후 주택, 인프라 없는 무분별한 지방 이전 등 우리가 고민해야 할 부분도 많다. 우리는 어디에서 살고 있는가? 어떤 공간을 다음 세대에 넘겨주려고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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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이 고인다 (리커버 특별판)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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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오선을 지나갈 때」와 「기도」를 읽고 씁니다.




1. 상경하는 청년들

 서울에는 수많은 점이 있다. 열차는 점을 따라 서울을 가로지르며, 사람들은 점을 따라 이쪽 저쪽으로 움직인다. 서울이 낯선 수많은 청년들도 점을 따라 움직인다. 지하철과 버스 노선도는 이들이 의존하는 가느다랗고 위태로운 선이다. 


 생애과정의 규범성은 청년들에게 취업하여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결혼을 통해 정서적으로 자립하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경제위기와 고용악화의 영향으로 청년 세대는 비정규·불안정 일자리를 전전하거나 직업 안정성이 보장되는 국가고시에 뛰어들고 취업-실업 상태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수도권에 위치한 대학 선호 현상과 지방과의 임금격차, 그리고 수도권에 집중된 고용기회는 청년들을 서울로 끌어들이는 요인이다.(정민우·이나영. 2011. 『청년 세대, ‘집’의 의미를 묻다』. 한국사회학. 131쪽)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청년이 1인 가구의 형태로 서울에 거주하며 열악한 주거환경과 삶의 조건이 화두가 되었다. 


 김애란의 단편소설 「자오선을 지나갈 때」와 「기도」에는 이처럼 고향을 떠나 상경했으나,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주인공이 지하철을 타고 등장한다. 「자오선을 지나갈 때」의 화자이자 취업준비생인 아영은 서류 심사에서 매번 낙방하여 좌절한다. 그는 집을 떠나 처음 한강을 건넜던 때를 떠올린다. 1999년 봄 재수생 시절, 노량진이었다. 서울에 있는 재수학원에서 공부해야 뒤처지지 않을 것이라 느꼈고, 자식의 서울살이가 부모에게 부담이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채 상경했다. 처음 지하철 창문 너머로 바라본 한강은 너무나 아름다웠고, 63빌딩은 신기했으며, 노량진은 ‘약속의 땅’처럼 느껴졌다. 갯바람 냄새가 나는 노량진에서 아영에게 할당된 공간은 책상 한 칸이었다.


학원 근처 여성 전용 독서실을 계약하고 조그마한 사물함 키 하나를 받았다. K-59. 책상 한 칸이 내 몫의 공간이었다. 

 

 「기도」에 등장하는 자매는 비수도권 지역에 사는 청년들이 어떻게 서울로 내몰리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화자인 인영은 대학에 진학하며 서울에 입성했고, 졸업 후 몇 년간 공사 준비를 했지만 번번이 낙방했다. 주변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질 때쯤 쫓기듯 화장품 회사에 취업했지만 마지못해 들어간 직장에서 1년 만에 퇴사하고 다시 구직전선에 뛰어들어 동생과 함께 서울에 있는 작은 원룸에서 산다.


 지방에서 수학과를 나온 인영의 언니는 졸업 후 몇 년간 임용고시를 준비했지만 시험의 문턱은 생각보다 높았다. 동네 사람들의 애정을 가장한 지나친 오지랖과 읍내 독서실에서 만나는 친구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말을 걸어오는 낯선 남성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질 때쯤 서울에 가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공부하기 좋은 환경을 찾아 여기저기 전전하다 작년에 노량진 근처 상도동에 입성했다. 시험에 몇 차례 떨어지고,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신림동 고시촌에 방 하나를 구한다. 


 인영은 고시촌에 사는 언니를 만나러 지하철을 타고 신림으로 향한다. 고시원에 들어서자 똑같은 문 수십 개가 펼쳐졌다. 언니에게 농담 삼아 ‘갈 데까지 간 거냐’고 물었지만, 자매는 그 말에 뼈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갈 데까지 간’ 고시원을 나서면 산자락에 살짝 가려진 63빌딩이 보이는, 아이러니한 풍경이 펼쳐진다.



