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으로 얼룩진 단상들
찰스 부코스키 지음, 데이비드 스티븐 칼론 엮음, 공민희 옮김 / 잔(도서출판) / 202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출간 기다리다, 목빠지겠어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완벽한 캘리포니아의 하루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리차드 브라우티건 지음, 김성곤 옮김 / 비채 / 201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얼마나, 얼마나, 얼마나 기다렸던가! 진정한 현대문학의 시작! 우리 모두는 브라우티건의 자식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타임 투 리브 (1disc) - 할인행사
프랑소와 오종 감독, 잔느 모로 외 출연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7년 7월
평점 :
품절


 

Ⅰ.   

 카메라는, 소년의 뒷모습을 가까이에서 잡는다. 소년의 저 앞 멀리로 바다가 보인다. 파도가 일렁인다. 바다에서 불어온 바람에 소년의 머리카락이 흩날리지만, 소년은 바다를 가만히 지켜볼 뿐이다. 오랫동안, 침묵에 싸여. 그러다 소년은 일어나 천천히 바다를 향해 걸어간다.  카메라 앞의 소년의 몸이 카메라에서 멀어질수록, 소년은 작아지고 멀리 어렴풋히 일렁이던 바다는 보다 선명해진다. 거세게 밀려오는 파도 앞에 서있는 소년이, 위태로워 보인다.  


바닷가의 소년은 유년의 로맹이다. 소년 로맹 앞에 멀리서, 어렴풋하게 일렁이고 있는 바다는, 삶의 저편 어딘가에서 밀려오고 있는 죽음이다. 어린 로맹이 크게 보이다가 카메라에서 멀어짐에 따라 작게 보이고, 그에 따라 파도치는 바다가 크게 보이는 것은 어린 시절부터 로맹 가까이에 죽음이 일렁이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아니면, 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우리들 삶의 배경은 항상 죽음이라는 것.
 
 

 

Ⅱ.  

 맹은 유능한 사진작가이다. 어느 날 사진을 찍다가 쓰러진 그에게, 병원은 시한부 삶을 선언한다. 길어야 3개월. 그는 화학치료를 거부한 채, 자신의 삶을 정리해나간다. 자신의 죽음을 가족에게도 비밀에 부치고, 게이인 그의 애인 샤샤에게도 그 사실을 숨긴다. 다만, 이제 죽음을 앞둔 그의 할머니를 찾아가는 로맹. 그 길에 들른 휴게소 레스토랑 여주인의 로맹에 대한 호기심어린 관심. 알 듯 모를 듯한 여주인의 미소. 황급히 레스토랑을 떠나는 로맹. 
그날 저녁, 로맹은 할머니와 저녁식사를 함께 하면서 자신의 시한부 삶을 고백하고 위로를 받는다. 그리고 어린 시절 자신의 추억이 있는 숲 속을 산책하면서, 삶으로부터 멀어지는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면서 상념에 잠긴다. 할머니와 하룻밤을 같이 보내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다시 들른 휴게소 레스토랑. 그리고 다시 로맹 앞에 나타난 레스토랑 여주인, 그리고 그녀의 알 듯 모를 듯한 미소. 무정자증의 남편을 대신해서 아이를 갖는데 도움을 달라는 여주인의 제안.  불쾌한 마음으로 자리를 떠나는 로맹.  그리고 연인 샤샤와의 결별.  홀로 남겨진 로맹, 깊어지는 로맹의 죽음의 그림자.  그리고 객혈.  죽음에의 두려움. 다시 휴게소 레스토랑을 찾아가서 부부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로맹. 
   
죽음의 의식에 사로잡힌 로맹이 자신의 나머지 삶을 위로받기 위해 찾아간 것이 할머니인 것은 자연스럽다. 할머니도 죽음 가까이에 있으므로, 동질감을 가진 존재이므로. 그런데, 그 할머니가 젊은 시절 남편(로맹의 할아버지)를 여의고 아이(로맹의 아버지)를 버리고 자기의 살 길을 찾아갔던 할머니라는 사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할머니는 자신을 찾아온 로맹에게 지난날 로맹의 아버지를 버린 사실을 이야기하면서, '아들을 데리고 있으면 자신도 죽을 거 같아서였다'고 말한다. 이 대목은 <타임 투 리브>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젊은 시절의 할머니는,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 자신의 아들을 버리는 부도덕/ 비윤리의 삶을 살았다. 할머니의 고백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죽음은 아주 힘이 세다, 도덕/ 윤리/ 법/ 규범/ 상식, 이 모든 것보다도. 그런 점에서 죽음을 앞둔 로맹이, 젊은 시절 죽음에 대한 두려움때문에 도덕과 윤리와 법과 규범과 상식을 저버렸던 할머니를 만난다는 설정은, 로맹이 죽음 앞에서 사회적 질서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또다른 사례로, 할머니 댁에 오는 길에 잠깐 들른 휴게소 레스토랑의 여주인이 로맹에게 호기심어린 관심을 보인다는 설정을 들 수 있다. 죽음을 앞둔 로맹이, 결국 불임의 남편을 대신해서 자신에게 아이를 갖게 해달라는 부도덕/ 비윤리적 부탁을 하는 레스토랑 여주인을 만난다는 설정은, 로맹이 죽음 앞에서 도덕/ 윤리 등에 대한 혼란, 고민의 길에 들어섰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Ⅲ.

 로맹과 레스토랑 부부, 셋이 함께 하는 생식(生植)행위.  로맹과 여주인의 생식행위, 그리고 그 생식행위를 하는 자신의 아내와, 그리고 그 옆의 로맹과도 사랑을 나누는 남편.  동성애.  그리고 윤리적이지 못한, 결코 용납될 수 없는 부도덕. 죽음의 두려움.  그것을 넘어선 생명에의 애착. 도덕과 윤리, 법과 규범으로부터 벗어난 3명의 사랑.

<타임 투 리브>에서 가장 아름답고 눈물이 나는 씬.

분명히 추악하고 역겨울 수 있는 장면임에도, 너무나 아름답고 숭고하게 절제된 씬. 
 

