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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 투 리브 (1disc) - 할인행사
프랑소와 오종 감독, 잔느 모로 외 출연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7년 7월
평점 :
품절
Ⅰ.
카메라는, 소년의 뒷모습을 가까이에서 잡는다. 소년의 저 앞 멀리로 바다가 보인다. 파도가 일렁인다. 바다에서 불어온 바람에 소년의 머리카락이 흩날리지만, 소년은 바다를 가만히 지켜볼 뿐이다. 오랫동안, 침묵에 싸여. 그러다 소년은 일어나 천천히 바다를 향해 걸어간다. 카메라 앞의 소년의 몸이 카메라에서 멀어질수록, 소년은 작아지고 멀리 어렴풋히 일렁이던 바다는 보다 선명해진다. 거세게 밀려오는 파도 앞에 서있는 소년이, 위태로워 보인다.
바닷가의 소년은 유년의 로맹이다. 소년 로맹 앞에 멀리서, 어렴풋하게 일렁이고 있는 바다는, 삶의 저편 어딘가에서 밀려오고 있는 죽음이다. 어린 로맹이 크게 보이다가 카메라에서 멀어짐에 따라 작게 보이고, 그에 따라 파도치는 바다가 크게 보이는 것은 어린 시절부터 로맹 가까이에 죽음이 일렁이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아니면, 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우리들 삶의 배경은 항상 죽음이라는 것.
Ⅱ.
로맹은 유능한 사진작가이다. 어느 날 사진을 찍다가 쓰러진 그에게, 병원은 시한부 삶을 선언한다. 길어야 3개월. 그는 화학치료를 거부한 채, 자신의 삶을 정리해나간다. 자신의 죽음을 가족에게도 비밀에 부치고, 게이인 그의 애인 샤샤에게도 그 사실을 숨긴다. 다만, 이제 죽음을 앞둔 그의 할머니를 찾아가는 로맹. 그 길에 들른 휴게소 레스토랑 여주인의 로맹에 대한 호기심어린 관심. 알 듯 모를 듯한 여주인의 미소. 황급히 레스토랑을 떠나는 로맹.
그날 저녁, 로맹은 할머니와 저녁식사를 함께 하면서 자신의 시한부 삶을 고백하고 위로를 받는다. 그리고 어린 시절 자신의 추억이 있는 숲 속을 산책하면서, 삶으로부터 멀어지는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면서 상념에 잠긴다. 할머니와 하룻밤을 같이 보내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다시 들른 휴게소 레스토랑. 그리고 다시 로맹 앞에 나타난 레스토랑 여주인, 그리고 그녀의 알 듯 모를 듯한 미소. 무정자증의 남편을 대신해서 아이를 갖는데 도움을 달라는 여주인의 제안. 불쾌한 마음으로 자리를 떠나는 로맹. 그리고 연인 샤샤와의 결별. 홀로 남겨진 로맹, 깊어지는 로맹의 죽음의 그림자. 그리고 객혈. 죽음에의 두려움. 다시 휴게소 레스토랑을 찾아가서 부부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로맹.
죽음의 의식에 사로잡힌 로맹이 자신의 나머지 삶을 위로받기 위해 찾아간 것이 할머니인 것은 자연스럽다. 할머니도 죽음 가까이에 있으므로, 동질감을 가진 존재이므로. 그런데, 그 할머니가 젊은 시절 남편(로맹의 할아버지)를 여의고 아이(로맹의 아버지)를 버리고 자기의 살 길을 찾아갔던 할머니라는 사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할머니는 자신을 찾아온 로맹에게 지난날 로맹의 아버지를 버린 사실을 이야기하면서, '아들을 데리고 있으면 자신도 죽을 거 같아서였다'고 말한다. 이 대목은 <타임 투 리브>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젊은 시절의 할머니는,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 자신의 아들을 버리는 부도덕/ 비윤리의 삶을 살았다. 할머니의 고백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죽음은 아주 힘이 세다, 도덕/ 윤리/ 법/ 규범/ 상식, 이 모든 것보다도. 그런 점에서 죽음을 앞둔 로맹이, 젊은 시절 죽음에 대한 두려움때문에 도덕과 윤리와 법과 규범과 상식을 저버렸던 할머니를 만난다는 설정은, 로맹이 죽음 앞에서 사회적 질서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또다른 사례로, 할머니 댁에 오는 길에 잠깐 들른 휴게소 레스토랑의 여주인이 로맹에게 호기심어린 관심을 보인다는 설정을 들 수 있다. 죽음을 앞둔 로맹이, 결국 불임의 남편을 대신해서 자신에게 아이를 갖게 해달라는 부도덕/ 비윤리적 부탁을 하는 레스토랑 여주인을 만난다는 설정은, 로맹이 죽음 앞에서 도덕/ 윤리 등에 대한 혼란, 고민의 길에 들어섰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Ⅲ.
로맹과 레스토랑 부부, 셋이 함께 하는 생식(生植)행위. 로맹과 여주인의 생식행위, 그리고 그 생식행위를 하는 자신의 아내와, 그리고 그 옆의 로맹과도 사랑을 나누는 남편. 동성애. 그리고 윤리적이지 못한, 결코 용납될 수 없는 부도덕. 죽음의 두려움. 그것을 넘어선 생명에의 애착. 도덕과 윤리, 법과 규범으로부터 벗어난 3명의 사랑.
<타임 투 리브>에서 가장 아름답고 눈물이 나는 씬.