2. 자기만의 방, 자기만의 집

 한병철은 저서 『피로사회』에서 생산과 창조로 이어지는 ‘깊은 심심함’을 논한다. 잠을 통해 신체적으로 이완한다면, 깊은 심심함을 통해 정신적으로 이완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분주하기만 해서는 어떤 새로운 것도 창조할 수 없으며, 모든 생산성의 근원은 심심함에 있다. 사색하는 삶은 심심함에서 비롯되며, 인간은 이러한 심심함, 즉 사색을 통해 자기를 둘러싼 알을 깨고 바깥 세계에 침투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의 이론은 오늘날 청년들에게 어떻게 가닿을 것인가? 이 지점에서 버지니아 울프가 90여 년 전에 던진 질문을 생각해 볼만하다. 그는 저서 『자기만의 방』에서 셰익스피어에게 누이가 있었다 가정해보자고 말한다. 누이도 셰익스피어와 마찬가지로 글쓰기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고 말이다. 과연 이 누이가 그의 남매처럼 후대에 전해질 명작을 집필할 수 있었을까? 울프는 단호히 아니라고 대답한다. 돈과 방이 없는 여성은 결코 글을 쓸 수 없었다고 결론내린다. 


 작가는 당시 여성들의 경제적 종속과 생활 공간이 가진 문제점을 지적한다. 어떤 여성에게도 풍부한 재산이나 '자기만의 방'은 존재하지 않았다. 여성은 언제나 가난하거나 항상 거실에서 굳게 닫힌 방문을 바라보는 존재였다. 애초에 여성에게 글을 쓸 만한 물적 조건이 제공되지 않았으니 ‘여성 작가’나 훌륭한 ‘여성 작가의 작품’은 탄생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자기만의 방을 갖지 못한채 서울에서 부유하는 청년들도 이와 다르지 않다. 청년들은 깊은 심심함을 느낄 만한 시공간적 여유가 없다. ‘자기만의 방’ 한 칸조차 없어 다른 사람들과 독서실을 4칸으로 쪼개어 쓰고, 잔혹 동화처럼 다닥다닥 붙은 개조된 고시촌에 산다. 행여 옆방에 소음이 될까 숨죽여 사는 이들은 육체적 이완을 위해 편안하게 잠을 잘 여유도, 정신적 이완을 위해 깊은 심심함을 느낄 여유도 없다. 


 청년에게 상경하여 지내는 공간은 ‘집’이라기 보다 ‘임시 거주지’에 더 가깝다. 「자오선을 지나갈 때」에서 아영은 재수생 시절 노량진은 머무는 곳이 아니라 그저 지나가는 곳이라고, 노량진은 모든 것이 지나가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독서실의 책상 한 칸, 너무 비좁아 책상 위에 의자를 올리고 자야했던 4인실의 4분의 1칸을 떠올리며 그 시절에는 “어떤 공간이나 시간이 아닌 번호 속에 살았다”고 느낀다. 4분의 1칸 짜리 방에서 아영이 룸메이트들 옆에서 숙면하거나, 치열하게 시험을 준비하던 와중에 사색할만한 심심함을 느꼈으리라 생각하기는 어렵다. 


노량진에는 머무는 사람보다 지나가는 사람이 많았다. 혹 오래 머물더라도 사람들은 그곳을 ‘잠시 지나가고 있는 중’이라 생각했다.


 「기도」에서 인영의 언니가 사는 신림동은 침묵에 휩싸인 신경질적인 도시이다. 개조한 것이 분명한 4층짜리 고시원에 들어서면 1층 복도 게시판에 “통행 시 반드시 뒤꿈치를 들고 다닙시다.”라는 포스트잇이 붙어있다. 작은 소음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날카로운 이웃 사이에서 숙면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인영은 신림동을 머무는 사람들이 아닌, 잠시 지나가는 중인 고시 인구 2만 명의 침묵을 상상한다.


언니의 방은 3층 복도 끝에 있다. 수십 개의 똑같은 문이 잔혹 동화처럼 펼쳐져 있다. 그러려니 했는데도 막상 그 앞에 서니 숨이 막힌다. 