 <타임 투 리브>에서 가장 아름답고 순수하고 평화로우며 가슴아픈 장면. 그러면서도 삶의 이유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고민하고 느낄 수 있게 하는 장면. 죽어가는 로맹. 새로운 생명을 얻고자 소망하는 부부. 죽음으로 인해 흔적없이 사라져갈 자신의 존재에 대한 로맹의 불안과 두려움은, 사회적 모랄(도덕/윤리)의 금기를 넘어서는 자세로 나아간다. 사회적 질서가 그어놓은 금을 밟지 않기 위해, 죽음 앞에서의 불안과 두려움을 그대로 안고 갈 것인가? 아니면, 그 선을 넘어섬으로써 자기 생의 흔적을 남겨 자기 존재를 영원히 남길 것인가?  로맹은, 후자를 선택한다.

이 대목이 말하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죽음에 대한 불안에서 벗어나 자기존재의 영원성을 확보하려는 인간적 본능은 사회적 모랄로는 통제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사회적 모랄은 아직 생(생명/삶)이 남아 있는 자들을 위한 것이라는 것.

낯모르는 남자와, 불임의 남편과, 아이를 갖기를 원하는 아내 3명이 아이를 만들기 위해 섹스를 하는 장면은 그자체로 역겹다. 그리고 낯선 남자와 자기 아내가 새로운 생명을 갖기 위해 생식행위를 하는 그 옆자리에서 그것을 지켜보는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아내와 심지어 낯선 남자와 사랑을 나누는 남편은 추악한 선을 넘어선다. 

하지만 그들의 행위에 대한 '역겹다' '추악하다'는 가치판단은, 아직 살아 있는 자들이 내릴 수 있는 가치판단이다. 

내가 내일 죽음을 맞이한다고 할때, 내가 반드시 지켜야할 사회적 모랄의 선은 어디까지일까? 아주 없지는 않겠지만, 사회적 금기의 선은 지금보다 훨씬 느슨할 것임은 분명하다.  실제로 <타임 투 리브>에서 이 장면은, 너무나 아름답고 순수하고 평화롭다.  그러면서 가슴아프기까지 하다.  역겨움과 추악함의 감정은 찾아볼 수가 없다. 

프랑소와 오종은 묻는다,

죽음 앞에서, 우리들의 삶이란 무엇인가?

죽음 앞에서, 삶의 기준인 도덕과 윤리와 법과 규범과 상식은 무엇인가? 

 

Ⅳ.

그로부터 2개월여 후, 자신의 모든 재산을 레스토랑 부부의 곧 태어날 아이에게 유산으로 남기는 로맹. 레스토랑 부부와의 이별. 생의 모든 것으로부터의 이별. 결심하듯 해변으로 해수욕을 떠나는 로맹. 따사로운 햇빛, 행복해하는 사람들. 멀리서 일렁이는 파도. 내일 곧 죽을 몸이라는 걸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 하늘과 바다와 사람들과 눈부신 세상을 사진찍는 로맹. 그리고 해수욕. 그리고 일광욕. 마지막인 듯 모래사장에 누워 세상을 둘러보는 로맹.

죽음을 앞둔 로맹이 찾아간 바다는, 어린 시절의 로맹 앞에 일렁이던 그 바다다. 그것은, <타임 투 리브>가 수미상관의 구조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구조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죽음을 앞둔 로맹이 어린 시절의 로맹을 찾아간다는 설정도 흥미롭거니와(실제로 로맹은 그 바닷가에서 어린 시절의 자신을 만난다.  이 영화에는 로맹이 죽음을 인식하게 된 이후, 줄곧 로맹의 근처를 어린 로맹이 따라다니는 환상을 보여준다. 이 영화의 또다른 형식적 미학이다),  그 만남이 바닷가에서 이루어진다는 것도 흥미롭다.  우리는 시간이 흐를수록 어린 시절로부터 멀어지는가? 가까이 가는가? 어린 로맹과, 죽음을 앞둔 로맹 앞에 일렁이는 바다는, 우리, 혹은 우리의 삶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죽음의 은유체이지 않을까?  죽음이 우리의 곁을 내내 따라다니는 우리의 그림자와 같은 것이라면, 그리하여 우리는 내내 죽음의 두려움과 불안 앞에 설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라면, 우리가 지켜야할 삶의 모랄은 무엇이고 어디까지인가? 

죽음을 앞두고, 사회적 모랄을 위반하여 더 큰 삶/ 생명의 세계로 나아가는 로맹을 보면, 왜 자꾸 카뮈의 <이방인>의 뫼르소가 떠오르는가? 뫼로소의 이름이 mar라는 바다를 뜻하는 단어에서 왔음은 또 어떤 연관성을 갖는가?
 

 

  

 

Ⅴ.

시간이 지나, 해가 지고 있는 해변가. 바닷가를 떠나는 사람들.

멀리서 일렁이며 밀려드는 밀물. 모래사장에서 일어날 줄 모르는 로맹.

로맹의 실루엣을 배경으로 천천히 지고 있는 해, 그리고 밀려드는 바다.

세상의 마지막 빛을 바라보는 듯 일몰의 빛을 바라보는 로맹. 그리고 눈물.  

 

바다에 서서히 잠기는 로맹. 

일몰의 아름다움에 눈물을 흘리는 로맹. 

삶의 부조리에 죽음으로 맞선 뫼르소.

죽음의 조리에 생명으로 맞선 로맹. 

분명하다, 로맹은 21세기 뫼르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1
박흥용 지음 / 바다그림판 / 200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Ⅰ. 여행의 시작

  1. 견자, 서자로서의 차별, 편견으로 시달리다.

      급기야 살인누명을 쓰고 고문을 당하다.

   2. 견자, 고문으로 생긴 병을 장님 황정학의 침술로 치료하다.

      황정학, 서자신분으로 고통받는 견자를 구해주다.

   3. 견자, 스승 황정학을 지팡이 삼아 차별이 없는 자유의 삶을 찾아 길을 나서다. 

 

견자는, 아웃사이더이다. 서자라는 점, 에미없는 자식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우리 아버진 나이 오십이 되도록 공부해서 생원진사시에 겨우 합격해서 할일을 찾지 못해 어슬렁거리는 촌부다. 물려받은 재산이 넉넉해서 오십 줄의 무료를 기방을 찾아 달래다가 어느 젊은 기생을 통해 나를 낳았는데(난 생모를 본적이 없다. 날 낳고 산고로 죽었단다), 내가 세상에 나오기 전에 아버진 이미 부인과 결혼한 자식, 대 이을 손자까지 두고 있었다니. 어쨌든 난 그따위로 태어난 개자식(犬子)이다.  