분명히 추악하고 역겨울 수 있는 장면임에도, 너무나 아름답고 숭고하게 절제된 씬.
<타임 투 리브>에서 가장 아름답고 순수하고 평화로우며 가슴아픈 장면. 그러면서도 삶의 이유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고민하고 느낄 수 있게 하는 장면. 죽어가는 로맹. 새로운 생명을 얻고자 소망하는 부부. 죽음으로 인해 흔적없이 사라져갈 자신의 존재에 대한 로맹의 불안과 두려움은, 사회적 모랄(도덕/윤리)의 금기를 넘어서는 자세로 나아간다. 사회적 질서가 그어놓은 금을 밟지 않기 위해, 죽음 앞에서의 불안과 두려움을 그대로 안고 갈 것인가? 아니면, 그 선을 넘어섬으로써 자기 생의 흔적을 남겨 자기 존재를 영원히 남길 것인가? 로맹은, 후자를 선택한다.
이 대목이 말하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죽음에 대한 불안에서 벗어나 자기존재의 영원성을 확보하려는 인간적 본능은 사회적 모랄로는 통제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사회적 모랄은 아직 생(생명/삶)이 남아 있는 자들을 위한 것이라는 것.
낯모르는 남자와, 불임의 남편과, 아이를 갖기를 원하는 아내 3명이 아이를 만들기 위해 섹스를 하는 장면은 그자체로 역겹다. 그리고 낯선 남자와 자기 아내가 새로운 생명을 갖기 위해 생식행위를 하는 그 옆자리에서 그것을 지켜보는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아내와 심지어 낯선 남자와 사랑을 나누는 남편은 추악한 선을 넘어선다.
하지만 그들의 행위에 대한 '역겹다' '추악하다'는 가치판단은, 아직 살아 있는 자들이 내릴 수 있는 가치판단이다.
내가 내일 죽음을 맞이한다고 할때, 내가 반드시 지켜야할 사회적 모랄의 선은 어디까지일까? 아주 없지는 않겠지만, 사회적 금기의 선은 지금보다 훨씬 느슨할 것임은 분명하다. 실제로 <타임 투 리브>에서 이 장면은, 너무나 아름답고 순수하고 평화롭다. 그러면서 가슴아프기까지 하다. 역겨움과 추악함의 감정은 찾아볼 수가 없다.
프랑소와 오종은 묻는다,
죽음 앞에서, 우리들의 삶이란 무엇인가?
죽음 앞에서, 삶의 기준인 도덕과 윤리와 법과 규범과 상식은 무엇인가?
Ⅳ.
그로부터 2개월여 후, 자신의 모든 재산을 레스토랑 부부의 곧 태어날 아이에게 유산으로 남기는 로맹. 레스토랑 부부와의 이별. 생의 모든 것으로부터의 이별. 결심하듯 해변으로 해수욕을 떠나는 로맹. 따사로운 햇빛, 행복해하는 사람들. 멀리서 일렁이는 파도. 내일 곧 죽을 몸이라는 걸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 하늘과 바다와 사람들과 눈부신 세상을 사진찍는 로맹. 그리고 해수욕. 그리고 일광욕. 마지막인 듯 모래사장에 누워 세상을 둘러보는 로맹.
죽음을 앞둔 로맹이 찾아간 바다는, 어린 시절의 로맹 앞에 일렁이던 그 바다다. 그것은, <타임 투 리브>가 수미상관의 구조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구조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죽음을 앞둔 로맹이 어린 시절의 로맹을 찾아간다는 설정도 흥미롭거니와(실제로 로맹은 그 바닷가에서 어린 시절의 자신을 만난다. 이 영화에는 로맹이 죽음을 인식하게 된 이후, 줄곧 로맹의 근처를 어린 로맹이 따라다니는 환상을 보여준다. 이 영화의 또다른 형식적 미학이다), 그 만남이 바닷가에서 이루어진다는 것도 흥미롭다. 우리는 시간이 흐를수록 어린 시절로부터 멀어지는가? 가까이 가는가? 어린 로맹과, 죽음을 앞둔 로맹 앞에 일렁이는 바다는, 우리, 혹은 우리의 삶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죽음의 은유체이지 않을까? 죽음이 우리의 곁을 내내 따라다니는 우리의 그림자와 같은 것이라면, 그리하여 우리는 내내 죽음의 두려움과 불안 앞에 설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라면, 우리가 지켜야할 삶의 모랄은 무엇이고 어디까지인가?
죽음을 앞두고, 사회적 모랄을 위반하여 더 큰 삶/ 생명의 세계로 나아가는 로맹을 보면, 왜 자꾸 카뮈의 <이방인>의 뫼르소가 떠오르는가? 뫼로소의 이름이 mar라는 바다를 뜻하는 단어에서 왔음은 또 어떤 연관성을 갖는가?
Ⅴ.
시간이 지나, 해가 지고 있는 해변가. 바닷가를 떠나는 사람들.
멀리서 일렁이며 밀려드는 밀물. 모래사장에서 일어날 줄 모르는 로맹.
로맹의 실루엣을 배경으로 천천히 지고 있는 해, 그리고 밀려드는 바다.
세상의 마지막 빛을 바라보는 듯 일몰의 빛을 바라보는 로맹. 그리고 눈물.
바다에 서서히 잠기는 로맹.
일몰의 아름다움에 눈물을 흘리는 로맹.
삶의 부조리에 죽음으로 맞선 뫼르소.
죽음의 조리에 생명으로 맞선 로맹.
분명하다, 로맹은 21세기 뫼르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