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버거에 대한 명상 민음 오늘의 시인 총서 22
장정일 지음 / 민음사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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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봄, 교정에는 '포스트 모던'이라는 유령이 배회하고 있었다. 강의실에선 '포스트 모더니즘'이 침을 튀기며 혈압을 올리는 문학교수의 입을 비집고 나왔고, 도서관엔 포스트모더니즘 관련 책들이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지난날의 저 빛나던 헤겔과 맑스와 루카치가 헌책으로 도매금으로 고물상으로 팔려나갔고, 그 빈자리에서 아도르노와 보드리야르, 푸코와 데리다가 화사한 장정을 걸치고 나타나, 68정신과 BE FREE, Born To Natural을 외쳤다. 학생운동은 시들해져 있었고, 학생들은 거리를 버리고 맥도날드와 스타벅스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햄버거와 커피를 마시면서 힙합과 랩과 연애를 이야기했다. '섹스'와 '해방'과 '쿨'이 시대적 담론으로 뻔뻔하게 논의되기 시작했고, 지난날의 모랄과 상식은 땅위에 버려졌지만,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았다. 그해 4월 벚꽃이 하얗게 피어난 중앙도서관 옥상에서, 책만 읽어오던 한 복학생이 꽃잎처럼 떨어져 내렸고, 5월 즈음에는 머리에 꽃을 꽂은 한 여인이 손에 책과 휘발유병을 들고 교정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거리 거리마다, 부도덕과 음란함과 혼돈이, 버려진 콘돔처럼 넘쳐났다. 그 시절 순진성에 길들여져있던 나는, '포스트모던'이라는 데카당스한 현실이 두려웠고, 내 순진성이 훼손될까봐 날마다 불안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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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은, 중앙도서관 2층 시집코너 A열 38번칸 기형도의 <입속의 검은잎>과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사이에 끼어있었다. <햄버거에 대한 명상>(민음사). 시집의 윗부분 1/2을 오렌지색으로, 아래 1/2을 흰색으로 구성하고, 장정일의 소년같은 얼굴을 흑백사진으로 오른쪽 상단에 박아둔 그 시집은, 시집같지 않고 '요리책' 같았다. 그날 도서관 문을 닫을 때까지 열람실 창가 구석자리에 앉아 장정일을 읽었다. 포스트 모던의 한국적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장정일/ 이성복/ 하재봉 따위의 시인을 읽어야한다는 첫사랑 그애의 조언을 따랐다. 그 전까지 읽어오던 김수영, 김춘수, 서정주과, 장정일은 분명 달랐다. 재치, 현학, 실험, 해체. 불온의 정신이 꿈틀대며 시집 전면에 넘치고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 당시의 나의 순진성은 그의 불온성(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음란성, 아니 도색성)을 도저히 몸으로 받아낼 수 없었다. 오래된 것에 이끌리는 내 정신의 처녀막은, 확실히 완고했다. 장정일의 불온성은, 몸 위를 징그러운 뱀이 기어가는 느낌이었다. 저급한 미국 도색영화나, 잡지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 내 몸에 지문자국들이 어지럽게 찍히는 듯한 느낌.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고 있는 듯한 느낌. 내가 철저히 타락하고 있거나, 내가 살아가는 현실이 철저히 타락했거나 하는 느낌. 나에게 장정일은, '선악과'로 꾀는 뱀처럼, 사악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 '장정일'은 뱀처럼 정말 사악하게, 자꾸만 나의 뇌리 속에 똬리를 틀고 들어왔다.