견자에게는 그래서 모성이 결핍되어 있는데, 그 모성결핍이 견자를 사회에 대한 불만을 키워 싸움질로 시간을 보내게 한다. 그에게는 그의 삶은 빛이 없는 어둠의 시간이며, 그 어둠을 밝혀줄 달이 없다. 장님같은 시간을 이끌어줄 지팡이하나 없다. 그런 그에게 황정학이라는 장님 스승이 등장한다는 것은, 역설적이면서도 자연스럽다. 황정학이 서자신분이기 때문에 모진 고통을 받게 된 견자를 치료해준다는 설정은 그 자체로 상징하는 바가 크다. 그리고 황정학이 장님이라는 설정은, 견자의 장님과 같은 삶에 대한 은유이자 장차 그가 걸어갈 삶의 지표라는 점에서, 황정학은 견자의 내면적 짝패이다.

황정학의 다음 대사를 보라.

밤엔 달이 있고, 컴컴한 방안엔 등잔이 있고, 이 맹인에겐 지팡이가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역설적으로 존재하며, 거기엔 짝패가 존재한다는 황정학의 논리를 그대로 따르면, 서자라는 신분적 차별 때문에 세상에 대한 분노와 증오로‘눈은 뜨고 있으나 세상의 진실을 보지 못하는’견자에게는‘눈멀었으나 세상을 환히 볼 수 있는’황정학과 같은 짝패가 필요하다. 견자와 황정학, 이 둘은 그렇게 운명적으로 만난다. 그리고 견자는 황정학을 스승으로 모시고, 분노와 증오, 차별과 수모의 삶에서 벗어나 보다 자유로운 세상으로의 여행을 시작한다. 
 

    Ⅱ. 자아찾기로서의 여행 

  Ⅱ- ① 내면적 자아의 인식 
    4. 견자, 스승 황정학으로부터 생각 이전의 본능을 배우다.

         기방에서 가희에게 동정을 버림으로써, 이전의 자아를 허물어뜨리다.

      5. 견자, 스승의 친구 놋각쟁이의 방짜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아가다.  

      6. 견자, 길 위에서의 피투성이 처절한 싸움 끝에 기생 백지를 만나다.  

 

 

황정학은 견자에게 세상의 모든 것을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본능으로 볼 것을 가르친다. 그 본능은 생각/ 깨달음 이전의 차원이다. 견자가 서자로서의 분노와 증오 때문에 세상의 참모습을‘있는 그대로’보고 느낄 줄 모른다는 것을 황정학은 간파하고 있는 것이다. 황정학과 견자의 다음 대화를 보라.  


  견자 - 스승님은 앞을 못보니까 잘 아시겠네요. 도대체 안보인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스승 - 너는 눈을 떴으니 보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겠구나. 보인다는 것이 무엇이냐?

            가르쳐다오.

  견자 - 보인다는 것...산, 들, 강, 하늘....보긴 보는데 본다는 걸 뭐라고 정의해야 할지...

           그냥. 그냥 보는 거죠, 뭐.

  스승 - 그럼 나도 그냥. 그냥 안보일 뿐이다.

  견자 - 그럼 스승님이 말씀하시는 본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스승 - 그럼 네가 알고 있는 안보인다는 것이 무엇이니?

  견자 -  스승님이 보는 그것을 저는 못본다 이거 아닙니까?

  스승 - 그럼 처음부터 질문을 다시 해라. ‘스승님은 보이니까 잘 아시겠네요. 
           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하고 물어.

  견자 - 스승님은 보시니까 잘 아시겠네요. 본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스승 - 좋아. 질문 맘에 들었어. 본다는 것은 안다는 것이다.

  견자 - 무엇을 알아요?

  스승 - 내가 장님이라는 걸.

  견자 - 나 참, 뭐가 뭔 말인지. 저도 스승님이 장님이라는 걸 알아요. 
  스승 - 니놈이 장님인 줄은 모르잖느냐?

  견자 - ......

  스승 - .....

  견자 - 그럼 내가 장님이란 걸 인정하면 나도 보는 거로군요.

  스승 - 아니!  

 견자 - 왜요? 스승님과 똑같은 처지가 되는데.  

  스승 - 똑같긴 뭐가 똑같니? 나는 지팡이가 뭔지 알지만 너는 지팡이가 무엇인지 모르잖아.  


황정학은 견자가 서자라는 신분적 굴레로 분노와 증오에 눈이 먼 장님이어서 세상에 대한 진실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고, 그 장님임을 깨닫지 못할뿐더러 장님의 어두운 삶을 이끌어줄 지팡이(진실을 보는 눈)를 갖지 못하고 있음을 정확히 지적해준다.

그렇다면, 그 장님임을 깨닫기 위해서는, 그리고 자신의 삶을 이끌어줄 지팡이를 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황정학은 자신의 제자를 기생 가희에게 데리고 가서 견자의 동정을 잃게 한다. <구르믈버서난달처럼>에서 상당히 상징적으로 제시되는 이 대목은, 견자가 이전의 내면 세계로부터 벗어남을 암시한다. 그러니까, 견자가 새로운 내면세계를 발견하는 삶의 단계로 접어들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견자의 세상에 대한 분노와 증오에 사로잡힌 내면세계를 허물어뜨리고 난 다음, 황정학은 견자를 안성 놋각쟁이(방짜꾼)에게로 인도한다. 황정학이 견자를 놋각쟁이에게로 인도한 이유는, 놋각쟁이의 다음 대사에서 잘 드러난다.  


바둑(놋쇠덩이) 앞에 서면 노비도 양반도 다 잊는다. 그저 만들고 싶은 방짜 하나만 머리 속 가득한데, 바둑이 머리 속의 방짜 모양으로 완성해가면, 나도 그렇게 새로 태어나는 것 같더니. 평생 만들어온 방짠데, 만들 때마다 이렇게 가슴 설레고 새로울까.  


