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내 이야기를 쓰려고 했다. ... 무엇이 되었든 나 자신을 위한 글을 쓰겠다고 생각했다. 나의 세계를 정비하려던 것이었다. - P5
"그것도 맞는데, 지금도 묶을 수 있어요. 어른은 발리 할 수 있고, 어린이는 시간이 걸리는 것만 달라요." ... 어린이는 나중에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지금도 할 수 있다. 시간이 걸릴 뿐이다. - P18
어린이에게 ‘착하다‘는 말을 잘 쓰지 않는다. 착한 마음을 가지고 살기에 세상이 거칠기 대문이기도 하고, 그렇기 때문에 착하다는 말이 약하다는 말처럼 들릴 때가 많아서이기도 하다. 더 큰 이유는 어린이들이 ‘착한 어린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 두려워서다. 착하다는 게 대체 뭘까? 사전에는 ‘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상냥하다‘고 설명되어 있지만, 실제로도 그런 뜻으로 쓰이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보다는 어른들의 말과 뜻을 거스르지 않는 어린이게게 착하다고 할 때가 더 많은 것 같다. 그러니 어린이에게 착하다고 하는 건 너무 위계적인 표현 아닌가. - P32
"서로 몸이 달라도 같이 놀자." 그 순간 나는 예지에게 백오십 번째로 반했기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졌지만 ‘존중‘이라는 단어를 가르치겠다는 일념으로 다시 기회를 줬다. 예지는 이번에는 이렇게 썼다. "서로 몸이 달라도 반겨 주자." 백오심 한 번째 반한 상태로 나는 두 문장 옆에 각각 하트를 그리고, 조그맣게 ‘존중하자‘라는 말도 적었다. - P36
"나눠 줘요!"는 ‘곱고 바른 말‘이고, "같이 놀자""반겨 주자"는 ‘상냥한 마음씨‘다. 사전 뜻 그대로다. 어린이는 착하다. 착한 마음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어른인 내가 할 일은 ‘착한 어린이‘가 마음 놓고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나쁜 어른을 응징하는 착한 어른이 됙ㅆ다. 머리에 불이 붙고 속이 시커매질지라도 포기하지 않겠다. 이상한 일이다. 책은 내가 어린이보다 많이 읽었을 텐데, 어떻게 된 게 매번 어린이한테 배운다. - P37
나는 어린이의 품위를 지켜 주는 품위 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 어린이 앞에서만 그러면 연기가 들통나기 쉬우니까 평소에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감사를 자주 표현하고, 사려 깊은 말을 하고, 사회 예절을 지키는 사람. 세상이 혼란하고 떠들썩할 때일수록 더 많이, 결코 자연스럽지 않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 P45
"밑에 모래 있으면 떨어져도 안 아파요." 이 말을 더올릴 때마다 어른의 역할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 P63
"이 책을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이 책이 선생님한테 있잖아요? 하지만 다 똑같은 책이어도 이 책엔 제 마음이 있어요." - P72
"선생님, 저희는 일을 안 해도 돼요. 엄마 아빠가 사 주세요." ... 하긴 아직 어린 사람들이 중년의 멋과 여유, 자유로움 같은 걸 어떻게 알겠어? 다들 커 봐야 알지. 공부도 하고, 방황도 하고, 성공도 하고 실패도 하고, 응? 이런저런 경험도 하고 말이야. 응? 열두 살이 알긴 뭘 알아! 너희가 뭘 알아! 그날 밤에는 분해서 잠이 안왔다. - P82
나는 ‘개성‘이라고 하면 유별난 점, 뚜렷이 드러나는 특징, 남들과 확실히 구분되는 독보적인 무언가를 떠올리곤 했다. 그러면서도 장점이나 장점으로 봐 줄 만한 무언가여야 개성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것이 없으면 평범한 사람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어린이들 덕분에 개성이란 ‘고유성‘에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됐다. - P86
나는 어린이들의 존댓말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기로 했다. 마음 같아서는 남녀노소 누구나 서로서로 존댓말을 쓰고 친한 사이에만 반말을 쓰는 세상이 되면 좋겠지만, 그런 날이 오기 전까지는 어린이의 말에 더 많이 귀를 기울이겠다고 다짐한다. 어린이가 표현한 것만 듣지 않고, 표현하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겠다고. 어린이가 말에 담지 못하는 감정과 분위기가 무엇인지 알아내는 어른이 되겠다고. - P192
나는 어린이 고객에게 존댓말을 듣는 대신, 낯선 어린이에게는 상황 불문하고 존댓말을 쓴다. 상대가 어른이라면 하지 않을 말이나 행동은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어린이가 너무너무 귀여워도 계속 바라보거나 어르는 말투를 쓰거나 하지 않는다. - P193
‘얌전한 어린이‘를 선별해서 손님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것 자체가 혐오이고 차별이라는 데에 어떤 논의가 더 필요한 걸까? - P209
"왜 안 낳아?"라는 질문도 많이 받았다. 나는 "왜 낳았어?"라고 묻지 않는데. "안 낳으면 나중에 후회해"라는 말도 들어봤다. 나는 "낳은 거 나중에 후회할걸"이라고 하지 않는데. - P216