여름방학이 시작되던 그 즈음, 첫사랑 그 아이를 기다리던 반월당 제일서적 1층 한국소설 코너에서 장정일의 <아담이 눈뜰때>를 서서 읽으면서, 나는 나즈막히 읊조렸다. 아아! 장정일은 진정 개새끼군. 거들떠 보기도 싫었고, 침을 뱉고 싶었다. 그날 반월당 근처 선술집에서 만난 첫사랑 그애는, 장정일에 대해 괴로워하는 나에게, '너, 최인호 좋아하잖아? 최인호의 청년정신을 90년대식으로 이어받고 있는 작가가 장정일이야. 진정한 작가지. 진정으로 타락한 세상을 진정으로 타락한 방식으로 구원하려는. 틀림없이 넌 장정일을 좋아하게 될 거야, 나를 좋아하는 만큼이나!' 싱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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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과 친해지게 된 것은, 기형도의 산문 <짧은 여행의 기록>을 읽고나서였다. 포스트모던을 이해하기 위해 장정일의 사악함/ 추악함을 만나게 된 나는, 장정일과 포스트모던을 던져버리고, 한동안 보다 고전적이고 옛스런 정신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횔덜린의 <히페리온>과,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토마스 만의 <선택받은 자>와 지드의 <지상의 양식>을 거쳤다. 그리고 그 끝에서 기형도를 발견했다. 기형도의 기행산문 속에는 장정일이 짧게 언급되고 있었는데, 기형도가 묘사한 그 소년같고 순결해보이는 이미지를 통해 장정일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할 수 있었고, 어쩌면 내가 장정일을 오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그의 시와 소설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새로운 눈으로, 새로운 마음으로(진정한 이해와 사랑에 도달하는데 결정적인 장애가 되는 것이 딱딱한 시선과 편협한 마음일 것이므로). <아담이 눈뜰때>는, 5번의 시도끝에 추악함-음란함의 느낌에서 벗어나 그 진정성을 겨우 깨달을 수 있었다. <햄버거에 대한 명상><길위에서 택시잡기><서울에서 보낸 3주일>과 같은 이른바 장정일 시 3부작들은, 그 시절 나의 시에 대한 열정과, 그리고 KAFKA의 부조리성에 대한 이해와 만나면서 그 불온성-해체성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특히, <길안에서 택시잡기>와 <강정간다>처럼, 새로운 글쓰기와 해체적 실험, 존재의 부조리성을 다루는 장정일의 시들은, 한국시가 거둔 새로운 자극이었음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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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에 대한 이해를 통해, 나는 내 시대의 혼란, 그러니까 포스트모던 현상을 이해하게 되었다. 혼란이 우리의 현실이라는 것. 우리는 적어도 그 혼란한 현실에 정직해야한다는 것. 기존의 질서에 사로잡혀 현실의 무질서를 제단하려해서는 안된다는 것. 혼돈과 무질서가 새로운 정돈과 질서를 만들어낸다는 것.  장정일의 시와 소설에 그려진 현실 그대로였다. 장정일이 어느 인터뷰에서 '나는 적어도 2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제대로 이해될 것이다.'라고 말한 것은 진실일 것이다. 장정일을 통해, 펄프픽션/ 펄프에세이를 기꺼이 사랑하게 되었고, 6~70년대 진정한 작가들과 예술을 또한 사랑하게 되었다. 제니스 조플린, 짐모리슨, 레드제플린, 핑크플로이드, 지저스 크라이스 슈퍼스타, I don't know how to love him, 무소르그스키, 가스통 바슐라르, 로버트 쿠버, 헤롤드 핀터, 아더 밀러, 레이먼드 카버, 존 치버, 잉게보르그 바하만, 파리 텍사스, 김승옥, 최인호, 정현종,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내일을 향해 쏴라,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끝도 없는 예술가, 예술작품을 장정일을 통해 배웠고, 장정일을 통해 텍스트의 의미를 보다 해체적이고 전복적으로, 그리고 불온하게 이해하는 방식을 배울 수 있었다. 최근의 수도승같은 모습도, 그가 진정한 작가이며, 시대에 정직하고 시대를 사랑하는 작가임을 깨닫게 한다. 그의 글 한마디 한마디에는, 그야말로 땀냄새와 피냄새로 가득하다. 나는 그 글들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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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의 책들은 모두 내 책꽂이 한켠을 가득 채우고 있는데, 대부분 초판본이고 작가 서명본도 있다. <내게 거짓말을 해봐>부터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성/아침><상복을 입은 시집>까지. 심지어 그의 저열하고 비루한 소설<웬? 오렌지>까지(<웬? 오렌지>는 쓰레기다, 그가 서울에 올라가서 돈때문에 쓴, 걸레같은 글이다. 소설이라고 부르기도 아까운 책이다). 내가 장정일의 책을 모두 소장하고 있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의 정신이다. 타락한 시대를 타락한 방식으로 드러낼 수 밖에 없었던 그의 절망과 작가적 정직성. 나는 그 정직성을 사랑한다. 장정일을 처음 나에게 소개해준 것도 첫사랑 그애였고, 그 정신을 이해시켜준 것도 그애였다. 그러니까, 장정일은 내 첫사랑의 아주 내밀한 부분과 겹쳐있다. 그것을 내 청춘과, 내 사랑의 열정과 순수라고 불러도 좋을지.

 
P.S.
나는 장정일을 딱 한번 본 적 있다. 동대구 고속터미널 앞에서 였는데, 그는 스포츠 모자를 눌러쓰고 어떤 여자랑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함부로 아무말도 걸어보지 못했다. 그때, 나는 내 첫사랑 그애와 똑같은 이름, 똑같은 이미지를 가진 그녀를 위해, 馬山행 고속버스티켓을 끊어주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가만히 꼭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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