그렇다, 황정학은 놋각쟁이를 만나게 함으로써 견자가 보다 진정한 내면과 자아에 눈을 뜨기를 바랐던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잊고 진정한 자아를 발견할 수 있는‘하나’를 갖는다는 것. 견자는, 스승의 그 참뜻을 영민하게 깨닫는다. 그래서 견자는 기존의 자기 내면을 철저히 허물어뜨리고 백지와 같은 내면 상태를 갖는다. 그리고 견자는 인생의 두 번째 운명의 여인 백지(白紙)를 만난다. 백지는, 견자가 황정학을 만나 이전의 자신을 버린 상태에서 만나게 되는 자신의 새로운 자아이다. 타불라 라사 상태로서의 견자의 자아. 그런데, 견자가 그 백지를 만나게 되는 것이, 자신이 피투성이가 되는 처절한 싸움터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때의 싸움은, 자신을 깨닫지 못한 견자의 자아와, 황정학을 통해 어렴풋이 자신을 깨달아가는 견자의 새로운 자아와의 싸움이다. 그 싸움 끝에서 백지를 만났다는 설정은, 견자가 백지와 같이 순결하면서도, 새로운 자아를 각성했다는 것이다. 견자는 이제 그 백지위에 새로운 자신의 삶의 내력을 써 나갈 것이다. 

 
-② 사회적 자아의 인식

    7.  견자, 서자출신으로 세상을 향해 변혁의 칼을 휘두르는 이몽학을 만나다.

       8.  견자, 부패한 세상에 저항하는 보부상의 우두머리이자 의적인 이장각을 만나다.

           그리고 황정학, 백지와 헤어지다.

       9.  견자, 세상을 여자의 몸으로 보는 환쟁이와 만나 함께 금강산으로 따라가다.

            금강산에서 환쟁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다.

       10. 견자, 금강산에서 이장작과 재회하다, 불평등한 세상을 상대로 싸우다.  

            견자, 용맹성과 뛰어난 칼솜씨를 세상으로부터 인정받다. 이장각 죽다. 

자아에 눈뜬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사회와 세상에 눈뜨는 것이기도 하다.‘나’는 나 자신 그 자체로 인식될 수 없다.‘나’는 항상 주변 누구와의 관계 속에서만 설명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견자가 새로운 자아에 눈을 뜬다는 것은, 따라서 사회와 세상에 눈을 뜬다는 것에 다름아니다. 그런 점에서, 백지와 같은 새로운 자아(내면적 자아)에 눈을 뜬 견자가, 사회를 바꾸려는 의지를 가진 이몽학과 이장각을 만난다는 설정은 무척이나 의미하는 바가 깊다. 또한, 사회변혁의 주체들인 이몽학과 이장각을 만나는 순간, 견자의 내면적 발견을 이끌어준 황정학, 백지와 헤어지는 설정이 자연스럽게 이해가 된다.  


이제 견자는 새로운 자아라는 백지 위에 사회적 자아를 그려 넣으려한다. 황정학과 백지와 헤어진 견자가 부패한 사회를 바로잡으려는 의적의 무리가 있는 금강산을 찾아가는 환쟁이를 만나게 되는 것은 견자가 자신의 자아 위에 사회적 자아를 그리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을 자유롭게 인식하려했던 그 환쟁이가 세상의 편견과 고정관념의 벽을 깨지 못하고 자살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유로운 내면적 자아가 사회적 자아로 거듭나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 일인지를, 짐작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견자는 개인의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관점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그 안목을 통해 개인은 자유를 얻을 수 있지만, 그것은 사회적 편견과 독사와의 싸움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적 편견과 독사를 깨뜨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 사회적 편견과 독사에 맞서 자신의 자유를 추구한다는 것은 개인에게는 한계상황을 이겨내는 것만큼 힘든 일인지도 모른다. 금강산 환쟁이는 사회적 한계상황을 넘어서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마는 것이다. 견자의 다음 대사는 그 환쟁이의 죽음을 통해 세상을 보는 안목(관점)의 필요성을 깨닫고 있음을 보여준다.  

 

산중에 길 잃은 나는 이 알몸 그림 속에서 세상을 보려고 했어요. 각자 처해진 상황이라는 것이 산을 여자로 보게도 하고, 여자를 산으로 보게도 하는 안목을 만들더군요. 앞을 못보는 장님이 지팡이로 길을 찾듯, 사람들은 모두 다 자기의 안목에 의지해서 세상을 이해하잖아요.

견자는 나름대로의 안목으로 사회와 세상을 보려고 한다. 그 안목은 세상의 불평등함에 대한 저항이다. 견자가 의적 이장각의 산채를 찾아가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③ 사회적 자아의 좌절, 한계인식 

    11. 견자, 산채 내의 권력다툼을 보면서, 사회조직을 통한 사회변혁의 한계를 느끼다.

    12. 견자, 백지와 다시 만나다.

         백지, 견자의 목숨을 구해주다.  

금강산 이장각의 의적떼를 찾아간 견자는, 그곳에서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는다. 황정학을 통해 깨닫게 된 내면적 자아를 바탕으로, 불평등한 사회를 바로잡으려는 사회적 자아로 발전해나가는 견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세상을 향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적은 당신(관군)이 아니라 불평등이오.     

 

그러나, 견자는 권력에 눈이 먼 사회조직을 보면서, 사회개혁/ 혁명의 진정성에 대해서 환멸한다. 이장각의 극적인 죽음은 견자의 사회적 자아 각성이 실패로 돌아갈 것임을 암시한다. 그래서 견자는 사회적 자아로 이끌었던 이장각이 죽고 없는 금강산 산채를 떠난다. 그것은 견자에게 끝내 극복하지 못한 하나의 한계상황일 것이다. 견자의 사회적 자아가 좌절을 겪으면서 스스로 한계상황을 인식하게 되었을 때, 다시 돌아 가야할 것은 내면적 자아이다. 금강산 의적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산채 내에서의 권력다툼 때문에 죽음의 상황에 몰린 견자를 구해주는 것이 백지라는 점은, 사회적 자아로 발전하지 못한 견자의 자아가 다시 내면적 자아로 돌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박흥용이 말하고자는 하는 것은 무엇일까?