신림동 고시 인구가 2만 명 정도 된다던데. 여기를 지나간 이들 모두가 일제히 숨죽이며 살았겠구나. 2만 명의 침묵. 2만 명의 뒤꿈치. 2만 명의 불면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이들이 휴식을 취할 진짜 집은 어디에 있을까? 아영은 수능을 마치자마자 집으로 돌아가 며칠 동안 잠만 잤다는 짧은 서술은 그가 그동안 제대로 된 잠을 자지 못했음을 드러낸다. 차갑고 두려운 서울을 벗어나 고향으로 돌아가서야 비로소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공간이 있고, 그곳에서 맘편히 숙면을 취할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영의 언니는 한 달에 두어 번은 꼭 동생들이 살고 있는 작은 원룸에 들린다. 딱히 약속을 잡는 것도 아니고 아무 때나 문득문득 동생들을 찾아간다. 인영은 언니가 이 집을 찾는 “이유는 딱 하나 ‘깊은 잠’을 자기 위해서”라는 생각을 한다. 이들은 모두 자기가 잠시 지나가는 중인 낯선 방에서는 쉬지 못한다. 



3. 괴물을 만드는 사회

 「자오선을 지나갈 때」의 도입부에서 아영의 친구가 서류 탈락 소식에 좌절하는 아영에게 “얼굴이 괴물처럼 일그러졌”다고 말한다. 이 대사는 주거 문제와 취업 문제를 비롯하여 다양한 삶의 고충에 직면한 청년들이 어떻게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는지를 암시한다.


 아영은 재수생 시절 유명 강사의 수업 수강증을 구매하기 위해 전날부터 학원 앞에 줄을 서서 기다렸던 일을 떠올린다. 학원 문이 열리고 판매가 시작되자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밀치기 시작했고, 아영은 자꾸만 주변부로 밀려났다. 학생들은 “밀지 말라”고 소리쳤고, 아영은 넘어지지 않기 위해 허공 사이로 불쑥 들어온 손 하나를 잡았고, “그 손은 온 힘을 다해” 아영을 잡아 당겼다. 온 힘을 다해야만 겨우 살아남는 세상이었다. 주변부로 밀려나는 사람의 손을 잡는 일은 어려웠고, 괴물이 되지 않기는 더 어려웠다.


 「기도」에서 인영은 문화상품권을 준다는 말에 노동부 조사원과 설문조사를 약속했다. 몇 번의 약속 끝에 만난 조사원은 50대 남성이었고, 인영은 그를 보며 왠지 ‘죄송하다’는 말만 하고 살아왔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인영은 설문조사 과정에서 시급 높은 과외 아르바이트에 놀라는 조사원을 바라보며 묘한 우월감과 측은지심을 느낀다. 그러한 연민으로 사내에게 다음 목적지로 가는 ‘지름길’을 알려주었으나 이내 자기의 안내가 정확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사내를 위해 그것을 다시 정정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혹 나의 선의가 사내를 더 헤매게 만든 건 아닌지 걱정이다. 나는 휴대 전화를 든다. 그러고는 사내에게 문자를 보낼까 말까 보낼까 말까 고민하다 결국 보내지 않는다. 


 성과를 향한 압박은 사람을 병들게 만든다. 한병철에 따르면 무한정한 ‘할 수 있음’이라는 능력의 긍정성은 효율적으로 패러다임을 지배하며, 개개인이 ‘자발적으로’ 노동하고 강제하도록 만든다. 21세기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내며, 이렇게 탄생한 우울하고 병든 인간은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피해자이자 동시에 가해자가 된다.


 앞서 살펴 본 두 단편 속 청년들은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자발적으로 상경하는 것처럼 보인다. 좋은 학원이나 공부할만한 공간, 혹은 더 나은 학교와 직장을 찾아서 자발적으로 미래를 기획하는 냥 묘사된다. 그러나 제 발로 서울로 들어온 청년들은 얼굴이 일그러진 채 측은지심에서 나오는 안일한 배려정도를 베푸는 괴물이 되어간다. 


 괴물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청년들은 왜 주변부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이토록 애쓰고 있는 걸까? 잠잘 곳도, 생각할 곳도 되지 못하는 고시원 방 하나로 청년들을 밀어넣는 것은 무엇일까? 쫓기듯 상경한 청년들이 진정한 자기만의 방을 갖기까지 아직 내딛어야 할 발걸음이 많이 남아 있는 듯하다. 






참고문헌

김애란. 2007. 「자오선을 지나갈 때」, 「기도」. 『침이 고인다』. 문학과지성사.

버지니아 울프. 2006. 『자기만의 방』. 이미애 역. 민음사

정민우·이나영. 2011. 『청년 세대, ‘집’의 의미를 묻다』. 한국사회학.