사회가, 국가가 부당한 말을 할 때 우리는 반대말을 찾으면 안 된다. 옳은 말을 찾아야 한다. 우리가 사회에 할 수 있는 말, 해야 하는 말은 여성을 도구로 보지 말라는 것이고, 아이를 낳고 키우기 좋은 세상을 만들라는 것이다. - P219
우리가 어린이를 위해서 목소리를 내는 것은 어린이 스스로 그렇게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약자에게 안전한 세상은 결국 모두에게 안전한 세상이다. 우리 중 누가 언제 약자가 될지 모른다. 우리는 힘을 합쳐야 한다. 나는 그것이 결국 개인을 지키는 일이라고 믿는다. - P219
언제나 절망이 더 쉽다. 절망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얻을 수 있고, 무엇을 맡겨도 기꺼이 받아 준다. 희망은 그 반대다. 갖기로 마음먹는 순간부터 요구하는 것이 많다. 바라는 게 있으면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고, 외면하면 안 된다고, 심지어 절망할 각오도 해야 한다고 우리를 혼낸다. 희망은 늘 절망보다 가차 없다. 그래서 우리를 걷게 한다. - P220
세상에는 어린이를 울리는 어른과 어린이를 웃게 하는 어른이 있다. 어느 쪽이 좋은 어른인지, 우리는 알고 있다. - P228
내 기억 속의 4.19 혁명은 대학생, 고등학생이 주축이 되어 독재 타도를 외치며 일으킨 것이었다. 부끄럽지만 나는 당시 시위대에 어린이가 있던 것을 몰랐다. - P232
어린이의 직관은 무엇을 꽤뚫어 보는 신통한 능력이 아니라, 있는 것을 그대로 보는 힘이다. 늘 정확한 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모르는 게 아니다. 모를 수가 없다. 전한승 어린이가 사망한 뒤 수송초등학교 어린이들이 시위에 나설 때 4학년 강명희 어린이는 이런 시를 썼다고 한다.
... 나는 알아요 우리는 알아요 엄마 아빠 아무말도 안 해도 오빠와 언니들이 왜 피를 흘렸는지를... - P235
어린이들에게는 서운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어린이날이 어린이의 소원을 들어주는 날에 그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보다는 어린이가 ‘해방된 존재‘가 맞는지 점검하는 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해방된 사람들답게 자유로운지, 안전한지, 평등한지, 권리를 알고 있으며 보장받고 있는지 어린이와 어른이 함게 점검하고 잘못된 것을 고쳐나가는 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P239
어린이날 하루는 모든 TV 채널에서 하루 종일 어린이 시청자를 위한 프로그램을 방영하면 좋겠다. 만화영화만 내보내라는 게 아니다. 기존 프로그램도 어린이 시청자를 고려해서 그날 방송분을 만들면 된다. - P243
중앙방역대책본부의 코로나19 관련 어린이 특집 브리핑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출연한 전문가들이 어린이를 대하는 정중한 태도도 모범적이었지만, 나는 인형 탈 없이도 어린이를 위한 방송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준 점이 제일 좋았다. 해요체가 아니라 합쇼체로 말하는 점은 말할 것도 없다. - P243
어린이날 관련해서 여러 가지 상상을 해 볼 때 내가 반드시 이루고 싶은 소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어린이 여러분, 가족과 함께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라는 말을 금지하는 것이다. 모든 어린이가 가족과 함께 어린이날을 보낼 수 있는 게 아니다. 모든 어린이가 가족과 함께 보낸다고 해서 행복한 것도 아니다. ... "어린이 여러분, 어린이날을 축하합니다." - P246
나는 이제 어린이에게 하는 말을 나에게도 해 준다. 반대로 어린이에게 하지 않을 말은 스스로에게도 하지 않는다. 이 원칙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그래야 나의 말에 조금이라도 힘이 생길 것 같아서다. 일의 결과가 생각만큼 좋지 않을 때 괜찮다고, 과정에서 얻은 것이 많다고 나를 달랜다. 뭔가를 이루었을 때는 마음껏 축하하고 격려한다. 반성과 자책을 구분하려고, 남과 나를 비교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어린이 덕분에 나는 나를 조금 더 잘 돌보게 되었다. - P253
어린이가 그림을 망쳤을 때 "다 소용없는 일이란다. 구겨 버리렴"이라고 말할 사람은 없다. 고칠 수 있는지 보고, 안되면 새 종이를 주고, 다음에는 더 잘 그리도록 격려할 것이다. 우리 자신에게도 똑같이 말해야 한다. 실제로 어린이라면 어떻게 할까? 내가 새 종이를 주며 이런저런 미사여구를 늘어놓기도 전에 어린이는 종이를 뒤집어 뒷면에 새로운 그림을 시작한다. 냉소주의는 감히 얼씬도 못 한다. - P256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어른이 무례하다는 것을 이만큼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그러나 더욱 몰랐던 것이 있다. 그것은 어린이라는 세계가 정중하고 사려 깊고 현명함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이다.... ‘어린이라는 세계‘는 당신이 잊고 있었던, 신중하고 용감했던 당신의 세계다. - P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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