사회적 변혁/ 개혁의 주체들에게 진정한 내면적 성찰이 필요함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견자는 진정한 내면적 자아를 단단하게 인식하기 이전에 사회적 자아로 나아갔던 것이고, 그 결과는 자기한계의 인식이었던 것이다. 

 

Ⅲ. 내면적 깨달음으로서의 여행  
 

    13. 견자, 잃어버렸던 스승 황정학과 다시 만나 길을 떠나다.

         곤경에 처한 오위대장의 손녀를 도와주고 오위부장의 그늘에서 몸을 쉬다.

         황정학, 견자에게 칼을 겨누어야할 대상이 다름아닌 자기 자신임을 가르치다.

    14. 견자, 오위대장으로부터 벼슬을 제안받고, 그 손녀로부터 사랑받아 청혼받다.  

         둘 다 물리치다.

         견자, 견성(見性)에 이르다.

    15. 견자, 눈오는 밤 황정학의 죽음을 맞이하다.

          황정학, 견자에게 눈 오는 그믐밤에 달을 가리키며 죽다.

    16. 견자, 생과 사가 오가는 스승의 묘막 앞에서 한계로부터의 자유를 깨닫다.

 
견자가 사회적 자아로 나아가는 데 실패하고 자기 한계를 인식하기 시작한 단계에서, 백지를 만나고 황정학을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황정학은 견자의 한계 너머를 가르쳐주는 견자의 지팡이인 것이다. 다시 만난 황정학은 견자를 다음과 같이 질타한다.  


칼의 노예(사회적 이상추구, 맹목적 이상 추구)가 돼서 백정짓을 하는 인간이 있는가 하면, 칼을 다스리는 진짜 칼잡이가 있다. 백정 놈은 모든 걸 칼로 해결하려 하니 칼집에 칼이 있을 새가 없지만, 칼잡이는 매번 칼집을 더듬으며 ‘이 칼을 뽑아 내가 얻는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니 칼집에서 칼빼기가 쉽지 않다. 백정 놈의 칼집은 제 칼 하나 간수 못해도, 칼잡이의 칼집은 칼뿐 아니라, 마음까지 단속한다, 이놈아, 이놈아. 성을 함락시키는 이보다 제 마음을 다스리는 이가 진짜 칼잡이야.           (괄호 속은 인용자 설명)

황정학은 견자가 내면적 자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사회적 변혁과 혁명에 뛰어들었음을 질타하고 있는 것이다. 상대방(사회/세상)을 향해 칼을 겨누기 이전에,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내면(마음)을 진정으로 돌아보는 것이다.

그래서 황정학은 견자에게 흐트러지지 않는 보법(자기 내면의 정리)과,‘내 칼로 나를 겨눈다’(치열한 자기 성찰), 그리고‘껍데기를 벗어라’(사회적 명예나 영광에 대한 집착으로부터의 탈피)를 가르친다. 황정학은 말한다.

비뚫어진 세상에 대한 분노도, 영웅심도, 그 어떤 명분도 들의 풀과 꽃과 같아서,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면 말라서 떨어진다. 내가 적으로 삼은 상대는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흥하고 쇠하기를 내 칼과 관계없이 한다구. 알고 보면 이 황정학의 칼은 적이 없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사랑패 광대는 얼굴을 감췄으니, 병신노릇도 좋고 미치광이 노릇도 좋고 거리낄 것이 없다. 속모습의 제 얼굴을 겉모습의 탈바가지에 의지하고 만판으로 덩실댄다. 그저 그 가면을 빙자해서 모든 굴레를 벗어던지고 살판나게 뛰어다니니-

그 가면이 광대의 자유가 아니고 뭐냐. 광대가 가면 뒤에 숨어 자유하는 것처럼, 너도 네 칼 뒤에 숨어서 자유해라. 그것이 네 칼의 용도다.

견자는, 서자라는 차별과 서러움을 받아왔다는 역방향에서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몸부림쳐왔음을 깨닫게 된다. 그 사회적 인정이 그의 눈을 멀게 해왔던 것이다. 황정학의 가르침에 깨달아 그는, 오위대장이 자신의 양자로 거두워 들여서 벼슬자리를 주겠다는 제안을 거부한다. 그리고 오위대장의 손녀의 청혼도 거부한다. 그에게 사회적인 성공을 보장해주는 그녀의 청혼을 거부했다는 것은, 견자가 더 이상 사회적 허명(虛名)을 좇는 집착에서 벗어났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견성한 것이다. 황정학으로부터 배운 칼을 통해 자기자신의 내면을 다스릴 줄 알게 되었고, 사회적인 인정과 성공에 대한 집착에서도 벗어날 줄 알게 된 것이다. 견자는, 견성(見性)한 것이다.

견자의 견성이 이루어졌을 때, 그는 황정학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황정학이 견자의 대자적 존재로서의 내면적 짝패였다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견자의 견성은 곧 황정학의 죽음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황정학은, 눈내리는 그믐날 밤, 견자에게 어두운 밤하늘을 향해‘저 달을 보라’며 손짓을 하면서 생을 마감한다.

눈내리는 그믐밤, 달이 없는 그 밤하늘에서 달을 보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스승 황정학의 죽음은 견자에게 또 하나의 화두가 된다. 그 화두에 대한 정진 끝에, 견자는 마침내 스승의 마지막 가르침을 깨닫게 된다.  


그믐엔 달이 없다. 그믐엔 달이 없다. 그믐엔 달이 없다.

없는 달을 어떻게 봐.

하하. 한계를 깨닫게 하려는 스승님의 기지였구나.

장님이 달을 본다는 것도 불가능한 한계상황이거니와, 달이 없는 그믐밤에 달을 본다는 것은 한계상황 중의 한계상황이다. 장님인 황정학은 그 이중의 한계상황을 넘어섰던 것이다. 자신을 가두는 모든 한계상황을 스스로 돌파하라는 것. 황정학은 죽음으로써, 그의 제자에게 마지막 가르침을 전해주고 떠난 것이다. 견자는 그 의미를 깨닫는다. 현상에 집착하지 않는 것, 그 현상너머를 바라볼 것, 그럼으로써, ‘구름’이라는 장막을 벗어난‘달’처럼 자유로워질 것. 견자는 자신을 가두는 모든 ‘구름’으로부터 벗어나‘자유’하게 된다.