한병철. 2012. 『피로사회』. 김태원 옮김.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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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인베스투스 - 투자하는 인간, 신자유주의와 월스트리트의 인류학
캐런 호 지음, 유강은 옮김 / 이매진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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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은 제국주의적 맥락에서 태동하여 주로 하층부와 주변부 집단을 연구대상으로 삼았다. 초기 원주민과 원시 사회를 관찰하던 인류학자들은 점점 연구자의 권력과 위계를 반성하며 성찰적인 결과물을 내놓기 시작했고, 시선을 타자와 타문화가 아닌 자문화로 돌리게 된다. 전통적인 의미의 ‘현지’는 점점 좁아져 갔으며, 세계화에 따른 새로운 ‘현지’가 등장한 상황이다. 이와 동시에 인류학의 연구대상이 하층부와 주변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위’를 향하고 있다는 점은 시사할 만하다. 


 캐런 호(2013)의 월스트리트 연구는 인류학이 수행하는 상층부 연구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호는 1990년대 이후 미국이 기록적인 경제 호황을 경험한 것과 동시에 월가에 상당한 인원 감축에 주목했다. 기업의 이러한 기록적인 정리해고에 월스트리트는 환호를 보냈으며, 월스트리트의 축배와 주식회사 미국coporate America은 서로 일정 정도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고 믿었다. 월스트리트가 어떻게 “자신들의 일상에서 문화적 실천을 통해 주식 시장을 지배하는 감성과 금융 규범을 만들었”는지가 호의 주요한 관심사였다(19).


 대형 투자 은행들은 성공과 똑똑함을 월스트리트와 결합하는 문화적 연계를 시도한다. 월스트리트는 소위 엘리트 대학교에서 적극적으로 학생들을 채용하는데, 특히 하버드와 프린스턴은 월스트리트의 가장 주요한 인력 공급원이며, 실제로 대다수 학부생은 졸업 후 금융업계에 진출한다. 소수의 엘리트 대학교 출신이 은행을 “오직 하나뿐인 ‘적당한’ 종착지”로 여기게 되는 데에는 동문과 네트워크의 힘, 대학교의 환경 등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 월스트리트의 교묘한 정치가 큰 역할을 한다(76). 그들은 투자 은행이 곧 ‘출세’이며, 다른 선택지는 없는 것처럼 묘사한다. 이러한 시도는 채용설명회를 통해 단적으로 드러난다. 호는 1995년 골드만 삭스의 채용설명회에 참여했으며 이를 자세히 묘사한다. 설명회는 호텔 연회장에서 열렸으며, 연회장으로 들어서는 학생들을 비즈니스 슈트를 입은 사람들이 반겼다. 고용주들은 월스트리트의 고층 건물과 양복 차림의 노동자들, 화상 회의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이후 학생들과 같은 엘리트 대학교 출신의 관리부장이 단상에 올라와 ‘똑똑한 두뇌’를 가진 ‘다섯 개 대학교 출신’의 학생들을 잔뜩 추켜세웠다. 학생들은 고급 호텔에서 최고의 대접을 받으며 금융 업계의 ‘라이프 스타일’, 즉 상층부의 아비투스를 내면화한다.

 

프린스턴 대학원을 다니던 호 역시 이러한 채용 과정을 통해 뱅커스 트러스트의 내부 관리 컨설턴트로 임명된다. 높은 경쟁률을 뚫고 월스트리트에 발을 들였으나 실상 애널리스트들에게 배당되는 것은 “가로세로 180센티미터의 자리” 뿐이다(133). 호는 실제로 지독하게 위계적이고 수직적인 투자 은행들의 노동 환경을 “화이트칼라 노동 착취 공장”이라고 묘사한다(132). 애널리스트들은 주당 110시간 이상 일하며 고된 노동을 당연히 여기고, 엄청난 압박에 시달리며 건강을 해친다. 인간관계를 정상적으로 꾸려나가기 어려워 연인과 멀어지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은행 밖에서 바라보던 수평적이고 유연해 보이던 노동 환경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동착취는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을 은행으로 끌어들였던 ‘똑똑함’의 신화로 또다시 정당화된다. 투자 은행 직원들은 스스로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있으며, 자기 자신이 ‘일반 노동자’와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가진 ‘똑똑함’은 고된 노동과 결합하며, “금융 시장에서 자신들이 지배적인 지위를 누리는 원동력이자 정당한 이유”가 된다(161).

