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빨갱이'라는 공격이 유효하다. 그 힘이 점점 사그라드는 것 같지만 여전히 '빨갱이'라고 공격하는 사람들이 있다.
빨치산 혁명가 아버지의 삶도 녹록지 않았다. 목숨을 건 혁명은 실패했고 많은 동지들의 죽음을 목도했으며, 결혼하고 딸을 낳고 감옥에 다녀와 자신의 모든 과거를 아는 고향사람들 틈에서 자신의 신념을 유지하며 사는 것.
또한 빨치산 가족이라는 이유로 신원조회에 걸려 꿈이 좌절되었던 가족들은 어떠했을지.
그렇게 가족들에겐 애증의 대상이었고 남 일에는 오지랖이 넓었던 아버지의 장례식.
딸은 갑작스런 죽음을 실감할 새 없이 아버지가 맺었던 여러 인연들을 만나면서 사랑하고 미워했던 아버지의 새로운 모습들을 알게 된다.
사램이 오죽하면 글겠냐던, 편견없고 이해심 많은 아버지.
한때는 너무나 사랑했던 아버지. 그러나 아버지가 투옥되면서 생긴 거리는 평생 좁혀지지 않았고 자라면서 있었을 빨치산의 딸이라는 낙인이 그 거리를 더 멀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장례식장에서 비로서 '하염없이', '사무치게'라는 표현을 곱씹으며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아버지를 보내드린다.
정겨운 사투리. 그리고 점점 마음이 가게 만드는 아버지.
그래서 마지막엔 같이 울게 되었던 책.
우리 아빠도 생각해보게 되고, 가족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고,
이제 우리에겐 없는 아버지의 그 끈끈한 인연들을 부러워하기도 하고.
그 마음 쌩깐 것이 늙어서야 마음에 걸렸다. 그래봤자 그때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마음의 상처를 준 사람이 그만은 아닐 것이다. 인간이란 이렇게나 미욱하다. 아버지도 그랬다. - P28
사람은 힘들 때 가장 믿거나 가장 만만한 사람을 찾는다. 어느 쪽이든 결과는 마찬가지다. 힘들 때 도움받은 그 마음을 평생 간직하는 사람은 열에 하나도 되지 않는다. 대개는 도움을 준 사람보다 도움을 받은 사람이 그 은혜를 먼저 잊어버린다. 굳이 뭘 바라고 도운 것은 아니나 잊어버린 그 마음이 서운해서 도움 준 사람들은 상처를 받는다. 대다수의 사람은 그렇다. 그러나 사회주의자 아버지는 그렇다한들 상처받지 않았다.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사회의 구조적 모순 탓이고, 그래서 더더욱 혁명이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 P102
무엇에도 목숨을 걸어본 적이 없는 나는 아버지가 몇마디 말로 정의해준다 한들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옳았든 틀렸든 아버지는 목숨을 걸고 무언가를 지키려 했다. 나는 불편한 모든 현실에서 몇발짝 물러나 노상 투덜댔을 뿐이다. 그런 내가 아버지를 비아냥거릴 자격이나 있었던 것인가,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미안했다. 들어오는 순간부터 나를 불편하게 한 아버지의 동지들에게도 이 불편해하는 마음이 미안했다. - P148
"또 올라네." 여기 사람들은 자꾸만 또 온다고 한다. 한번만 와도 되는데. 안번으로는 끝내지지 않는 마음이겠 지. 미움이든 우정이든 은혜든, 질기고 질긴 마음들이, 얽히고설켜 끊어지지 않는 그 마음들이, 나는 무겁고 무섭고, 그리고 부러웠다. - P196
아버지는 혁명가였고 빨치산의 동지였지만 그전에 자식이고 형제였으며, 남자이고 연인이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남편이고 나의 아버지였으며, 친구이고 이웃이었다. 천수관음보살만 팔이 천개인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도 천개의 얼굴이 있다. 나는 아버지의 몇개의 얼굴을 보았을까? 내 평생 알아온 얼굴보다 장례식장에서 알게된 얼굴이 더 많은 것도 같았다. 하자고 졸랐다는 아버지의 젊은 어느 날 밤이 더이상 웃기지 않았다. 그런 남자가 내 아버지였다. 누구나의 아버지가 그러할 터이듯. 그저 내가 몰랐을 뿐이다. - P248
|