이제 막 눈이 열리는 장님의 탄성! -

 진짜 자유는 자존심과 오기라는 항아리가 깨어질 때 얻는다-

어디서 밀려오는 감동일까? 세상에 이토록 조용한 기쁨이 있다니. 스승님은 이미 아셨던 거야. 내 자존심과 오기가 나를 가두는 항아리라는 것을.... 스승님이 말씀하시는 달이 어렴풋이 보인다.

- 아, 한계라는..... 자유!-


 Ⅳ. 한계 넘어서기의 여행   

  17. 견자, 다시 세상으로 나아갈 것을 다짐하다.

  18. 견자, 혼란한 세상에서 백지의 죽음을 전해 듣고, 다시 금강산 산채를 찾아가다. 

       그 길에, 남장을 하고 자신을 따르는 오위대장의 손녀를 만나 동행하다.

  19. 견자, 금강산에서 왜적을 맞아 크게 이기다.

  20. 견자, 사회적 혁명을 꿈꾸는 이몽학과 다시 만나 한바탕 겨루고 헤어지다.

  
견자는, 스승의 죽음을 통해 모든 한계상황으로부터의 자유로워지는 삶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견자에게 한계상황은 무엇이었나?

우선, 금강산 산채에서의 사회적 자아로서 맛보았던 좌절감이 첫 번째 한계상황일 수 있다. 자신에 대한 견성은 이루었지만, 금강산 산채에서 느꼈던 한계는 아직 극복하지 못한 상태다. 그러니, 자신의 내면을 깨닫는다는 것은 외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시작의 과정일 뿐이다. 사회변혁은 자신의 내면적 깨달음 이후여야 한다는 작가의 생각이 바탕에 깔려있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한계상황으로 좌절감을 안겨준 금강산 산채를 다시 찾아간다.

여행의 끝이 아니라 여행의 시작이었군.

진정한 내면적 자아를 형성한 상황에서, 백지가 죽는 것도 자연스럽다. 백지는 견자의 즉자적 상태의 순수한 자아였기 때문에, 황정학을 통해 대자적 존재를 거쳐 즉자-대자의 자아로 거듭나고 있는 견자에게, 순수한 내면으로서의‘백지’상태는 이미 지나간 것이다. 그리고 금강산 산채에 다시 돌아가 자신에게 좌절감을 안겨준 한계상황을 극복해낸다. 이 장면을 통해 박흥용의 사회변혁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다. 사회변혁과 개혁, 그리고 혁명은 자신의 내면적 자유로움을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 내면적 자아의 충분한 성숙 이후에, 사회변혁과 혁명을 말해야 한다는 것. 그것은 김수영의 <푸른 하늘을>이 지향하는 바와 같다.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왔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본 일이 있는/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있는가를 /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 김수영 <푸른 하늘을> 

견자는 자신의 첫 번째 한계상황을 그렇게 극복해낸다. 사회혁명을 꿈꾸는 이몽학과의 대결은, 견자가 모든 집착과 구속으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운 자아를 꿈꾸고 있음을 보여준다.


Ⅴ. 여행의 시작, 그리고 끝 

 

  21. 견자, 다시 떠난 길 위에서, 개울가에서 빨래하는 어머니 근처의 나무둥지에  

       기저귀 끈으로 묶인 아이를 보면서, 진정한 한계와 자유에 대해 고민한다.  

       그 둘은 결국 하나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금강산에서부터 자신을 따라온 오위대장 손녀의 이름을 묻다.  


  견자에게 남아있는 한계상황은 무엇일까? 그것은 견자가 깨달은 자유로운 내면적 자아가 사회적 자아와 이어져 있지 않은 상태라는 것이다. 그의 칼은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을 겨누고 있을 뿐, 사회/ 세상을 겨누고 있지 않는 것이다. 견자의 반대편에서 세상을 향해 칼을 겨누는 자가, 이몽학이다. 사회변혁/ 혁명에의 꿈('몽학'이라는 이름)을 향하지 않은 내면적 자유로움은 무의미한 것은 아닐까? 그런 물음이 또 하나의 화두가 된다. 그러니까, 이몽학은 견자가 넘어서야할 마지막 한계상황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몽학과의 대결을 통해서, 이몽학이 아직 사회적 변혁/ 개혁에 눈이 먼 장님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회변혁이라는‘구름’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달인 것이다.

견자는 생각한다. 한계란 무엇이며, 어디까지인가? 어쩌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구르믈버서난달’과 같은 자유로움에 대한 집념도 어쩌면 자신의 눈을 멀게 하는 한계상황은 아닐까?

(견자, 나무둥지에 기저귀 끈으로 묶인 아이를 보면서 운다)  

 

견자 - 저 기저귀 끈은 아이를 구속한 걸까? 보호한 걸까?

오위대장의 손녀 - 그 기저귀 끈이...이의 한계 같지만, 알고 보면..  

                         아이를 위험으로부터 자유하게 한단 말이죠?

견자 - 그 끈을 더듬다보면 언젠가는 그 끈의 근본을 만나게 되겠지.

오위대장의 손녀 - 근본?

견자 - 아이를 기저귀로 묶은 어머니....같은, 나를 한계와 자유로 묶어버린 더 큰 어머니. 
         스승님이 말씀하신 지팡이가 그 끈이라는 걸 이제 겨우 알게 된 거야.  


견자는 깨닫는다. 모든 자유는 한계를 가진 것이며, 그 한계 속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음을. 자유는 한계이고, 한계는 자유인 것. 그러니까 한계를 인정할 때,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장님상태에서 벗어나고자 시작된 견자의 여행은, 견자가 장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대목에서 끝이 난다. 여행의 시작은 곧 여행의 끝인 것이었다. 그것을 돌려 말하면 여행의 끝은 또다른 여행의 시작인 것이다. 그 여행의 끝에서, 견자는 금강산 산채에서부터 줄곧 자신을 따라온 오위대장 손녀와 새로운 생을 시작하려 한다. 그녀와의 새로운 삶의 시작은, 나중에 태어나게 될 누군가에게는 하나의 한계상황이 될 것이다. 한계는 한계라고 회피하게 될 때, 극복할 수 없는‘한계’가 되지만, 한계임을 알고 그 한계를 살아가게 될 때, 그것은 더 이상 한계가 될 수 없는 것이다.  