 

월스트리트의 대형 투자 은행 직원들은 만연한 고용불안과 해고를 경험하고 있었다. 특히 ‘주주 가치’라는 명목으로 거대한 구조 조정이 종종 진행되었다. 기업은 대량의 구조 조정을 통해 일시적으로 주주 가치를 올렸지만, 이러한 만행이 결국 시장의 질서를 무너뜨려 불평등한 구조를 만들어냈다. 화이트칼라 노동 공장에서 재사회화를 경험한 투자 은행 직원들은 불평등한 구조가 계속해서 재생산됨에도 불구하고 “주주 가치를 향한 믿음을 계속 유지했”으며, 일부가 주주 가치에 의문을 던질지라도 여전히 “자신들이 맡은 사명의 정당성과 ‘시장’에 관한 믿음과 신념은 흔들리지 않”았다(198). 월가의 ‘문화적 세뇌’는 직원들의 ‘문화적 실천’으로 이어졌다. 덕분에 주주 가치, 능력주의 문화, 세계화 신화가 지독한 모순을 보여주는 상황에서, 고용불안에 떨며 유동하는 삶을 사는 대형 투자 은행 직원들은 다양한 모순을 외면한 채 – 혹은 인식하지도 못한 채 – 지속 불가능한 금융 시장에 몸을 던진다.

 

호는 1997년부터 3년 동안 인류학의 불모지였던 투자 은행을 누빈다. 그는 상층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 자신이 가진 사회경제적 네트워크와 친족, 가족, 그리고 엘리트 대학교의 연줄을 활용했으며, 대형 은행들이 대학교에서 실시한 채용설명회를 통해 금융업계에 진출하게 된다. 투자 은행 뱅커스 트러스트의 ‘내부 관리 컨설턴트’로 일하며 금융 업무와 그에 따른 관행을 배웠으며, 구조 조정 대상이 되어 감원된 이후 약 17개월 동안 현지 조사를 수행했다. 컨설턴트 업무를 통해 젊은 투자 은행 직원들을 만나게 되었으며, 업무 시간 외에 사교 활동을 통해 넓힌 월스트리트 인맥은 이후 연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호는 자신이 연구한 금융 시장의 고용 불안정을 직접 경험한 셈이다. 뱅커스 트러스트의 관리 컨설턴트로 채용된 지 겨우 6개월 만에 감원 대상이 되었는데, 그가 주주 가치를 떨어뜨리는 고정 비용이라는 것이 해고 사유였다. 저자는 이와 같은 여러 난관을 넘어서며 월스트리트의 생활 세계에 접근했는데, 이를 “휴 거스터슨이 ‘다형적 관여’라고 부르는 연구 방식하고 흡사”했다고 이야기한다(39). 거스터슨의 다형적 관여와 호의 월스트리트 연구는 인류학이 어떻게 상층부 연구를 수행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거스터슨에 따르면 상층 연구는 참여 관찰에만 의존하기 어려우며, 여러 방식으로 갖가지 출처에서 획득한 다양한 자료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호는 거스터슨의 주장처럼 단순히 현장 공동체뿐 아니라 현장 바깥에서 다양한 정보원을 만난다. 현지조사는 참여 관찰보다 동료들의 인터뷰, 따라다니기, 업계 회의 참여, 공식적 행사와 비공식적 사교 행사 등에 의존하여 수행됐다.

 

거스터슨이 상층부 연구 방식을 제시하고, 호가 이를 구체적인 인류학적 연구로 보여주고 있음에도 상층부 연구에는 여전히 문제가 하나 남아있는데, 바로 인류학자가 가진 권력이다. 호가 월스트리트의 대형 투자 은행이라는 상층부를 연구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연구자 자신이 일정 정도 상층부에 속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엘리트 대학교 출신이었고, 친족과 동료의 연줄을 통해 금융업계와 투자 은행 직원들에 쉬이 접근할 수 있었으며, 엘리트 대학교 출신이 아니라면 꿈도 꾸기 어려운 현지에 직접 들어갈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이는 전통적으로 하층부와 주변부를 연구했던 인류학자가 가진 권력과 조금 다른데, ‘권력자’인 연구자가 바라본 대상은 자기와 동등한 위치의 또 다른 ‘권력자’이며, 어쩌면 이 과정에서 상층부 연구자들은 자기 자신이 가진 권력을 불편하게 마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들이 권력을 어떻게 활용하고, 이를 통해 상층부를 어떻게 묘사할 것인가는 계속 고민해야 하는 지점으로 남아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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