  

  

P. S. 

1.

<구르믈버서단 달처럼>은, 성장문학으로 손색이 없다. 단순히 성장만화가 아닌 성장문학으로서의 요소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 거기에는 사회와 개인, 자유와 구속, 운명과 저항 등 좋은 성장문학이 갖추어야할 모든 요소들이 때로 아름답게, 때로 철학적으로 녹아있다. 단선적 변화와 발전으로서의 성장개념이 아닌, 갈등과 길항, 모순과 극복의 변증법적 전개과정이 <구르믈버서난달처럼>을 읽은 이들의 넋을 빼놓고 만다.

 

2.

<왕의 남자> 이준익 감독에 의해 <구르믈버서난달처럼>이 영화화된다고 한다. 2002년경에 처음으로 읽으면서, 박찬욱이 만들 가능성이 있고 그럴경우 원작의 아우라를 충분히 담아낼거라고 생각했었다. 이준익이 만들 경우, 어쩌면 <왕의 남자> 속편이 될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이준익이 최근의 흥행실패를 자신의 성공작에 기대려는 안이한 발상에 젖어있는건 아닌지, 걱정스럽기도 하다. 이준익이 걱정스럽다는 것이 아니라, 원작의 훌륭함을 그의 영화가 훼손시키지나 않을까 두렵다는 것이다.

영화 <구르믈버서난달처럼>의 캐스팅이 끝났다고 하는데, 역시 다소 의아하다.  

 

황정학 - 황정민/ 견자- 백성현/ 이몽학 - 차승원/ 백지 - 한지혜  

 

황정학 역에 황정민이 캐스팅된 것은 적절해보인다. 개인적으로는 이문식가 어울릴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문식은 조금 가벼워 보여 황정학의 카리스마를 표현하기에는 역부족일지도 모른다. 그럴 경우, 백윤식이 적임자일 수도 있을텐데. 황정민의 뛰어난 연기를 믿어볼 수 밖에 없겠다.

견자 역에는 누가 뭐래도 류승범이지 않을까? 다른 말이 뭐가 필요할까? 거칠어보이는 외모와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겉도는 반항아역에 그만큼 잘 어울리는 배우도 드물것이다. 백성현을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유덕환과 이준기를 섞어놓은 듯한 외모다. 이 또한 이준익의 안이한 발상일 것 같아 걱정스럽다.

차승원이 이몽학에 캐스팅된 것은 아주 적절해 보인다. 지금까지 보여준 역할보다 더 차갑고 무겁고 강하게 연기를 해주길 바란다.

백지 역에 한지혜 또한 의외다. 백지는 어떻든 견자의 내면적 자아를 나타내면서 결국엔 비극에 이르는 여인이다. 한지혜에게서 어떤 비극적 정서를 읽어내기는 조금 어렵다. 백지 역에는 윤진서가 더 적절하게 어울리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햄버거에 대한 명상 민음 오늘의 시인 총서 22
장정일 지음 / 민음사 / 200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그해 봄, 교정에는 '포스트 모던'이라는 유령이 배회하고 있었다. 강의실에선 '포스트 모더니즘'이 침을 튀기며 혈압을 올리는 문학교수의 입을 비집고 나왔고, 도서관엔 포스트모더니즘 관련 책들이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지난날의 저 빛나던 헤겔과 맑스와 루카치가 헌책으로 도매금으로 고물상으로 팔려나갔고, 그 빈자리에서 아도르노와 보드리야르, 푸코와 데리다가 화사한 장정을 걸치고 나타나, 68정신과 BE FREE, Born To Natural을 외쳤다. 학생운동은 시들해져 있었고, 학생들은 거리를 버리고 맥도날드와 스타벅스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햄버거와 커피를 마시면서 힙합과 랩과 연애를 이야기했다. '섹스'와 '해방'과 '쿨'이 시대적 담론으로 뻔뻔하게 논의되기 시작했고, 지난날의 모랄과 상식은 땅위에 버려졌지만,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았다. 그해 4월 벚꽃이 하얗게 피어난 중앙도서관 옥상에서, 책만 읽어오던 한 복학생이 꽃잎처럼 떨어져 내렸고, 5월 즈음에는 머리에 꽃을 꽂은 한 여인이 손에 책과 휘발유병을 들고 교정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거리 거리마다, 부도덕과 음란함과 혼돈이, 버려진 콘돔처럼 넘쳐났다. 그 시절 순진성에 길들여져있던 나는, '포스트모던'이라는 데카당스한 현실이 두려웠고, 내 순진성이 훼손될까봐 날마다 불안하기만 했다.

 
*
장정일은, 중앙도서관 2층 시집코너 A열 38번칸 기형도의 <입속의 검은잎>과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사이에 끼어있었다. <햄버거에 대한 명상>(민음사). 시집의 윗부분 1/2을 오렌지색으로, 아래 1/2을 흰색으로 구성하고, 장정일의 소년같은 얼굴을 흑백사진으로 오른쪽 상단에 박아둔 그 시집은, 시집같지 않고 '요리책' 같았다. 그날 도서관 문을 닫을 때까지 열람실 창가 구석자리에 앉아 장정일을 읽었다. 포스트 모던의 한국적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장정일/ 이성복/ 하재봉 따위의 시인을 읽어야한다는 첫사랑 그애의 조언을 따랐다. 그 전까지 읽어오던 김수영, 김춘수, 서정주과, 장정일은 분명 달랐다. 재치, 현학, 실험, 해체. 불온의 정신이 꿈틀대며 시집 전면에 넘치고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 당시의 나의 순진성은 그의 불온성(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음란성, 아니 도색성)을 도저히 몸으로 받아낼 수 없었다. 오래된 것에 이끌리는 내 정신의 처녀막은, 확실히 완고했다. 장정일의 불온성은, 몸 위를 징그러운 뱀이 기어가는 느낌이었다. 저급한 미국 도색영화나, 잡지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 내 몸에 지문자국들이 어지럽게 찍히는 듯한 느낌.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고 있는 듯한 느낌. 내가 철저히 타락하고 있거나, 내가 살아가는 현실이 철저히 타락했거나 하는 느낌. 나에게 장정일은, '선악과'로 꾀는 뱀처럼, 사악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 '장정일'은 뱀처럼 정말 사악하게, 자꾸만 나의 뇌리 속에 똬리를 틀고 들어왔다.
여름방학이 시작되던 그 즈음, 첫사랑 그 아이를 기다리던 반월당 제일서적 1층 한국소설 코너에서 장정일의 <아담이 눈뜰때>를 서서 읽으면서, 나는 나즈막히 읊조렸다. 아아! 장정일은 진정 개새끼군. 거들떠 보기도 싫었고, 침을 뱉고 싶었다. 그날 반월당 근처 선술집에서 만난 첫사랑 그애는, 장정일에 대해 괴로워하는 나에게, '너, 최인호 좋아하잖아? 최인호의 청년정신을 90년대식으로 이어받고 있는 작가가 장정일이야. 진정한 작가지. 진정으로 타락한 세상을 진정으로 타락한 방식으로 구원하려는. 틀림없이 넌 장정일을 좋아하게 될 거야, 나를 좋아하는 만큼이나!' 싱긋 웃었다. 
  

*
장정일과 친해지게 된 것은, 기형도의 산문 <짧은 여행의 기록>을 읽고나서였다. 포스트모던을 이해하기 위해 장정일의 사악함/ 추악함을 만나게 된 나는, 장정일과 포스트모던을 던져버리고, 한동안 보다 고전적이고 옛스런 정신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횔덜린의 <히페리온>과,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토마스 만의 <선택받은 자>와 지드의 <지상의 양식>을 거쳤다. 그리고 그 끝에서 기형도를 발견했다. 기형도의 기행산문 속에는 장정일이 짧게 언급되고 있었는데, 기형도가 묘사한 그 소년같고 순결해보이는 이미지를 통해 장정일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할 수 있었고, 어쩌면 내가 장정일을 오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그의 시와 소설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새로운 눈으로, 새로운 마음으로(진정한 이해와 사랑에 도달하는데 결정적인 장애가 되는 것이 딱딱한 시선과 편협한 마음일 것이므로). <아담이 눈뜰때>는, 5번의 시도끝에 추악함-음란함의 느낌에서 벗어나 그 진정성을 겨우 깨달을 수 있었다. <햄버거에 대한 명상><길위에서 택시잡기><서울에서 보낸 3주일>과 같은 이른바 장정일 시 3부작들은, 그 시절 나의 시에 대한 열정과, 그리고 KAFKA의 부조리성에 대한 이해와 만나면서 그 불온성-해체성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특히, <길안에서 택시잡기>와 <강정간다>처럼, 새로운 글쓰기와 해체적 실험, 존재의 부조리성을 다루는 장정일의 시들은, 한국시가 거둔 새로운 자극이었음이 분명하다. 


*
장정일에 대한 이해를 통해, 나는 내 시대의 혼란, 그러니까 포스트모던 현상을 이해하게 되었다. 혼란이 우리의 현실이라는 것. 우리는 적어도 그 혼란한 현실에 정직해야한다는 것. 기존의 질서에 사로잡혀 현실의 무질서를 제단하려해서는 안된다는 것. 혼돈과 무질서가 새로운 정돈과 질서를 만들어낸다는 것.  장정일의 시와 소설에 그려진 현실 그대로였다. 장정일이 어느 인터뷰에서 '나는 적어도 2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제대로 이해될 것이다.'라고 말한 것은 진실일 것이다. 장정일을 통해, 펄프픽션/ 펄프에세이를 기꺼이 사랑하게 되었고, 6~70년대 진정한 작가들과 예술을 또한 사랑하게 되었다. 제니스 조플린, 짐모리슨, 레드제플린, 핑크플로이드, 지저스 크라이스 슈퍼스타, I don't know how to love him, 무소르그스키, 가스통 바슐라르, 로버트 쿠버, 헤롤드 핀터, 아더 밀러, 레이먼드 카버, 존 치버, 잉게보르그 바하만, 파리 텍사스, 김승옥, 최인호, 정현종,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내일을 향해 쏴라,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끝도 없는 예술가, 예술작품을 장정일을 통해 배웠고, 장정일을 통해 텍스트의 의미를 보다 해체적이고 전복적으로, 그리고 불온하게 이해하는 방식을 배울 수 있었다. 최근의 수도승같은 모습도, 그가 진정한 작가이며, 시대에 정직하고 시대를 사랑하는 작가임을 깨닫게 한다. 그의 글 한마디 한마디에는, 그야말로 땀냄새와 피냄새로 가득하다. 나는 그 글들을 사랑한다. 

 
*
장정일의 책들은 모두 내 책꽂이 한켠을 가득 채우고 있는데, 대부분 초판본이고 작가 서명본도 있다. <내게 거짓말을 해봐>부터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성/아침><상복을 입은 시집>까지. 심지어 그의 저열하고 비루한 소설<웬? 오렌지>까지(<웬? 오렌지>는 쓰레기다, 그가 서울에 올라가서 돈때문에 쓴, 걸레같은 글이다. 소설이라고 부르기도 아까운 책이다). 내가 장정일의 책을 모두 소장하고 있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의 정신이다. 타락한 시대를 타락한 방식으로 드러낼 수 밖에 없었던 그의 절망과 작가적 정직성. 나는 그 정직성을 사랑한다. 장정일을 처음 나에게 소개해준 것도 첫사랑 그애였고, 그 정신을 이해시켜준 것도 그애였다. 그러니까, 장정일은 내 첫사랑의 아주 내밀한 부분과 겹쳐있다. 그것을 내 청춘과, 내 사랑의 열정과 순수라고 불러도 좋을지.

 
P.S.
나는 장정일을 딱 한번 본 적 있다. 동대구 고속터미널 앞에서 였는데, 그는 스포츠 모자를 눌러쓰고 어떤 여자랑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함부로 아무말도 걸어보지 못했다. 그때, 나는 내 첫사랑 그애와 똑같은 이름, 똑같은 이미지를 가진 그녀를 위해, 馬山행 고속버스티켓을 끊어주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가만히 꼭 쥐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